소설리스트

107. (107/200)

"상대하기 어려운 고객들을 따로 블랙리스트 관리하여 상담을 하는데, 어느 날부터 그걸 제가 하게 됐어요."

"제가 잘 이해가 안돼서 그러는데요. 그러면 블랙리스트에서 걸려온 전화는 자동으로 제수씨가 전담하게 된다는 거죠?"

"네."

"아.."

"하루에 10명 정도 되는 꼴인데, 정말 블랙리스트 한 명만 관리해도 멘탈이 부서져 나갈 정도인데요. 하루에 그 정도를 관리하려니 도저히 버티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왜 제수씨가 그걸 관리하게 된 거죠?"

"저도 그건 잘 모르겠어요. 팀장에게 미움을 받을 것도 없고, 콜센터 일 특성상 다른 직원들하고 친목을 쌓을 일도 없는데, 제가 왜 그런 대우를 받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관행인가요? 블랙리스트 관리요."

"그건 제가 관리 업무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제가 듣기론 하청 업체들이 일정한 비율로 블랙리스트들을 관리한다고 들었어요."

"아.."

"확실한 건 아녜요."

"네."

블랙리스트를 관리하는 게 얼마나 벅찼으면 우울증까지 걸릴 정도라니, 내 머리로는 쉬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간혹 나도 콜센터에 전화하여 이것저것 물을 때가 많았는데, 대체 어느 정도로 상담사를 몰아치기에..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휴식 시간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고, 연차는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화승이란 대표를 직접 겪어보진 않았으나,

학교 폭력을 저질렀고 한 사람을 극단적인 선택까지 몰고 간 인간이 운영하는 회사인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면회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라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제수씨와 단둘이 할 말이 있다는 핑계로 오과장을 잠시 밖으로 보냈고 이제 그녀의 병을 낫게 해주고 싶었다.

워낙에 강성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려서.

우울증은 결코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병이 아니지만, 내가 가진 스킬을 통해서는 그녀의 우울증을 고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도일님의 잠재된 능력을 도식화하여 스킬 목록을 발현합니다.]

[스킬 목록]

「건강」 「기억력」 「로또」 「공감력」

「정치」 「친화력」 「식견」 「매력」

「무력」 「설득」 「혼란」 「체력」 「계산」

「이해」 「기합」 「희생」 「도발」 「공신력」

………

도식화된 스킬 중 제수씨의 우울증을 치료해줄 만한 스킬은, 공감력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공감력」

-여러 사람이 함께 공감하여 생긴 힘.

-3000UNI로 스킬 레벨업 가능

[공감력 스킬 세부 능력]

「LV1 SKILL 정서적 공감 능력 향상」

「LV2 SKILL 상대방의 마음 읽기」

「LV3 SKILL ??」

「LV4 SKILL ??」

「LV5 SKILL ??」

[6000UNI로 공감력스킬을 레벨업 합니다.]

「공감력 LV2 상승」

「공감력 LV2 한 명을 대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스킬을 발현합니다.]

[현재 내담자의 정서는 ‘불안’ ‘공포’입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정서적으로 깊이 공감하고 위로하는 일은 감정 소모를 동반하기 때문에, 나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면회 시간은 비록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녀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이야기 화두를 띄웠다.

그녀가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이해해주고, 공감하고, 그리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첫째로 불안해하는 것은, 역시 생활의 불안이었다.

본인이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카드 값, 대출을 걱정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 그리고 두 번째로는 공포였는데, 직장 내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동반된 정서였다.

불특정한 사람들과 일일이 대화를 하며 콜센터 업무를 봤던 그녀에게 어쩌면 직업병과 같은 정서이지 않을까 싶었다.

불안과 공포를 조성했던 제수씨의 증상을 건드렸더니 그녀는 그간 묵혔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들어주고, 깊이 공감해주고, 위로를 해줬다.

"제가 콜센터 하면서 진짜 엄청나게 열 받았던 건요."

"네?"

