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86/200)

회사 자본금은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오과장같이 경력 있는 사원들을 끌어오는 건 굉장히 어렵다.

어차피 이 바닥은 한번 맛보고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경력 사원을 뽑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예전에 워킹휴먼에서도 경력자 신규 채용 공고를 올려봤으나, 결국 신입들만 뽑았었다.

최부장이 내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아마 굿타임즈를 개 박살 내놓은 깜냥정도면 한 푼을 아쉬워하는 수준이 아닌 거로 봤겠지.

"김대표 많이 컸네."

"사람 장사 하다보면 사람만 보게 되거든요."

"돈만 보는 인간들도 많아. 숱하게 깔린 회사들 중에 진정 너처럼 사람보고 하는 회사? 난 없다고 보거든."

"왜요. 있는데요."

그리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

"부장님도 넘어오시죠."

"...!"

최부장이 당황한 낯빛이 역력했다.

"천사장님이 걸려서 그런 겁니까?"

"천사장?"

천사장과 최부장은 워킹휴먼 창업 초기부터 함께해온 사이였다.

그래서 최부장처럼 의리 있는 양반이 그걸 쉽게 놓지 못하는 거로 봤다.

담배를 한 개비 다 태우고 최부장과 함께 노가리포차에 들어갔다.

"천사장은 이미 다 벌었지."

그가 내게 소주 한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솔직히 최부장님도 하실만큼 하지 않습니까. 천사장님 매번 영업 다닐 때 현장 단도리 친 것도 전부 최부장님이고. 황부장이 횡령했을 때도 자진해서 2팀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막말로 내가 천사장하고 인연이 없다면 그냥 뛰쳐나오면 됐겠지. 그런데 도일이너도 알잖나. 내가 밑바닥서 허우적댈 때 머리끄덩이 잡고 올려준 사람이 천사장이라고."

"..."

"너도 그 기분 알지 않나?"

"알죠."

알다마다.

내가 산재를 겪은 뒤 최부장에게 많은 덕을 봤으니까.

최부장 말마따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봤다.

워킹휴먼에서 최부장을 데려오는 건 워킹휴먼의 거래처를 전부 끌어올 수 있는 기회인 건 맞지만, 천사장과 최부장의 관계를 내가 끊어 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 관계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천사장을 휴먼매니저로 끌고 온다? 최부장과 1+1으로?

그러면 휴먼매니저가 워킹휴먼매니저가 되는 꼴.

나는 내 회사를 내 뜻대로 그리고 싶다. 천사장은 내가 컨트롤하기에 기가 너무 세다.

최부장과 술집을 빠져나와 거리를 걸으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어떻게 할 거야? 앞으로."

"거래처 최대한 많이 뚫어 놔야죠. 제가 처음으로 은행 영업을 한번 뛰어보긴 했는데, 나름 재밌더라고요."

"내가 널 딱 처음 봤을 때부터 영업에 재능은 있어 보였거든. 얘가 말하는 싹수부터 남달랐어. 아주."

"칭찬이죠?"

"천사장도 그러지 않았나? 처음에 너랑 카페에서 면접 볼 땐가? 영업 한 번 뛰어볼 생각 없냐고 했었잖아."

"기억나죠. 그런데 천사장님은 기가 너무 세서요. 제가 옆에서 같이 따라다니기 부담스러울 것 같더라고요."

"맞아. 사실 나도 간혹 그래."

"들어가십시오. 최부장님."

"그래. 고맙다. 다음에 또 보자고."

* * *

다음날 휴먼매니저 사무실에는 현준이가 일찍부터 출근하여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현준이를 발견하자마자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말했다.

"현준아!"

"네 대표님."

"네 친구가 그간 못 받은 돈 계좌로 180만 원 정도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잘 얘기해줘! 네 대표 멋있지?"

"정말요? 와아. 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제가 듣기론 받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요."

"흐흐. 내 능력 무시하냐?"

"존경스럽습니다! 대표님!"

"너희들도 경술대학하고 GN아파트건 잘 관리 해줘야 돼. 경비들이나 청소 아줌마들이 부당한 일을 겪지 않는지 매일 전화 통화 한 번씩 하고! 알았냐?"

