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열정적으로 하는 건 좋은데 내가 커버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자고.”
“...”
“아직 최부장님 계시잖아. 거기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괜히 우리가 나서지 말자고.”
“네.”
“굿타임즈 같은 양아치 회사가 맺은 계약을 뺏어온다면 내가 언제든 환영이고.”
“굿타임즈.. 흐흐. 거기는 양아치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오과장 입에서 나온 워킹휴먼의 실태를 들었을 때 조금 충격이었다.
황부정이 야금야금 빼먹었던 현장 사원들의 간접 노무비를, 천사장이 주도해서 하고 있다는 건 아마 회사가 파산 직전까지 갔다는 뜻이겠지.
최부장은 그걸 눈 뜨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하여튼 최부장님은 내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마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겠지.
회식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1차로 양곱창집에서 먹고, 2차는 기름진 배를 달래기 위해 인근 호프집으로 향했다.
간단히 마른안주와 생맥주를 시켰고 오과장이 사원들을 보며 말했다.
“이제 풀거 풀자.”
오과장이 말을 꺼내자, 성희와 현준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과거 워킹휴먼에서 근무했을 당시 정주임과 티격태격했던 부분을 얘기한 것 같았다.
성희에게 얘기 듣기론 오과장이 성희를 현장으로 끌고 가서 일을 시켰다고 들었다.
사무직도 현장 일을 알아야 한다면서..
내가 퇴사를 하고 열정으로 똘똘 뭉친 오과장이 성희와 현준이를 휘어잡고 싶었겠지.
그런데 그 방식이 완전히 잘못된 거고.
“오과장님이랑 딱히 감정 쌓인 건 없어요. 그때 얘기를 굳이 꺼내서 술자리까지 가져올 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성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앞으로도 부딪칠 거 뻔해서 미리 내가 얘기를 꺼내는 거야. 내가 예전에 너희들한테 무리하게 일 시킨 건 미안해. 사과할게.”
“...”
“괜찮아요.”
성희는 아무 말이 없었고, 현준이가 대신 대답해줬다.
“성희야 아직도 삐졌냐?”
“사실 오과장님 사과받는 것보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얘기하는 게 저는 마음에 더 와닿을 것 같은데요. 제가 굳이 물류현장에 가서 상차를 할 필요는 없었다고 보거든요. 워킹휴먼 다녔던 대표님도 저한테 그런 거 시킨 적도 없었고.”
“미안해. 진짜.”
“제가 솔직히 대표님한테 다 얘기해서 오과장님 오신다고 했을 때 제가 관두고 싶었어요. 또 예전처럼 군기 잡겠다고 그럴 게 뻔해 보였으니까.”
“안 그럴게.”
“아뇨. 사실 오과장님의 사내에서 일하는 업무 방식을 제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여기서 오과장님하고 현준이보다 가장 먼저 이 회사에 입사한 선배라고요.”
“선배?”
“선배 대접을 받겠다는 건 아니지만 저한테 지시할 권한은 없단 거죠. 안 그래요 대표님?”
“음.”
역시 올게 왔다.
여기서 조금 고민이 됐다.
회사 사내 조직처럼 직급을 정해서 위계질서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봤지만, 체계는 잡혀야지.
내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뒤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너희들이 담당하는 일이 서로 다르잖아?”
“그렇죠.”
“성희는 휴먼매니저 현장 직원들의 복지하고 급여, 용역 대금 관리, 경리 업무를 보고 있고.”
“네 맞아요.”
“현준이는 현장 근로자들 근태와 현장을 담당하고 있고.”
“넵!”
“그러면 오과장. 너 영업해라.”
“...!”
“아까 네가 영업해 보고 싶다고 했잖아.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네 나름의 영업 방식이 있어서 그런 거 아녔어?”
“맞습니다.”
