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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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득 지영씨가 내게 질문했던 답이 떠올랐다.

"지영씨."

"네?"

"저도 미루어뒀던 있던 일이 생각났어요."

"...?"

지영씨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로또 확인하는 거요."

* * *

이제 814만분의 1이라는 확률을 뚫고 두 번 씩 이월된 로또를 독식해야 했다.

그 날이 오늘이었다.

지영씨와 술자리를 끝낸 뒤 리조트로 돌아와 로또 방송을 켰다.

갑작스러운 로또 타령에 지영씨의 얼굴에도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로또 해본 적 있어요?"

"아뇨. 한 번도 안 해봤어요."

"한번도요?"

"네."

"와. 신기하네. 처음 봐요."

"그럴 수도 있죠! 왜요."

"이번에 1등 당첨금액이 1,641억이래요."

"그렇게나 많이요?"

"당첨자가 계속 안 나와서 이월 됐거든요."

"대박."

"그래서 샀습니다. 로또."

나는 지영씨에게 로또 한 장을 내밀었고, 지영씨가 로또 용지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처음 만져요."

"1번부터 45번까지 순서 상관없이 여섯 번호가 맞으면 1등이에요. 만약 다섯 개 번호가 맞고, 보너스 번호가 맞으면 2등이고요."

물론 1등 독식 번호는 아니었다.

1등 독식 로또 용지는 현재 내 방 옷장의 하부장에 얌전히 잠들어있다. 물론 조만간 세상 밖으로 나와야겠지만.

이제 곧 로또 번호 당첨 방송이 시작될 참이었다.

"1등은 안될 거예요. 확률이 워낙 희박해서."

"2등은 얼마예요?"

"이번에 로또 판매율이 워낙 높아서 2등도 팔천만원 정도 하지 않을까요?"

"아.."

"2등 되면 뭐하실 거예요?"

"이게 제 것도 아닌데요."

지영씨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GN아파트 근방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2등 로또를 샀었다.

1등은 내가 독식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건 내가 먹고 2등 정도는 선물해주고 싶었다.

2등 당첨금은 은행 본점이 아닌 어느 지점에서든 교환이 가능했다.

때마침 로또 진행 MC가 TV에서 진행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첫째 자리수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행운의 숫자! 11번!]

첫 번째 숫자는 11번이었다.

지영씨가 로또 용지를 확인하며 11번이 있다며 소리쳤다.

뒤이어 두 번째 숫자를 확인하기 위한 진행멘트가 나왔다.

[자 두 번째 행운의 숫자를 확인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숫자일까요! 자 8번이 나왔습니다!]

8번이다.

지영씨가 팔짝 뛰었다.

벌써 두 개나 맞았다며 아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뒤이어 세 번째 숫자.

[자 세 번째 번호는 몇 번일까요!? 7번! 입니다!]

크크.

여태 까지 세 개의 번호가 맞았다.

일단 5등 확정이라며 지영씨에게 말했다. 지영씨는 이제 세 개만 더 맞으면 1등이라며 흥분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소파에 붙은 엉덩이를 들썩 거렸다.

그리고 네 번째 숫자.

[11번 8번 7번에 이어서 네 번째 숫자 확인해보겠습니다 22번! 22번입니다!]

"와!"

지영씨가 탄성을 내지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에 땀이 조금씩 맺히고 있었다.

조명 빛에 반사 된 탓인지 그녀의 눈빛도 반짝반짝 거렸다.

[자 이제! 두 숫자만 추첨하면 됩니다! 30번입니다! 30번!]

다섯 개가 맞았다.

이제 지영씨는 더 이상 보질 못하겠는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뒤이어 진행MC가 마지막 여섯 번째 행운의 번호를 추첨했다.

[자! 여섯 번째 행운의 번호! 과연 뭐가 나올까요? 자 축하드립니다! 4번입니다!]

[2등 행운의 번호 과연! 자 축하드립니다! 44번입니다!]

됐다.