"넵!"

"우리 회사가 일성은행 먹은 겁니까?"

"어. 아마 오늘 중으로 계약서 작성할 것 같거든. 나랑 같이 갈 사람?"

내 말에 일순간 정적.

"정주임."

"네?"

"GN아파트 경비를 정주임이 맡고 있으니까, 경비 계약서하고 딱히 차이점은 없을 거야. 이제 계약도 한번 옆에서 보고 배워 봐야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오과장 우리 회사로 올 것 같다."

"...!"

정주임의 표정은 환했고, 현준이의 표정은 일순간 어두워졌다.

"대에박 오과장님이 올 수도 있다고요?"

정주임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사실 과거 워킹휴먼에 있을 당시 오과장과 정주임의 팀워크는 좋았는데, 내가 나간 뒤론 살짝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팀워크가 어딜 가겠나.

정주임은 오과장이 올 수 있다는 소식에 이미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그런데 현준이의 표정은 썩 좋질 않았는데, 아마도 워킹휴먼에서 오과장이 현준이의 군기를 담당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오과장이 오게 된다면 사무실에 긴장감이 돌 수도 있는 거지.

대표 입장으로서 오과장같이 사무실 분위기를 잡아주는 직원이 있다면 마음이 한결 편할 수밖에.

"오과장 오면 이거 사무실 너무 좁아지겠는걸."

"그죠. 지금 현준이 책상도 완전히 공부 책상이지 저게 사무 책상은 아니거든요."

"현준아."

"네. 대표님."

"어떻게 할까? 오과장은 바닥에 앉아서 업무 보라고 할까?"

"제가 바닥에 앉겠습니다."

"네가 선배잖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그럼. 워킹휴먼은 워킹휴먼이고 휴먼매니저는 휴먼매니저지. 네가 선배야. 입사 선배."

"와. 오과장님 얼른 왔으면 좋겠네요."

"크크크."

일단 사무실 이사가 가장 급선무였다. 사무실 이사 비용으로 법인 대출을 신청해놨으나 심사까지 꽤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오과장 오면 사무실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동네가 좋을까?"

"사실 여기보다 워킹휴먼 있는 빌딩이 괜찮긴 하죠. 임대료도 제가 알아봤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요."

"거길 또 가자고?"

"아무렴 어때요. 여기보다 백배 낫지 않을까요."

"하긴 너희들 집이 그쪽이랑 가깝긴 하다 그지?"

"네. 대표님 집도 가깝죠. 자차로 20분이면 도착하지 않나요?"

"음."

정주임의 의견이 좋긴 했다. 허름한 빌라의 방 하나짜리 사무실보다는 낫겠지.

그런데 워킹휴먼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은 역세권에다가 약 10층짜리 빌딩이라 내가 즉시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임대 사무실에 들어가야 하는데, 사무실 월 임대료도 보증금 1억에 월 150만원.

나름 괜찮긴 했다.

* * *

정주임과 함께 일성은행으로 향했다.

은행 경비에게 업체가 바뀌었다는 걸 설명해줘야 하고 근로계약서 및 고용승계 되는 부분을 설명해줘야 했다.

파견된 근로자들이 본인이 속해있는 회사의 대표가 누군지도 모르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그런 관행을 부수고 싶었다.

파견도 소속감을 가질 수 있도록.

게다가 현준이 친구가 내게 보내준 부당 업무일지를 파악해본 결과,

일맥상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ATM기 조작, 공과금 납부기기, 전표, 정수기, 세차, 동전 교환 등,

은행 경비업무와 저촉되는 일이 너무 비일비재하고 많았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일성은행의 부지점장이 떡볶이를 좋아한다는 것인데,

은행 경비는 오후 4시 은행창구 마감 직전에 부지점장의 지시로 매일 분식집에 들린다는 것.

떡볶이 심부름이 뭐가 대수냐 하겠지만, 고등학생 일진들이 빵셔틀 시키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반문이다.

은행경비 김창환씨를 만났다.