“한번 해봐. 다만 워킹휴먼은 아직 건드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러면 이제 정해졌네. 정주임은 회계, 현준이는 현장, 오과장은 영업, 서로 부딪치는 업무가 많이 없으니까, 서로 협조하는 관계라고 생각하자고. 막내도 없고 상사도 없고. 너희들 생각은 어때?”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나중에 회사가 더 커지면 너희들이 각 팀에서 최고 상사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회사 사이즈를 최대한 키우자고.”
“넵!”
“이 정도면 나름대로 구색은 갖춰 진거 같은데?”
정해진 방향은 없다.
저번 주는 참 많이 일이 있었다.
일성 은행의 지점장과 담판을 짓고 은행 경비 계약을 따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굿타임즈 대표와 설전이 몇 번 오갔으나 최부장의 방어막으로 별 탈 없이 흘러갈 수 있었다.
경술대학교 학생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청소부 휴게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소정의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명석이를 만나서 동창회 계획을 구체화한 뒤 계획을 짜기도 했고, 한 주의 마지막 날 오과장이 회사에 입사하여 휴먼매니저의 동료가 됐다.
회사가 비약적으로 커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성과라도 몇 개 있으니 꽤 만족할 수 있는 한 주였다.
그래서 길었던 평일에 비로소 찾아온 주말이 더 기대되는 걸까.
오늘은 지영씨와 약속했던 골프 여행리조트를 가는 날이었다.
내가 언제 여행을 갔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면 이미 10년도 더 된 일이겠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생활 반경은 집과 회사를 거의 벗어나질 않았다.
여행은 사치라고 생각을 했었다.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여행을 다닐 여유는 없었다.
과거 격언 중에 바보는 방황하고 현자는 여행한다고 했는데, 나는 바보 멍청이였나 보다.
여행보다 집에서 푹 쉬는 게 더 좋았고, 시간이 남으면 부업을 뛰는 게 더 생산적이었으니까.
게다가 현재 생활에 많은 여유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여행에 대한 욕구가 따로 생기지는 않았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 먹고 싶었던 것, 그런 욕구들을 이미 어릴 적 생존 본능으로 참아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아집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매번 너튜브를 통해 봤던 국내와 해외 여행지를 대리 만족하며 감상하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고,
대학로를 벗어나지 않는 지영씨와의 데이트도 이제 변화가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다.
여행이라 함은 배낭을 들고 떠나거나, 패키지를 이용하거나, 해외, 국내로 나눌 수가 있었는데 이번 여행은 언젠가 내가 한번 해보고 싶었던 골프 여행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골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거 산재병원에서 생활할 때 내가 자주 챙겨보던 스포츠 채널이었다.
차분하지만
움직임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목적지는 같지만 방향은 다르다는 것.
미래도 없고 암울했던 시기라 이런 골프의 매력에 빠졌었다.
그때는 몰랐지.
내가 골프를 하게 될 줄은.
이번 여행 일정은 1박 2일이었다. 국내 골프 리조트 중에서 그나마 비싸고 좋은 곳으로 예약했었다.
원래 계획한 것은 현준이 성희와 함께 가는 게 목적이었는데, 아쉽게도 여행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잘됐다고 봤다.
괜히 현준이하고 성희를 리조트에서 마주치게 되면 지영씨하고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 못할 게 뻔하다.
지영씨가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여행 준비를 했다.
"도일씨 골프 쳐보셨어요?"
"처음이요."
내 말을 듣던 지영씨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헉. 정말요? 저는 골프를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래도 몇 번은 해보신 줄 알았죠."
"살면서 구기 종목은 축구 말고 다른 건 단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아.. 골프 쉬운 운동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필드까지 예약을 하셨어요?"
"처음은 어려운 법이죠."
필드를 예약했다.
골프 연습장과 필드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수영장 수영과 바닷가 수영의 수준이라고 보면 될까.
그만큼 연습장에서 아무리 잘해도 필드만 나가면 공을 제대로 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게다가 구기 종목 중에 골프란 스포츠는 경기장이 가장 넓다.
어려운 거 안다.
그런데 어차피 모든 운동은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고, 깨지면서 알아가는 거 아닌가.