당첨번호는,

「04」「07」「08」「11」「22」「30」, 보너스 번호 「44」.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지영씨의 손을 천천히 떼어줬다.

지영씨가 토끼 눈을 뜨며 나를 바라봤고, 결과에 대해 말해주기 전에 조건이 있었다.

"지영씨."

"어떻게 됐어요?"

"저랑 약속 하나만 해줘요."

"네."

"지영씨는 정말 좋은 상담사예요. 그러니까 더 미루지 말고 이 돈으로 상담센터 차리는 게 어떨까요?"

"..."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잘한 일이겠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너무 많이 봐왔다. 그 시작은 어릴 적 사채로 허덕였던 내 유년기였지만,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됐을 때도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물류센터, 아파트 경비, 대학교, 은행을 거치면서 그런 인간 군상들을 너무 많이 마주했기 때문에 사회를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퇴실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조수석에 앉은 지영씨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운전대만 붙잡으며 그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학창 시절 때의 기록이 떠올랐다.

-퍼억.

-퍼억

나는 약한 친구들이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삥 뜯긴 금액을 돌려주며 수수료를 받았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거의 받지는 않았다.

사실 많이 받을 수도 없었고.

당시 고등학교 동창들은 나를 그저 돈독 오른 미친놈과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불분명한 경계선으로 나를 바라 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돈과 정의도 아니었고,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일진들을 보며 분노가 치밀은 탓이었다.

내가 지금 휴먼매니저 회사를 운영하는 일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게 아니듯이.

-퍼억

-퍼억

물론 내가 싸움을 잘하거나 복싱이나 운동을 배운 건 아니었지만, 악다구니 하나만큼은 남들보다 특별했다.

-퍼억

-퍼억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한 선배에게 처맞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정말 사소한 사건 하나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마다 신입생들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듯이,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걸 뒷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신입생이 뭘 아나.

학교의 뒷길은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자주 그 길을 이용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뒷길에서 통행료를 받는 일진 선배들을 만났고, 내가 그때 처 맞은 건 통행료를 내지 못하겠다고 선배들에게 대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분위기와 냄새, 선배들의 표정과 그 고통이 뚜렷이 기억나는 건,

정말 먼지 나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퍼억.

선배가 내 명치를 가격하자 나는 복부를 부여잡으며 쓰러졌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란 말이 있잖아? 지름길로 가려면 통행료는 내야지."

"이 길이 선배님 길이 아니잖습니까."

"이 새끼가."

-퍼억.

발길질이 계속 이어졌고 나는 그저 흙바닥을 뒹굴며 처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발 지름길로 가는 게 죄야?

주위 시선들이 느껴졌었다.

분명히 친구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고,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 그저 눈뜨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마 나를 패고 있던 선배들도 선후배 기강을 잡기 위해 더 지랄 맞게 때렸는지도 모른다.

몰매를 맞을 때는 정말 정신이 없다. 허리를 일으키려 해도 세차게 들어오는 발길질에 푹 땅바닥에 처박히고, 머리, 발, 어깨, 엉덩이, 달려들지 않는 곳이 없다.

그저 축 늘어진 상태로 바닥에 엎드려 신음을 내뱉고 있으니 선배들도 그만 몰매를 멈추었다.

그런데

내 성질에 언제까지 맞기만 하겠나.

"야이 개새끼들아."

겨우 몸을 일으켜 떠나는 선배들을 보며 내가 소리쳤었다.

왜 그런 객기를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의 분노를 짐작하자면, 내가 맞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한 선배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또 처맞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욕을 내뱉는 애 새끼를 보니 본인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었다.

"씨발 새꺄.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이거 완전 똘아이네."

여기서 끝내면 될 일, 그런데 나는 그 선배에게 마지막 저항이랍시고,

-퉤

침을 뱉었었다.

그리고 그 선배의 마지막 한방에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털썩

"도일씨."

조수석에 앉은 지영씨가 내 회상을 깨뜨렸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옛날 일이 생각나서요."

"아.."

나는 고속도로 졸음 쉼터에 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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