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씨가 단호히 말한 뒤 가방을 들고 한 주택의 파란 대문 앞에 섰다.
저곳이 지영씨가 가고자 했던 집인 것 같았다.
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고,
60대로 보이는 한 아줌마가 지영씨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지영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그때의 사건을 얘기하는 것 같았고, 아줌마는 지영씨를 안으로 들였다.
휴.
맘 같으면 나도 안으로 들어가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지영씨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려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인근에 폐가가 조금 보인 탓에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 코를 찔렀다.
-삐리리리
오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최일 재단에 대해 파보라고 했건만 벌써 성과가 있는 걸까.
"어이 오과장."
-대표님, 최일 재단 관련해서 너튜브에 영상이 있더라고요. 대표님이 한번 보셨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깨톡으로 링크 남겨드릴게요.
"콜. 그리고 다른 건?"
-최일재단 이사 명단 보니까 성씨가 다 비슷비슷합니다.
"가족이라는 얘기네?"
-더 파보진 않았는데, 친인척들을 이사들로 세워둔 것 같기도 하고요. 확실한 건 아닙니다.
"음..오케이. 자금 출자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어렵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 수고."
-그런데 대표님.
"엉?"
-대표님 말씀처럼 확실히 문제 있는 학교인 것 같습니다. 17년 전 사건은 현재 기사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현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
-제가 휴먼매니저 입사한 이후 첫 프로젝트인 만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 수고"
오과장이 보낸 영상을 확인했다.
2년 전 현장 르포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이야기였고, 학교 이사장의 갑질과 횡포에 대해서 다뤘다.
하긴 17년 전 학교폭력이 발생했던 학교였고 그걸 묵인하고 사건을 덮은 곳인데 현재라고 다를 게 없겠지.
내용을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학교 선생들을 머슴마냥 갖은 잡일을 시켜대고,
여교사에게는 교직 생활 중 임신 금지라는 특별 조항까지 만들어 육아휴직을 금지하다시피 했고,
얼마나 지랄맞은 학교면 평교사보다 기간제 교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게다가 이사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사 왕따를 주도하는 아주 쌩 양아치 이사장.
사학비리나 배임 및 횡령은 간혹 발생하곤 했지만, 이 정도 수준의 일이 불과 2년 전에 발생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영상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현장 르포 프로그램의 피디가 브리핑했다.
그런데 굉장히 익숙한 여성의 얼굴.
명석이 와이프 애라씨?
현장 르포 방송을 담당했던 애라씨 맞지?
애라씨가 왜 거기서 나와?
다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1987년도 초대 이사장 최일씨가 전 재산을 환원해서 만든 사학 재단이에요. 시작은 정말 좋은 뜻으로 했겠죠.
최일재단의 사학비리 현장 르포를 담당했던 애라씨에게 곧바로 전화했다.
직접 부딪히고 조사하고 파헤치며 촬영했기 때문에 역시 아직도 많은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니까 꽤 심각한 수준이던데요. 그거 연출 아니고 실화 맞죠?"
이사장의 갑질과 횡포에 대해 말했다. 영상 속의 장면이 연출이었으면 하는 바람일 정도로 꽤 충격적인 부분이 많았다.
-완전 미친놈이라니까요. 완전히 자기들 세상이에요. 설립자 최일씨 죽은 뒤로 첫째 아들 최영훈이가 이사장 자리에 올라섰는데요. 거기 학교장이 최영훈이 아들이고 이사가 딸이에요.
"가족 재단이네요."
-그렇죠. 학교가 아니라 회사죠. 그런데 거기는 갑자기 왜요?
"재단 한번 먹어보려고요."
-흡수요? 도일씨가 가진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기업 하나 먹는다는 생각으로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알기론 최일 재단이 임대 수입도 상당하거든요.
애라씨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바,
강남의 빌딩 한 채를 재단법인으로 소유하고 있었고, 학교용지, 땅이 있었다.
대부분 부동산 임대사업으로 그 수익을 내고 있었으며, 재단을 지원하는 기업도 몇몇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재단을 장학하고 있는 학교.
흐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애라씨의 말을 듣고 도전 의식이 더 뚜렷해지고야 말았다.
"혹시 거기 이사장은 따로 처벌받은 게 있나요? 영상 보니까 선생들한테 갑질이 심하던데."
-재단 자체에서 징계를 내린 거로 아는데, 재단 이사자리에 있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징계를 내리는 거 자체가 말장난이죠.
"그러면 이사회 징계 수준으로 일은 마무리된 거네요."
-그렇죠?
"혹시 그때 방송할 때 조사했던 자료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찾아봐야 돼요. 있으면 명석씨 통해서 넘겨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제가 일이 좀 바빠서요.
