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씨가 의아하며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건 지영씨가 어제 친구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지영씨가 살면서 처음으로 상담했던 친구가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했고,
그 친구는 심각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결국 결말은 학교를 자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뭐하고 살아요?"
나는 가해자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인별그램 들어가 보니까 그때 그 친구를 따돌렸던 친구들은 전부 잘살고 있더라고요. 애도 낫고, 남편도 잘 만난 것 같고."
"나쁜 년들이네요."
"놈도 있는데요?"
"흐흠. 그렇게 살면 안 되죠. 남의 가정을 그렇게 짓밟아 놓고 본인은 떵떵거리면서 살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왜 학교에서는 아무 처벌이 없었어요?"
"친구가 자퇴를 했으니까요."
"네?"
"학교에서 선 긋더라고요. 자퇴한 학생을 왜 우리 학교가 책임 지냐고."
"지영씨는 뭐 했어요?"
"네?"
"지영씨는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아뇨. 저도 할 만큼 했죠. 저희 부모님에게 말씀드리고, 선생님에게도 말씀드렸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어요."
"..."
"제가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네요. 도일씨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요."
"태생이 이런걸요. 제 속이 답답하면 어떻게든 풀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묵인했던 거고, 친구 부모님은요?"
지영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학교에 한번 찾아 온 건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지영씨가 하고 싶은 게 뭐예요?"
"네?"
"부모님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싶다면서요. 대체 무슨 용서요."
"..."
"지영씨가 그때 상담을 좀 더 못 해줘서 그랬다고 하려고요? 아니면 지영씨가 친구를 지켜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요?"
"그게 아니라."
"당사자를 끌고 가야지 왜 지영씨가 가서 용서를 빌어요?"
"..."
"저라면 그럴 것 같아요. 저도 살면서 한번쯤 다잡고 싶은 일 왜 없겠어요. 그런데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후회 남지 않게. 속 시원하게."
슬쩍 지영씨를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앉고 있었고, 나는 지영씨의 손을 잡았다.
"해서 후회할 일은 안 하는 게 맞고, 안 해서 평생 후회할 일은 당장 해야죠."
"네."
"그리고 이건 어떻게 하실래요?"
지영씨에게 로또 2등 당첨 용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지영씨가 선택해줬으면 좋겠어요. 저야 욕심 없으니까."
"생각이 있어요."
"받아요. 지영씨한테 맡길게요."
지영씨가 로또 용지를 받았고, 나는 졸음 쉼터를 빠져나와 다시 고속도로를 달렸다.
지영씨는 아무 말 없이 로또용지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고, 나도 그때 뒷길에서 선배에게 맞았던 기억을 다시 되살렸다.
선배에게 침을 퉤 뱉고 한 방을 맞은 뒤로 쓰러졌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병원도 아니었고, 집도 아니었다.
내가 쓰러진 곳 그 자리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늦은 밤 홀로 집으로 향했다.
내 몰골을 살핀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게 달걀 하나를 꺼내 멍든 곳을 마사지 해줬다.
꽤 침착했던 엄마는 내게 이유를 물었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억울했던 전후 사정을 모두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학교로 향했었다.
잔뜩 성난 얼굴로 거침없이 나를 이끌었고, 교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선생들의 표정과 차가운 공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교장을 필두로 교장실로 들어간 엄마는 한참 뒤에나 그곳을 나왔고,
엄마는 나를 보며 딱 한 마디 했었다.
"잘했다."
그때 이후로 삥 뜯는 선배들이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엄마의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 * *
[로또 이월 독식! 총당첨금 1,641억 원의 주인공은?]
[역사상 유례없는 당첨금액, 주인공은?]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전의 주인공은?]
[로또 당첨 인원 단 1명! 로또의 새로운 역사]
이번 이월된 당첨금액은 유명 신문사들의 일면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땅덩어리 좁은 대한민국에서 단 한 번 만에 천억 이상을 거머쥔 사람이 누군지 그 관심이 집중됐다.
1,641억 원.
여기서 세금을 제하면 1,100억 원 정도 됐다.
대기업까진 힘들더라도 웬만한 중견기업을 한 번에 먹어버릴 수 있는 금액.
강남의 금싸라기 땅들에 세워진 빌딩들도 언제든 독식해 버릴 수 있다.
이제 로또 스킬은 의미가 없는 수준으로 도달했다.
내 인생은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거침없이 달릴 수가 있었다.
게다가 돈이 부족해지면 언제든지 독식을 하면 그만이다.
그간 내가 고생했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학창 시절부터 워킹휴먼, 그리고 현재까지.
단순히 퀘스트를 위해 로또를 위해 달려왔던 지난 날 들.
이제 한걸음에 달려가서 돈을 받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은행 본점 앞에 도달했을 때 이미 기자들과 너튜버들로 미어터져 있었다.
젠장.
기자들은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은행 본점 앞을 농성하듯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떤 새끼인지 이번에 꼭 밝혀내서 인터뷰 따야 돼"
-혹시 저 사람 아닌가요?
