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어이. 오과장."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대표님.
"소식 들었어. 워킹휴먼 사정이 어렵다고?"
-네. 말도 마십시오. 지금 2팀 계약은 전부 물 건너갔으니까요. 회사 운영이 안 되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볼까?"
-대표님 편한 시간대에 찾아뵙겠습니다.
"아무 때나 괜찮은데. 퇴근했냐?"
-네. 안 그래도 최부장님하고 술 좀 마시고 지금 마무리하고 퇴근하고 있습니다.
"얼굴 보자고. 지금."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00횟집"
전화를 끊고 외출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오과장을 만나는 날이니 깔끔하게 갖춰 입었다.
99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중간층에서 다시 호텔 로비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미리 불러둔 택시에 몸을 실고 00횟집으로 출발했다.
-깨톡
오 [대표님 먼저 도착했습니다.]
나 [가는 중.]
예전에 오과장과 마지막으로 했던 술자리가 노가리포차였다.
오과장에게 퇴사 의사를 밝히고 앞으로 워킹휴먼에서 끝까지 버텨달라는 말과 함께 헤어진 게 마지막이다.
지금 내가 오과장을 만나는 것은 그래도 그의 입에서 입사 여부를 들어야만 했다.
최부장이 내게 오과장의 입사를 부탁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입사 여부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오과장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은 친구라 이런 깍듯한 인사는 부담됐다.
"편하게 해."
오과장은 이미 어디서 거하게 술 한 잔을 마신 것 같았다.
시뻘게진 얼굴과 눈 충혈, 그리고 머리를 부여잡았는지 정리되지 않은 머리.
아마 최부장과 감정적인 이야기가 많이 오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흐흐. 오랜만에 김 과장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오과장이 다소 격앙된 상태인 것 같았다.
"그게 더 편한데?"
"하아. 김 과장님. 보고 싶었습니다."
"그건 조금 징그럽다."
"흐흐."
"어디서 술 많이 마셨냐?"
"최부장님 하고 거하게 마셨죠. 이것저것 얘기 했슴다."
나는 오과장에게 술 한 잔을 따라 줬다. 때 마침 싱싱한 도미회가 테이블에 깔렸다.
술 한 잔을 나눠 마시고 오과장이 회 한 점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대표님이랑 참 오랜만에 술 먹네요."
"그러게. 연락해야지 하면서도 일이 바쁘니까.."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오과장이 나의 빈 잔에 술을 따라줬다.
"그래도 내가 나간 뒤에 오과장이 1팀 책임지고 맡았을 것 아냐."
"그렇죠. 그런데 이게 사람 부리는 게 참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응?"
"최부장님이야 워낙 깐깐하신 분이라 눈높이 맞춰줘야 하고, 내 밑에 있는 정주임 현준이도 끌어야 하고. 만만치 않았습니다."
"..."
"솔직한 말로는 정주임하고도 한번 싸웠습니다."
"왜?"
"뭐 대표님 계실 때야 워낙 일이 순조로웠으니까 사원들이 힘든 줄 모르고 일했는데, 막상 대표님 나가고 나니까. 얘들이 제 말을 안 듣더라고요. 흐흐."
"하! 그랬다고?"
"흐흐. 뒷담화하는 게 아니고, 순전히 제가 능력이 부족한 겁니다. 대표님."
"이런."
"제가 대표님처럼 리더십이 부족한 거죠. 막말로 제가 금전적 여유라도 있어서 얘들한테 점심을 사줄 수도 없잖습니까."
워킹휴먼에 근무했을 당시 나는 사원들에게 점심 카드를 던져줬다. 마음껏 사 먹으라고.
"그래도 과장직위 달았으면 경험도 많이 해봤을 것 아냐?"
"그럼요. 본사 회의도 들어가 보고, 센터 반장들 관리도 해보고, 뭐 이것저것 해봤는데요. 결론은 항상 비교 대상은 대표님이거든요. 흐흐흐."
하긴, 매번 그랬다.
"대표님 나가시고 나서 저요, 아주 진짜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얘기해 봐."
"기뻤습니다."
"...!"
"저도 대표님처럼 내 부하 직원들 멋있게 이끌고 최부장님에게 인정받고, 그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슴다. 흐흐. 바보 같죠?"
"..."
오과장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는 듯 회환이 묻어나는 한숨이었다.
그가 홀로 술을 한잔 따라 마셨다.
"죄송함다. 제가 취했슴다."
"괜찮아."
"대표님. 그런데 대표님 나가고 몇 주 만에 느껴지더라고요. 과장님이 만들어준 그늘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구나..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피땀 흘려서 일해도 그런 그늘 만들어주는 거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
"대표님. 저는 왜 안 될까요."
"뭐?"
"저도 대표님처럼. 제 사업 한 번 꾸려보는 게 목표였는데, 겨우 제 밑에 있는 사원들도 제대로 이끌지도 못하고, 내 위 상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놈이. 흐흐."
"배우면 돼."
