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102/200)

"...?"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죠."

"알겠습니다."

회의는 삽시간에 끝났다. 간인된 회의록을 복사하여 챙긴 뒤 복도를 걸어 운동장으로 향했다.

이사장실 창문을 통해서 봤던 학생들은 여전히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공이 내게 다가왔고, 학생들은 공을 좀 차달라며 내게 소릴 질렀다.

"공 좀 차주세요!"

그리고 나는 공을 아주 높이 차올렸다. 공을 받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이 그저 높이 솟아오른 공을 보고 있었다.

공이 바닥으로 향하자 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밀치고 넘어뜨리고 몸싸움을 시작했다.

학생들이 경쟁하는 모습을 보며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부모의 권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담임 최영성은 최해랑의 학교 폭력을 묵인했고, 학교 폭력을 주도했던 가해자들도 선생의 무너진 권위를 이용해 폭력을 저질렀다.

결론은 부모, 학생, 선생의 삼위일체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주머니에 있는 명찰을 꺼내 들었다.

‘최해랑’

휴먼매니저의 스킬을 이용해 그녀를 다시 살려주고 싶었으나,

현재 내가 가진 버전으로는 불가능했고, 그런 스킬이 있는지 확인조차 안 됐다.

하지만 내가 현재 해줄 수 있는 건 정의 구현이었다.

* * *

나는 최해랑의 명찰을 돌려주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자 삼촌이 집 밖으로 나왔다.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삼촌은 나를 안으로 들였고, 마당에는 여전히 깨진 요강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에게 회의록을 건넸다.

회의록을 읽어 내려가던 삼촌의 눈빛이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내일 학교 강당에서 학교 폭력 진상위원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상을 밝혔으면!"

"그들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든 처벌은 받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요."

"이런 말 드리기 좀 안타깝지만, 법이 그래서요."

"하아. 씨부랄.. 처벌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삼촌분과 어머님께 맡기려고요."

대화를 듣고 있던 어머님이 나의 말문을 막아서며 물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 가해자들도 온답니까?"

"네. 아마 올 겁니다."

검사, 회사원, 공무원, 자영업, 주부.

총 다섯 명의 가해자들이다.

이사장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가해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었다.

삼촌의 이가 아득 갈렸다.

"이 개새끼들 다 뒤졌어."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어쩌긴요. 내가 이 날을 기다렸거든."

"학생들도 다 보고 있는 자리에서 폭력은 금지입니다."

"뒷방으로 끌고 가든 뭐하든 분풀이 단단히 해줄 거요. 나 말리는 놈 있거든 다들 죽여 버릴 라니까."

"..."

딱히 간섭할 마음은 없다.

그가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런데

"검사를 패면 그거 강력범죄예요."

사실 누구를 폭행하든 강력 범죄지.

"알다마다요. 그 새끼를 지옥으로 보내든 내가 빵으로 들어가든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은 마소."

"그게 아니라 저한테 말씀만 먼저 해주세요."

"...?"

"제가 가진 권위에 복종을 시켜야 돼서요."

언젠가 만나면 다 뒤졌어.

17년 전에 나도 학교 뒷골목에서 먼지 나게 몰매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

과거 선배들에게 뒷골목 통행료를 내지 않겠다며 아득바득 우겼고, 그렇게 고집부리고 우긴 탓에 내 턱은 작살나 금이 갔고, 그때의 후유증으로 코뼈는 지금도 다소 휘었다.

일주일을 병실에 누워 있었고,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태웠었다.

힘을 길러서 똑같이 갚아줘야지 생각했고 한 번 더 상황에 맞닥뜨리면 벽돌이든 뭐든 손에 쥐어서 아작 내리라 다짐했었다.

내 인생이 끝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맞는 말 옳은 말 했다고 그렇게 몰매를 맞은 건 진짜 너무 억울했으니까.

그래야만 내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학교 폭력을 당하고 일주일이 지난 뒤 퇴원하고 학교로 갔을 때, 많은 친구들이 퇴원기념으로 선물을 건넸고, 선배들 또한 나를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복수심도 사그라졌고, 뒷골목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고, 적어도 내가 학교에 다닐 적에는 돈 뜯는 선배들을 찾기 힘들었다.

만약 선배들이 내게 용서를 빌지 않았으면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을 수도 있지.

학교 폭력은 당해본 놈만 안다.

평생 기억에 남고 오랜 시간 트라우마로 남는다.

밥을 먹다가도, 버스를 탈 때도, 강의를 들을 때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갑자기 온몸에 열이 오를 때도 있고, 폭력적인 영화를 볼 때는 숨이 가쁜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그때 선배들의 무차별적인 집단 폭행은 충격과 공포였으니까.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지금 내 모교 뒷골목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17년이면 강산이 두 번 변할 수도 있는 긴 시간이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모교는 어찌 변한 게 없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흙바닥이었으나 현재는 인조 잔디라는 것.