"제가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고마워요 애라씨!"
애라씨의 도움으로 최일재단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알게 됐다.
일단 휴먼매니저 사원들이 더 깊게 파고들고 있긴 하지만 지금 당장 도움 될 만한 부분은 역시 가족이 장악하고 있는 재단이라는 것.
재단이 가족을 장악해서 생기는 부작용들이 너무 매우 흔한 경우라 사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깨톡.
때마침 휴먼매니저 깨톡방에는 최일재단의 등기 현황이 확인됐다.
이사장 최영훈으로 시작해서 총 5명의 이사가 있었고, 1명의 감사가 있었다.
이사장 최영훈이의 나이는 현재 72살, 17년 전 학교 교사로 있었고, 이후 교감, 교장을 이어서 아버지가 죽고 그 후광으로 이사장자리까지 올라섰다.
이사는 뭐 당연히 그의 자녀들과 친인척들이 주름잡고 있었는데, 직업들이 다들 빵빵했다.
변호사도 있었고, 무슨 협회장은 기본씩 다들 달고 있는 수준.
그런데 실제로 가장 중요한 건 최일 재단을 설립한 최일의 이력이다.
이건 차후 더 구체적으로 파볼 생각이었다.
스마트폰을 켜서 시계를 봤다.
지영씨가 들어간 지 20분이 넘게 흘렀음에도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집이라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걸어 올라오기도 벅찬 집이다.
과거 이런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름에 얼마나 버티기 힘든지 잘 알지.
그때
멀리서 중년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언덕 위를 올라오는 게 보였다.
투박한 걸음과 넓적한 어깨.
그가 나를 인상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개의치 않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가 한 마디를 날렸다.
"꽁초 버리면 안 돼요."
"네."
꽤 저돌적인 말투로 내게 한 마디 툭 던지더니 그가 내 앞을 지나쳤다.
인상 가득한 얼굴을 했고 거무튀튀한 피부색에 우락부락한 덩치,
나이는 좀 들어 보이긴 했으나 살짝 기가 죽긴 했다.
그런데
덩치 있는 사내는 지영씨가 들어간 집 초인종을 눌렀다.
이내 자동으로 문이 개폐되자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그때부터
지영씨를 홀로 집안으로 들여보낸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집 담장 너머를 보기 위해 애썼으나, 담장은 너무 높았다.
점프해서 겨우 보인 건 집 마당에 놓인 운동기구였고,
또 다시 점프했더니 지영씨가 마루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힘차게 점프를 했더니,
남자가 요강을 들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있었다.
-쨍그랑!
그리고 들리는 그 남자의 고함질.
"야이 쌍년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와! 네년이 그러고도 인간이야?"
그 남자가 지영씨를 보며 쌍욕을 해대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갑자기 발휘된 초인적인 힘으로 담장을 짚고 넘어갔다.
-털썩.
일순간 등장한 내 모습을 덩치는 상기된 눈으로 바라봤다.
개의치 않았다.
내 시선은 오롯이 마룻바닥에 앉아 있는 지영씨의 모습으로 향했다.
그녀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당신 뭐야?"
"남편인데요. 걱정돼서 넘어왔어요."
"주거침입이야 새끼야."
"알아요. 지영씨 괜찮아요?"
"네."
그 남자를 무시한 뒤 지영씨에게 다가갔고,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할 얘기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죠."
그녀의 손을 이끌고 집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덩치가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비켜요."
"하. 집안을 초상집 만들어 놓고 이대로 가시려고? 왜 갑자기 들이 닥쳐서 옛날 얘기를 꺼내고 지랄이냐고. 어?"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는데 욕하지 마시죠."
"뭐?"
"제 아내한테 욕한 거 사과하시죠."
"이 개새끼가!"
비록 건장한 체구이긴 하지만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다.
지영씨를 내 등 뒤에 세웠고, 때 마침 그가 내게 달려들었고,
잽싸게 피해
-퍼억.
턱을 가격하자 그가 한방에 쓰러져 버렸다.
-털썩
남자가 고목나무 쓰러지듯 의식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남자는 우리를 대단히 오해하는 것 같았다.
지영씨의 손을 붙잡고 다시 그 집을 나가려는 찰나, 넋을 잃고 마루에 앉아 있는 60대 아줌마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지영씨의 몸도 얼어버린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내 시선은 다시 쓰러진 남자에게 눈이 향했고,
결국 아줌마와 지영씨가 힘을 보태준 덕에 겨우 덩치 사내를 바닥에 질질 끌고 집 마룻바닥에 눕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쓰러진 덩치의 눈이 번쩍 떠졌고, 나를 바라보며 기겁하자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예?"
"세게 치려는 마음 없었어요."
"..."
그리고 순한 양이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