"아니요. 이건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슴다. 최부장님도 그러더라고요. 저랑 대표님이랑 결정적으로 성질이 다르다고. 그래서 저는 절대로 대표님처럼 될 수가 없데요. 그러니까 무조건 머리 숙이고 자존심 부리지 말고 밑에서 배우랍니다. 흐흐"
"..."
오과장이 인사불성이 되기 직전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그의 꼬인 혀가 더 꼬여 잠들기 전에.
오과장이 본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려는 걸 내가 막았다.
"한 잔만, 딱 한 잔만 먹겠습니다."
"많이 힘드냐?"
"..."
"담배나 한 대 피자."
가게 앞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오과장은 이내 비틀거리더니 담배에 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자, 내가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줬다.
오과장이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해댔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감사하긴..."
오과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초점이 풀린 눈과 겨우 중심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두 다리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대표님."
"응?"
"최부장님이 대표님에게 말씀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저 대표님 회사에 넣어달라고.."
“어떻게 할 거야?”
오과장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순간적인 상황에 나는 어찌할 바 몰라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이미 오과장의 무릎은 바닥에 탈싹 달라붙었다.
"저요. 대표님 앞에서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 냈습니다. 자존심 부릴 거 다 부렸고, 내려놓을 거 다 내려놓고 대표님 밑에서 진짜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 주십쇼."
"..."
"일어나."
"..."
"일어나라고 인마!"
* * *
오과장이 이제 얌전해진 순한 양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마셨으니 소주병이 테이블을 꽉 채워 나가고 있었다.
그의 눈이 반쯤 감겼다.
졸음이 몰려오는지 잠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워킹휴먼 퇴직금으로 얼마 나오나?"
"천만 원 정도 됩니다."
"생각보다 얼마 안 되네."
"..."
"거기서는 언제까지 일하고?"
"이번 달까지입니다."
"마무리되는 데로 출근해. 그리고 오과장."
"네 대표님."
"내 앞에서 자존심 부려도 되고, 성질부려도 돼. 워킹휴먼에서 사훈이 뭐냐?"
"막 들이대는 거죠."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니까, 그거 잃어버리지 마라."
"감사합니다."
오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옆으로 쓰러지며 잠들었다.
이 친구를 어떻게 집으로 돌려 보낼까 고민이 짙어질 때즘 오과장의 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이 울려댔다.
-집사람.
찬스다.
잽싸게 전화를 받았고 오과장의 집주소를 물었다.
오과장을 간신히 택시를 태워 집에 보내려는 찰나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대표님.. 사랑함다."
"제수씨 화 많이 난것 같더라."
"흐흐. 죽었죠."
"얼른 우리 회사로 와라. 내가 아주 제대로 굴려 줄 테니까."
"들어가십쇼."
오과장이 택시를 타고 떠났고 나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가 내게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GN아파트로 가주세요."
아직은 호텔보다 집이 편타.
우리 회사 안 망해.
오과장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게 내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나질 않았다.
자존심도 강하고 무슨 일이든 책임감 있게 행동했던 녀석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장이라는 무게는 오과장의 무릎을 가볍게 만들었다.
물론 내 무릎도 예전부터 줄곧 꿇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오과장의 심정을 너무 잘 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무릎도 참 가벼웠다.
한 사람이 타인에게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니 줄곧 꿇어왔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내가 한번 쉽게 무릎을 꿇으면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약해지길 바랐다.
오과장이 내게 보였던 행동, 그거 오랜 기간 기억에 남는다.
꿇어본 놈은 안다.
오과장의 인생에서 가장 큰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고 언젠가 그 기억이 괴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과장이 내 손을 놓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의 무릎이 다시는 성하지 않도록.
"대표님 경술대 측에서 연락 왔습니다."
현준이가 내게 보고서를 건넸다. 경술대학교 청소부 휴게실을 만들었다는 것.
"잘했다."
"감사합니다. 휴게실 개관식이 있는데 대표님도 함께 가셔야죠?"
"개관식이 있다고?"
"네. 그래도 쾌적한 휴게실은 어느 대학에서도 드물지 않습니까."
"가자."
"넵!"
현준이의 말이 맞다.
현재 대학교 청소부 휴게실을 제대로 갖춘 곳은 드물다.
최근 청소 노동자 사망 사건으로 몇몇 생각 있는 총장들이 직접 지시하여 청소부 휴게실을 만드는 추세이긴 하나 아직도 미진한 수준이다.
현준이와 함께 경술대학교로 향했다.
경술대학교에 몇 가지 변화가 있다면 현준이와 유도학과 학생들의 추진력으로 청소구역을 정상화하여 용역비를 더 올렸다는 것.
"어떻게 할 거야? 인원을 더 증원해야 하지 않겠냐?"
조수석에 앉아있던 현준이에게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주머님들 의견 들어보니까 어차피 기존에 했던 구역들이라 차라리 급여를 올려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네. 사실 그간 아주머니들이 무보수로 진행했던 구역이라 인원을 증원하는 것보다 급여 인상이 더 낫대요."
"그럼 그렇게 해."
"넵!"
어차피 그들이 매번 무일푼으로 청소를 담당했던 구역이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1.5배.
현재 청소부 직원들이 받는 금액의 1.5배는 올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정산은 한 가지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