-누구?
-저기 호주머니에 손꼽고 어슬렁거리는 게 딱 저 사람 같은데?
신상을 파헤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로또 역사상 유례없는 말도 안 되는 당첨금의 주인공이 궁금하겠지.
이제 이 많은 사람을 헤치고 1등 당첨금을 가져와야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분명 기자들은 은행 측과 청탁이 있을 것 같았다.
1등 주인공이 누군지 은행 측에서 손짓으로 지목해주던 암시라도 해서 밝혀낼 게 뻔했다.
아마 내가 당첨금을 받고 은행을 나오자마자 기자들이 물밑들이 달려들겠지..
그런데 내 신분이 밝혀지는 건 싫었다.
머리를 써야 할까
스킬을 써야 할까.
모르겠다.
그냥 직진이다.
나는 은행 앞에 밀집해 있는 기자들을 뚫고 입구로 들어갔다.
은행원에게 1등 당첨자라고 얘기한 뒤 안내를 받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마주하는 지점장과 차 한 잔을 두고 마주했다.
이제는 익숙한 당첨금 받는 과정.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투자 상품과 예금에 가입하고 싶어요."
"...!"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어차피 은행에서 개인정보 유출하는 건 안 되는 거 알고 있지만, 지금 밖에 기자들이 좀 많아요?"
"그렇죠."
"제 신분이 밝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알려지게 되면 제가 현재 은행에 담고 있는 모든 예금은 해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뒷문 있죠?"
"네?"
지점장과 담판을 짓고 은행 본점의 뒷문으로 향해 빠져나갔다.
너무 쉬워서 스킬은 따로 쓰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은행 계좌를 살폈다.
정확히 1,095억 원이 입금됐다.
택시를 타고 강남의 빌딩 숲을 지나쳤다.
100억이 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고층 빌딩들이 서서히 내 시선으로 들어왔다.
언젠가 내가 찜해 놓은 800억짜리 건물, 강남역 최고 좋은 자리에 위치해서 저 건물만 사놓는다면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매일 골프만 치며 홀인원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때 택시 기사가 말문을 열었다.
"출근하시나 봐요?"
"네."
"이번에 소식 들으셨죠? 로또 1등 당첨자 한 명 나온 거요."
"그럼요."
"캬. 그런 기사 보면 진짜 일하기 싫어지지 않아요?"
"..."
"제가 그거 당첨 해보겠다고 로또에 매일 10만 원씩 태웠거든요."
"아.. 그래서 당첨되셨나요?"
"5등 하나 나왔어요. 5등."
"아이고."
"어휴. 그래도 이월된 금액 한번 먹어보겠다고 매일 희망 회로 돌리면서 살았는데, 이제 끝나니까 좀 아쉽더라고요. 허허."
"저도 그래요."
"참 누가 됐든 제가 투자한 돈으로 평생 놀고먹고 살겠네요. 흐흐."
"..."
"어차피 로또가 남의 돈 먹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남의 돈 먹는 게 참 쉬운 일 아녜요. 자, 이제 도착했습니다."
"네."
"만 사천 원 나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만 사천 원을 건네려다가, 그냥 십만 원 던져주고 나왔다.
"팁이요."
"...!"
.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 또한 사람들의 희망을 갈취하고 있다.
남들 일주일간 희망 회로를 돌리며 로또를 샀고,
그 희망을 갈취한 합계 약 1,250억을 허투루 쓸 수 없는 노릇이다.
휴먼매니저 회사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우며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어 도일아.
"예전에 내가 학교에서 몰매 맞고 왔을 때 엄마가 학교에 쫓아갔었던 거 기억나?"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 엄마가 교장실에 나와서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잘했다고 했지.
"왜?"
-잘한 일이니까 잘했다고 했지.
"됐다.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로 들어갔다.
월요일 오전 11시.
사원들은 업무에 열중이었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대표님 GN아파트에서 지금 다시 갑질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대표님 강일대학교에 입찰을 넣었는데 가능성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님 일성은행에서 경비 교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잠깐만."
휴먼매니저가 내 인생에 끼어든 건 아마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본다.
"...?"
"정주임, 우리 회사가 재단 법인 운영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재단 법인은 제가 알기론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에 인수 자체가 불가능한 거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운영권을 가지려면..거액의 출자를 통하는 게 빠를 수도 있죠."
"음.."
"그런데 그것도 이사회에서 정관을 통해 정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아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예요. 저희가 이름 있는 대기업이라면 가능하겠지만..저희 회사로는.."
"오케이."
"...?"
"GN아파트 갑질 구체적으로 조사해서 알아오고, 강일대학교는 입질 오면 바로 계약해, 일성은행 경비는 무슨 이유로 교체를 요구하는지 한번 알아보고."
"넵."
"그런데 친구들아."
-퍽
나는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고, 사원들이 뒤돌아 나를 쳐다봤다.
"우리 이번에 학교 한번 먹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