"제가 남들이 무시하는 일을 하는 건 맞는데, 실제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휴우."

"무슨 말씀을 들으셨나요?"

"그따위로 상담하면서 월급 받는 거 쪽팔리지 않느냐고 그러더라고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으니까 그따위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서.."

"참. 그런데 가만히 있었어요?"

"대꾸할 수가 없죠. 사실 제가 일을 때려 치려는 마음이었으면 대판 싸우고 나가면 그만인데. 사측에서도 업무 방해죄로 고소할까 봐. 겁이 나더라고요."

"아.."

"순간 그 얘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해지더니 결국 앉은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니까요."

"팀장은 뭐라고 해요?"

"지금 콜 들어오는데 뭐하냐며 얼른 전화 받으라고 해서 또 다음 통화 받았죠."

"많이 힘들었겠어요."

"그런 진상들이야 뭐 하루에 몇 번 참아내면 그만인데, 간혹 자존감을 짓밟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버티기가 어려웠죠. 제가 오죽 화가 나면 복수하려고 전화번호까지 외워뒀다니까요."

"정말요?"

"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번호를 외웠다며 전화번호를 내게 외우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지.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복수할래요?"

"안 돼요. 그거 불법이라 신고 먹어요."

"제 휴대폰으로 하죠."

나는 제수씨가 불러준 번호에 전화를 했고, 한 남자가 걸쭉한 목소리로 전화 받았다.

제수씨는 그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저번에 콜센터 상담사한테 무시했던 인간 맞죠?"

-뭐야?

"정의 구현을 위해 전화 드렸거든요. 잠시만요. 전화 끊지 말고 있어보세요."

-뭐하는 인간이냐고 묻잖아.

제수씨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이나 욕지거리 무엇이든 괜찮으니 당장 하라고 말했다.

제수씨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는데, 내가 대신 먼저 나서줬다.

"네가 뭔데 우리 가족한테 그따위 말로 무시하고 지랄이야. 어? 뒤지고 싶어? 너는 얼마나 잘났는데? 어?"

-미친 새끼 아냐, 왜 갑자기 지랄이야.

그때 제수씨가 입을 열었다.

"야, 씨발새꺄. 너 때문에 내가 병 걸려서 지금 입원을 했어요. 어? 우울증이 왔다고 씨발넘아."

-하, 미친년 놈들이 아주 쌩지랄을 떨어요.

"너 씹새꺄, 언젠가 신상 털어버려서 내가 큰일 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한 번만 더 콜센터 상담원한테 그따위로 말하면 너도 죽을 줄 알아!"

-뚝.

제수씨가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살 것 같네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제수씨가 도리어 내게 질문했다.

"직원들을 그렇게 아끼시는 이유가 뭐예요? 저도 사회생활을 오래 해봐서 아는데, 대표님 같은 분 없거든요."

"아끼는 이유..사실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아낀다는 것보다 동료로 생각하는 거죠. 제 목표는 제 직원들이 로또에 당첨돼서 일을 그만두게 하는 겁니다."

"네?"

제수씨가 웃었다. 로또라는 약발이 먹히는 것 같았다.

"저도 로또에 당첨되면 일을 그만둘 거거든요. 제수씨, 제가 거짓말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언젠가 오과장이 로또에 당첨되는 날이 올 겁니다. 믿어보세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진짜라니까요."

"호호호."

제수씨의 표정과 행동이 조금씩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눈은 멍했고, 피부는 수척했고, 굉장히 행동이 느릿느릿하여 정상인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이제 눈에는 활기가 띠고 있었고, 피부색이 돌아오며 행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또 뵐 날이 오면 그때는 더 좋은 모습으로 뵙죠."

"그럼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표님."

면회 시간이 끝나자 나는 병원을 빠져나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과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셨어요?"

"제수씨한테 관심 좀 가져 인마."

"..."

"대화 좀 자주하고 같이 술 한 잔도 하고. 그게 부부가 사는 낙 아니냐?"