그는 이제 일주일 된 신입으로서 은행 경비 업무에 대한 업무일지도 읽어본 적 없는 아주 순수한 신입이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안녕하십니까. 휴먼매니저 대표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에게 명함 하나를 건넸고, 그는 나를 대체 뭐 하는 놈인가 싶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업체가 변경됐습니다. 앞으로 저희 휴먼매니저 소속으로 근무하시게 될 겁니다. 자세한 사항은 정성희 주임님이 설명해 드릴 겁니다."

정주임이 김창환씨와 상담하며 앞으로 근로 계약이 어떻게 변경되고, 1년 미만의 근로자에게 제공되는 연차, 퇴직금, 휴가, 그리고 업체가 바뀌더라도 고용승계 되는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은행의 한 일원으로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도움을 주고 있지만, 대체 자신의 정체성이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은행 경비라고 얘기해줬으나, 본인이 여기서 경비를 보는 일이 뭔지 모르니 대체 이해하질 못했다.

그렇다면 알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은행 경비로서 안전근무일지 작성도 하지 않고, 가스총도 소지하지 않은 이곳을 완전히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지점장과 단판이 필요했다.

나는 지점장실로 향했다.

지점장은 은행VIP로서 대접뿐만 아니라 은행 경비업체 대표로서 대우해야만 했다.

갑질을 해야 마땅한 경비 업체의 대표가 은행 VIP다?

아마 머릿속이 꼬일 대로 꼬이고 있을 거라는 짐작이다.

지점장도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될 줄은 몰랐겠지.

"아시다시피 은행 경비들에게 부당하게 업무 지시를 하는 부분이 자주 목격되고 있습니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바라시는 것처럼 저희가 은행 경비를 순전히 경비 업무만 시키기에는 은행일이 너무 많습니다."

"..."

"저희 지점이 상권 밀집 지역에 위치해서 고객님들도 굉장히 많으시고요. 혹시 용역 대금이 너무 적으시다면 제가 본사하고 상의해서 올리는 방향으로 말씀은 해보겠습니다."

"안 돼요. 돈을 아무리 많이 주신다고 해도 경비업법상 경비가 잡무를 하게 된다면 저희 업체가 경비업 취소를 맞거든요."

"아.."

지점장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만큼 은행 경비가 이곳에서 하는 업무가 막중하다는 것.

"동전 교환하고 은행 ATM업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지점장이 내게 간절한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나는 단호하다.

"안될 것 같은데요."

"흠."

"현재 은행 경비로서 가스총도 소지를 않고 있잖습니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어떻게 대처하려고 하십니까."

"그럴 일이 없어요."

"네?"

"시대가 어느 땐데 은행 강도가 들겠어요? 들어와 봐야 잡범 수준이겠죠. 그럴 일 전혀 없으니까 대표님께서 은행 보안에 신경 써주시는 것도 참 감사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일이 진행됐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휴."

한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지점장은 그래도 이곳에서 은행 경비가 해주는 잡일이 은행원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겠지.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

뭔가 합의점을 찾기에는 이미 일성은행의 00지점은 너무 굳어져 버렸다.

막말로 내가 미친놈 마냥 돈으로 지점장에게 갑질하고 그걸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GN아파트와 경술대학교를 뒤엎었던 것보다 세련되고 내 힘을 빼지 않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렇다면 결국 영업이지.

나는 따듯한 차 한 잔을 들고 창가로 향했다.

창가 너머로 주차장이 보였다.

"지점장님."

"네?"

"영업이 뭐라고 생각해요?"

"허허. 갑자기 그건 왜.."

"제가 지점장님에게 영업에 대해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러시죠. 크흠."

"옛날 얘기긴 한데요. 고등학교 때 반에서 괴롭힘 당하던 친구가 있었거든요. 일진 새끼들이 매일 그 친구 돈을 뺏는데 보는 제가 안쓰러워서 언젠가 저 일진 새끼들 줘 패버려야지 했거든요?"

"굳이 나서는 건.."

"저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굳이 나서는 걸까. 그래서 그냥은 못해주겠더라고요. 제가 그 친구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