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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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씨의 친구는 가난한 집에서 자립형 사립학교로 입학했다고 한다.

입학금이 한 해 700만 원 정도 했으나 굉장히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기 때문에 재단으로부터 전액 입학 장학금을 받았다.

"그 씹새끼들이 내 조카를 죽인 거라니까. 그 개새끼들이."

내게 한 방 얻어맞았던 삼촌은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가 공책 한 권을 들고 나오더니 내게 건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도식화된 인물들의 관계도가 보였다.

투박하다.

글씨체도 무슨 글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나름대로 정성은 느껴졌다.

때마침 아줌마가 작은 상에 소박한 술상을 차려 내놨다.

삼촌은 소주병을 따더니 한 잔 따라 마셨다.

"한 잔 받아요."

"죄송해요. 운전해야 돼서요."

그가 소주잔을 내려놓은 뒤 회상에 젖은 투로 말했다.

"제 조카가 공부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거든요. 남들 일반 고등학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장학금 전액 받고 자사고에 들어갔으니까요."

최일고의 입학 등록금은 800만 원 수준이었다. 경쟁률은 잘 모르겠으나 일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전부 모이는 학교라고 들은 바 있다.

"쉬운 일은 아니죠. 공부를 잘했나 봐요?"

"그럼요. 기대가 컸죠."

"..."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런 학교를 보내는 게 아닌데. 비싼 학교면 다 좋은 줄 알았지. 흐흐."

삼촌은 이내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생전 조카에 대한 칭찬을 연신 해댔다.

학급에서 부반장을 했고 교내 수학 경시 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마치 암기라도 한 듯이 끊임없이 술술 나왔다.

칭찬이 거의 막바지 다다를 때,

"이제 그만하자."

아줌마가 더 이상 듣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허나 삼촌은 들은 체 만 체 하는 둥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 그만 하라니까"

아줌마가 단호히 말하자 삼촌이 씩씩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일순간 냉랭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아줌마는 애써 웃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그래도 기억해주는 친구가 있다니까 고맙네요. 제 딸 다이어리에 매번 상담해주는 친구가 있었다고 했는데, 간혹 궁금했거든요."

"제 아내도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그때 상담을 잘 해줬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내 말을 들던 아줌마는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가 아내 분에게 잘 말씀드렸어요. 이제 지난 일이니 잊고 살자고. 지영씨도 이제 그때 일은 잊고 나아가야죠. 과거에 얽매이지 마시고."

"..."

"그래도 좋은 친구가 있었네요. 아마 하늘에서 웃고 있을 거예요."

말 한마디가 무겁고 슬픔이 묻어 있는 탓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입 닫고 있을 수밖에.

아줌마는 이내 아주 훈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결혼은 언제하세요?"

"...!"

"신혼부부 같은데 손가락에 결혼반지가 없어서요."

"식은 아직 안 잡혔습니다."

"선남선녀가 잘 만났네요. 인상도 다들 좋고 얼굴도 예쁘고 잘생겼고."

"감사합니다."

이내 아줌마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아줌마는 우리를 보며 딸에 대한 회상에 젖어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지영씨도, 나도, 그저 생각이 짧았던 걸까.

기억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아줌마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았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지영씨도 아줌마에게 생전 딸에 대해 전달하고자 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자리를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다.

마룻바닥의 엉덩이를 떼려는 찰나.

"왜 울고 그래. 짜증나게."

삼촌이 누나를 보며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울분에 나는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의 원망이 계속됐다.

"세상에 우리 같은 인간 한둘인 줄 알아? 원래 돈 없고 가난하면 이런 식으로 사는 거야."

"매번 돈! 돈!"

"어휴!"

삼촌은 이내 화가 나는 듯 부서져 널브러진 요강 조각을 발로 집어 찼다.

요강 조각이 담벼락을 부딪치고 더 산산조각이 났다.

완전히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 나는 지영씨의 손을 부여잡았다.

삼촌은 화를 식히지 못하고 우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뭐예요? 이런 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요? 17년이나 지난 일이에요. 겨우 가슴속에 묻고 살았는데, 왜 다시 끄집어내서 지랄이냐고."

"..."

"본인들 속 좀 편하자고 우리 마음 뒤집어 놔도 된다는 거죠. 예?"