"그건, 좀.."

"그게 아니면 뭐? 벌써 와이프가 막 의리로 보이기 시작 한 거야? 결혼해서 몇 년이나 흘렀다고, 10년은 넘었냐?"

"6년 차입니다."

"네가 언제 야근을 한번 했냐. 내가 널 붙잡고 회식을 하자고 했냐."

"네.."

"술친구 만든다 생각하고 해. 나는 내 아내가 직장에서 그런 일 당했다고 하면 눈깔 돌 것 같은데, 넌 안 그러냐?"

"알겠습니다."

* * *

[내일 아침 9시까지 출근할 수 있으세요?]

[네 가능합니다.]

콜센터 업체로부터 문자가 왔다. 역시 당연히 합격,

그런데 현준이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내기에 져서 현준이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꼴인데,

이미 휴먼매니저 깨톡방은 현준이의 불합격 사실이 공론화됐다.

고 [대표님 저 불합격 한 것 같은데요. 소원은 뭐로 준비할까요?]

정 [월급 인상?]

오 [휴먼매니저 퇴근 시간 앞당기기.]

고 [돈이냐 퇴근이냐? 과연 선택은?]

이것들이 벌써 김칫국을 한 사발 먹고 시작하네.

현준이가 불합격하면 어찌 됐든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판이다.

내가 왜 현준이가 합격하는 것에 배팅을 했냐면,

업체 입장에서는 참 빨아 먹기 좋은 순진무구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혹시 저랑 같이 온 친구는 불합격인가요?"

-지금 고민 중입니다. 혹시 서로 아시는 분인가요? 나이 차이가 꽤 있어서요.

"친인척은 아니고요. 같이 면접 본 동기로서 조금 친해졌죠. 하루 만에."

일단 거짓말로 시작.

-아. 친화력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그런데 그 친구 말투가 어눌하고 발음도 뭉개져서 영 쓰기 불편한데..

"팀장님 그런데 제가 봤을 때 그 친구 열정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사무실을 좀 보니까 어차피 수습 3개월 시급 70%만 주는 거면 무슨 잡일을 시켜도 잘하지 않겠습니까?"

-흐흐, 그런데 그건 도일씨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고요.

"네, 제가 주제넘은 말씀을 드렸네요. 하아, 그런데 그 친구가 돈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더라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면.. 음.. 정말 뒤통수치기 좋을 것 같다는 뜻이죠."

-네?

"안타까워서요. 팀장님같이 좋은 분 밑에서 일하면 이 친구도 이제 뒤통수 안 맞고 일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한번 믿어보시죠. 어차피 한 달 수습 기간 끝나면 맘대로 잘라버려도 법적으로 문제 될 것 없지 않습니까."

-흠. 일단 생각해보겠습니다.

"넵. 그리고 참고로 그 친구랑 좀 많이 친해져서요. 만약 그 친구가 안 오면 저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수고하세요!"

-...

-뚝.

현준이에게 질 수 없지.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집에 도착하여 주차를 할 때 현준이에게 전화가 왔다.

-대표님.

"어이 현준아, 왜? 무슨 일이야?"

-저 합격했습니다. 내일부터 출근하래요.

"오, 축하한다. 내일 휴먼매니저 출근하지 말고 화승으로 오라고."

-네, 그런데 혹시 팀장한테 전화하셨어요? 그 팀장이 저랑 대표님 아는 사이냐고 계속 묻던데.

"아냐, 무슨 전화를 해."

-설마, 아니죠?

"응. 아냐."

소원을 뭐로 해볼까.

* * *

다음 날 아침 현준이와 함께 콜센터 아웃소싱 회사에 들렀고, 이제 본격적으로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평균 급여는 약 180만 원 정도 했으나, 수습으로 70%만 받고, 근태와 콜 개수, 인사 평가점수에 따라 200만 원 이상도 가져갈 수 있다고 팀장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그러면 수습한달 동안은 제 월급이 약 126만 원 정도 된다는 거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