정 안될 것 같으면 필드에 돗자리 깔고 김밥이나 먹는 거고.
흐흠.
그리고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필요한 물품은 미리 모두 구매했다.
장비 하나만큼은 좋은 걸로 샀다.
원래 실력 없으면 장비빨이라고 했다.
골프채 풀세트로 560만 원 정도 들었는데, 사실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는 잘 모르겠더라.
골프채를 드라이버, 우드, 아이언세트, 퍼터 종류별로 모두 구입하긴 했는데 아이언 종류부터 퍼터나 드라이버의 쓰임새를 모르니 내 눈에는 똑같은 골프채로 보일 뿐이었다.
옷과 골프화도 모두 구매하여 준비를 마친 상태.
그런데 지영씨는 예전부터 골프를 몇 번 쳐본 듯 모든 준비물이 과거에 썼던 것들 같았다.
골프채부터 골프화까지 심지어 골프가방에는 그녀의 이름이 크게 쓰여 있었다.
그녀와 트렁크에 짐을 싣고 리조트를 향해 출발했다.
"도일씨."
"네?"
"어차피 도일씨는 처음이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도일씨 성격을 알아서 일단 덤벼보는 것 아는데요. 아마 필드 들어가면 이게 쉬운 운동이 아니었구나. 라고 느끼실 거예요."
"야구보다 어렵겠어요? 야구는 상대방이 던지는 공을 쳐야 하는 거고, 골프는 멈춰진 공을 치는 거잖아요?"
뚱딴지같은 말을 해대는 나를 보며 지영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더 할말이 있어보였지만 이내 꾹 참는 것 같았다.
"혹시 골프 영상을 보면서 연습은 좀 해보셨어요?"
"아뇨. 제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흔한 스크린골프 한번 안쳐봤어요."
"하아."
지영씨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일단 가서 기본 레슨 먼저 받죠. 제가 얘기해둘게요."
"레슨이요?"
"네. 어차피 필드 티오프 시간이 오후 두시니까 도착하면 시간 여유 있을 거예요."
"네."
"그런데 도일씨 가끔 보면 참 무모해요."
"걱정 마요. 지영씨 부끄럽지 않게 잘할 수 있으니까."
믿는 구석은 딱히 없었다.
그냥 자신감 하나 밖에.
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골프 연습을 위해 작게 마련된 골프 연습장으로 향했다.
지영씨의 말마따나 필드 티오프 시간이 오후 2시였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점심을 제쳐두고 골프 연습실로 향했다.
그녀도 오랜만에 쳐보는 탓인지 꽤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함께 필드로 나갈 강사가 내게 간단히 설명을 해줬다.
남자 강사였는데 지영씨가 팁을 두둑이 챙겨줬는지 적극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혹시 골프는 해보셨나요?"
"처음입니다."
"아."
내 말을 듣던 강사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런데 필드를 예약해?
강사는 꽤 어이없어 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그립은 왼손으로 잡으시고요. 손바닥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감아준다는 방식으로.."
"이렇게요?"
"그렇죠."
"약간 비스듬히. 그렇죠. 재능 있으시네요."
"흐흐. 골프채만 잡았는데요?"
강사는 무지성 칭찬을 남발해댔다. 대체 팁을 얼마나 준거야.
"이제 잡았으니까 쳐봐야겠죠? 다리 폭은 어깨너비로 벌리시고, 편한 상태로 몸에 힘 빼시고."
"이렇게요?"
"넵. 그리고 이제 셋업이 끝났으면, 왼팔은 쭉 펴고, 오른팔은 편하게. 헤드 위치는 양발의 가운데로."
"아."
"자 이제 손목 움직이지 마시고 허리 아래에서 어깨만 한번 천천히 움직여보세요."
"오. 이 자세가 맞죠?"
"네 맞아요! 이제 한번 살짝 한번 쳐보시면 될 겁니다."
강사의 기초 강의를 끝낸 뒤 나는 공을 툭 쳐봤다.
-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