"그런 건 아닙니다."

"하여튼 이기적인 새끼들이라니까. 비인간적이고 나쁜 새끼들. 퉤 씨발."

하아.

삼촌이란 인간은 매번 욕을 했다.

물론 나에게는 백번 욕해도 상관없는데, 지영씨에게 욕을 하는 건 참지 못하겠다.

"제가 질문해도 될까요?"

"..."

"돈 없고 가난해서 그저 당하고만 있다고 했잖아요. 만약에 돈이나 힘이 있었으면요?"

"..."

"당신들이 가해자들에게 바라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뭐..?"

삼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만 한 가득 써댔고, 아줌마는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내 감정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솔직히 제삼자인 나로서는 분노도 일지 않았고, 그들의 감정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도 없엇고, 아픔과 절망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질까요."

아줌마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잖아요. 삼촌분 말마따나 힘과 권력이 있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죠."

"아뇨."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래전 일이고 그들이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사는지 이제 관심도 없고 의미도 없어요."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했으나 삼촌은 누나의 말을 막아서며 말했다.

"다 조져버려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당신, 말 한번 잘했다. 나한테 돈이 있었으면 씨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인생 조져버리지. 그러니까 누나도 평생 이러고 사는 거야."

"그래서 뭘 얻을 수 있는데?"

누나가 동생을 보며 말했다. 뭘 얻을 수 있냐는 질문에 동생은 속 시원하게 대답했다.

"복수하는 거지. 아주 원 없이 패버리는 거고."

"그래? 그래서 달라 질게 뭔데?"

"뭐?"

"달라질게 있어?"

"..."

"다시 돌아 오냐고! 다시 만날 수 있냐고!"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침묵.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그저 짙은 고요함이 집안에 냉기를 더했다.

삼촌은 뒤돌아서서 담장 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물었다.

나는 훌쩍이는 아줌마에게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제야 내 시선에는 생전 딸이 신었던 신발과 이름표도 떼지 않은 교복, 가방 등이 보였다.

어떤 위로의 말이든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었으나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나게 해드릴게요.’ 라고 해주고 싶었다.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 내뱉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한 줄 안다.

그런데 내가 당장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새 삶을 살자, 이제 떠난 사람이다, 아줌마도 살아야죠, 이런 말 따위도 무의미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무슨 말로 표현하랴.

그래서 정말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줌마에게 다가가 손을 꼭 붙잡아 줬다.

"다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그럼 기억나게 해드릴게요.

"다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아줌마의 감정을 살폈다. 순간적으로 일그러진 표정은 단순히 분노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아마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라 그녀의 표정이 복잡하기만 했다.

아줌마는 살짝 떨리는 두 손으로 겨우 마룻바닥을 짚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를 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들 가세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몸이 굳어버렸다.

삼촌으로 보이는 사람도 그저 등을 돌려 담배를 물고 있었다.

내가 먼저 몸을 일으켜 지영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나가 계세요."

지영씨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홀로 집을 나섰고, 나는 천천히 삼촌에게 다가갔다.

삼촌은 이맛살을 구기며 나를 바라봤다.

위아래로 내 모습을 훑던 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수로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거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말이.."

"참나.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이라 이걸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네."

".."

"허허."

삼촌은 갑자기 웃어댔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더니 내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피죠?"

"네."

-후우.

"저희 누나도 이제 저러고 방에 들어가면 한 며칠을 밖에 안 나와 버리는데. 하아."

"..."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해서 사람 또 골치 아프게 만들어요. 참."

"죄송합니다."

"죄송한 것은 없고요. 그래도 살면서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보니까. 내가 신기해서 그래요."

"..."

"신경 쓰지 마세요. 누나는 어차피 내가 잘 보살펴 드릴 테니까. 그런 말 했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어요."

"알겠습니다."

"히히. 그런데 저도 그런 상상을 안 해본 게 아니니까요. 만약 실제로 살아 돌아온다면 제 정신이 미쳐버릴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래요?"

"..."

"그런데 세상 섭리란 게 있잖아요. 막말로 우리가 죽었다 살아나는 게임 세상도 아니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는 해드릴 테니까."

"조카 교복에 달린 명찰을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

* * *

집으로 향하는 길, 지영씨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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