차를 몰고 학교 뒤편으로 향했다.

어느 학교나 있을 법한 일진들의 밀회 장소처럼 뒷골목은 예전보다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탓에 많은 주민들이 빠졌고 폐가들이 몇몇 보였다.

차를 주차하고 내린 뒤 내가 맞았던 장소로 향했다.

여전했다.

아스팔트 바닥이 갈라진 채 있었다.

17년이면 격세지감이라도 느낄 줄 알았더니 어째 불과 어제 일같이 생생하기만 했다.

학생들 몇몇이 구석에 모여 쭈그려 앉아 사탕을 물고 있었다.

"얘들아 하나만 묻자."

"아저씨는 누구세요?"

"너희들 선배."

"풉."

선배라는 말에 한 학생이 비웃었다.

"이 장소가 우리학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서 딱히 뭐라고 하고 싶은 맘은 없는데, 여기서 삥도 뜯나?"

"뭐래. 흐흐."

"묻잖아. 뜯냐고."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세요."

"형 화나게 하지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줘라."

"뜯어요. 왜요? 형도 좀 주시게요?"

한 학생의 용기 있는 말 덕에 학생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리와. 형이 만 원씩 줄게."

"진짜요?"

학생들은 무슨 호구를 만났다는 듯 내게 달려왔고,

"줄 서. 한 명씩."

"네!"

아이들은 그저 환한 미소로 내 앞에서 줄을 섰다.

"내가 너희들한테 만 원씩 돌리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할 건대. 답해줄 수 있겠냐?"

"그런데 아저씨 돈 있어요?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거 보니까 백수 같은데. 크크."

"형 돈 많아. 저기 주차된 차량 보이냐? 저거 1억 넘어."

"와."

학생들이 내 앞에서 차렷 자세로 줄을 섰고 나는 질문을 했다.

"학생들 돈을 왜 뜯어?"

"돈이 없으니까 뜯죠."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되죠. 그런데 저희 나름대로 생존 방식인거죠."

"..."

"만 원 주세요."

단적인 모습만 봐도 17년 전과 변한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싸대기를 수십 대 내려쳐 버리고 싶었으나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

휴우.

이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저히 나도 답을 모르겠다.

지갑을 닫고 그저 뒤돌아 걸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갑자기 쌍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너희들"

"...?"

"언젠가 또 보게 되면 그때 정말 후회할 거야. 알았냐?"

* * *

학교 대강당은 이미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학교폭력 회견답게 기자들도 몇몇 보였다. 서울에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교육감 선거철이라 그런지, 예비 후보들의 모습도 몇몇 보였다.

예상은 했다.

현재 서울시 교육감 선거 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이런 대형 떡밥을 물지 않을 수가 없지.

몇몇 학교 폭력 예방 기관들의 기관장들도 연이어 도착했다.

그리고 내 옆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짐승처럼 두리번거리고 있는 삼촌.

마치 먹이를 찾는 사자의 모습 같았다.

"그 씨벌놈들은 대체 어딨는거요?"

"아직..도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어제 설득 스킬을 발휘하여 이사장에게 가해자들을 무조건 소환하라고 다그치긴 했으나,

내가 불안한 것은 과연 가해자들이 제 발로 찾아오겠냐는 것이었다.

어느 미친놈이?

본인이 저지른 학폭을?

제 발로 숨었으면 숨었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개새끼들 눈에 띄면 다 죽여버릴라니까."

"..."

삼촌은 연신 욕을 해대고 있었다. 피해자 김해랑의 가족으로 참석 명분이 있었는데, 이제 현실적으로 얘기를 해줘야만 했다.

"안 올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은 법정도 아닌 곳에서 제 발로 출두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

"일단 오늘은 많은 기자 분들과 교육감 후보들, 기관장 분들 와계시니 그때 사건을 되짚어 보는 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17년이나 흘러버린 사건이라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나가 버린 탓에 가해자들을 법적 처벌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삼촌은 스스로 정의를 내려서 가해자들을 처벌하려 했다.

삼촌이 정의한 정의는 폭력으로 갚아주는 것이었다.

비록 삼촌의 계획은 차질이 생겨 아쉽겠지만 현재 내 계획은 아주 적절히 잘 이루어 지고 있었다.

학교장부터 시작해서 이사, 이사장, 위원장, 교육감 후보 등등의 인원들이 강단에 일렬로 쭉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많이 커진 게 썩 마음에 들었다.

"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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