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을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현준아."
"네. 대표님."
"네가 친구하고 얘기해서 그간 부당하게 근무했던 내역들 전부 작성하고 통장 내역 확인해서 실수령 금액도 파악해놓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작성해야 돼."
"알겠습니다."
"정리되는 대로 깨톡으로 보내놔."
"넵!"
"그리고 친구야."
"네."
"인생 경험? 조까라 그래. 이런 경험 안 해도 되는 거니까 너무 우울해 말고. 알았냐?"
"감사합니다."
나는 재킷을 둘러 입은 뒤 책상에 있는 담배를 챙겨 들었다.
"대표님 어디 가십니까?"
"영업하러 가야지?"
현준이 친구가 근무했던 은행으로 향했다.
휴먼매니저 사무실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 경기 남부에 위치한 일성은행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역시 은행경비.
딱 봐도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그가 내게 어떤 목적으로 왔냐고 물었고, 나는
"지점장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혹시 은행 VIP시면 따로 마련된 룸에서 대기하고 계시면.."
"VIP는 아니에요."
"네? 그럼 무슨 일로..?"
"일반 창구에서 거래할 수준이 아니라서요"
은행에 영업하러 온 거다.
"창구에서 대기해주세요."
"넵!"
은행경비에게 아주 멋들어진 말로 지점장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으나,
일성은행과 거래 내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
괜히 진상 손님으로 내몰릴 것 같아,
결국 번호표를 뽑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지점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적당한 예금을 들어줘야만 했다.
인근이 상업 시설이 많고 시장이 있는 탓에 현금부자들이 거래를 많이 올 거라는 짐작, 1억 예금 수준은 허다할 게 분명하고 한 10억 정도면 지점장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현재 시각 오전 11시.
내 번호까지 꽤나 많은 대기를 해야 하는 탓에 나는 밖으로 나가 흡연실로 향해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역시 나의 정신적 지주인 최부장에게 조언을 듣지 않을 수 없지.
최부장에게 전화했다.
"부장님 잘 계세요?"
-어이. 현장이지. 웬일이냐.
"초보 대표가 뭐 궁금한 거 있으니 전화 드렸죠. 은행 경비도 저희 경비업법에 적용되는 거 맞죠?
-그치, 예전에는 청원경찰이고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용역 업체에서 소속된 경비야. 아마 그게 IMF전후로 파견업 생기면서 바뀌었을 거야. 그런데 왜? 은행경비 쪽 뚫어보게?
"네."
-어디?
"일성은행이요."
-이야..
"왜요?"
-너는 왜 힘들고 어려운 곳만 돌아다녀?
"흐흐. 부장님이 좀 알고 있나 봐요?
-알지 왜 모르겠냐. 거기 일성은행 웬만하면 안 건드리는 게 좋아.
"하자 있나요?"
-갑질이 좀 심해야지. 경비라고 뽑아 놓은 애들한테 잡일이 너무 많다니까. 이런데 잘못 잡으면 괜히 업무정지만 먹어. 그런데 일성은 갑자기 또 왜.
"제가 먹어 보려고 했죠."
-에라이 이놈아. 거길 무슨 수로 먹냐. 난 반대다.
"은행 지점장을 한번 볶아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지점마다 하는 계약이라 지점장 인맥이면 괜찮지. 그런데 괜히 불미스런 일 만들지 마. 저기 굿타임즈 대표도 그쪽에 연관된 걸로 아는데, 이 바닥 좁은 거 알잖나. 지금 벌써 내 귀에 들어오는 것도 있고.
"뭔데요?"
-경술대학교 뒤집어엎었다며?
"와, 거기 까지 소문났어요?"
-내가 네 성질 알아서 뭐 적당히 하란 말은 못 하겠는데 너무 무리하진 말어라. 괜히 이미지 안 좋아지면 계약도 힘들어지니까.
"걱정해주셔도 감사합니다."
-암튼, 다음에 한번 보자고. 오과장이 수시로 정주임하고 고현준이하고 연락을 하는 것 같더라고, 네 회사가 복지가 아주 기가 막힌다고.
"오늘 뵙죠."
-시간 되냐?
"넵"
최부장과 전화를 끊고 급하게 은행으로 들어갔으나,
아뿔싸,
결국 내 차례는 지나가고야 말았다.
-깨톡.
때마침 내가 현준이에게 부탁했던 보고서가 깨톡으로 날아왔다.
그간 현준이 친구가 이곳에서 부당하게 근무했던 일들과 다달이 입금된 급여 명세였다.
은행경비나 아파트 경비나 경비업법에 근거하기 때문에 경비업법에 저촉되는 업무를 경비원에게 시키면 중간업체의 경비업 허가가 취소된다.
그런데 원청은 이런 내용을 분명히 모를 것이고, 결국 중간업체에서나 알 법한 내용인데, 금융회사와의 계약 유지 때문에 부당 업무에 대한 부분을 거절하기도 힘든 환경이다.
현준이가 보내준 보고서를 살폈다. 과거 현준이 친구가 부당하게 근무했던 내역은 총 열 가지.
첫째로 ATM업무, 이 부분은 아마 어르신들이 ATM업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행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가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요즘은 워낙 보이스피싱이 많기 때문에 은행 경비원들이 보이스 피싱 범죄 예방 목적을 위한 업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겠으나, 순전히 편의를 위한 업무는 경비업법 위반에 해당했다.
그리고 ATM의 모출납 및 마감 업무는 순전히 은행원의 업무다.
내가 회사 일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본인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업무 떠넘기는 건 안 되지.
그 외 너무 많아서 머릿속에 전부 집어넣기가 빠듯할 정도였다.
잔심부름은 기본이고, 지점장 차에 묻은 새똥을 치운 것도 있었다.
일단 현준이 친구 말만 듣기에는 신빙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왕 창구 대기표도 뒤로 밀렸으니 몇 개의 테스트를 해보고자 했다.
열 가지 중에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은행경비가 정말 동전을 교환해주는 지 여부였다.
나는 만 원권 지폐를 하나 들고 은행경비에게 말했다.
"동전으로 좀 교환할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은행 경비는 당연하다 듯이 내게 만 원권 지폐를 받았고 창구 뒤편으로 향해 잽싸게 동전으로 교환해왔다.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은 경우.
"이렇게 빨리요?"
"주변에 상권이 많아서 동전 교환해달라고 하시는 사장님들이 많으셔서요. 그래서 지폐별로 미리 동전을 정리해놓습니다."
"누가요?"
"제가요."
500원짜리 동전 20개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인근에 시장과 상권이 발달 된 탓에 동전을 바꾸기 위해 대기 인원이 많았다.
그래서 은행 경비가 이 부분을 도와줘서 은행 업무가 밀리지 않도록 해결해주는 것 같았다.
나름 현준이 친구의 말에 신빙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은행 경비가 동전 교환 업무를 보는 것은 명백한 경비업법 위반.
은행 측에서 용역비를 더 준다고 해도 시켜선 안 되는 일이다.
어쨌든
이 부분은 체크 완료.
그리고 두 번째로 지금 당장 테스트 할 수 있었던 건, 공과금 수납기.
요즘은 간단히 스마트폰으로 해결 가능했지만 어르신들은 공과금을 수납하기 위해 은행을 찾아온다.
이건 아주 빠르고 쉽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미 공과금 수납기에 용지가 떨어진 탓인지 은행경비가 아주 익숙하게 수납기에 용지를 보충하고 있었기 때문.
이 부분도 체크완료.
간혹 몇몇 기사 댓글을 통해 그럼 은행 경비원이 하는 일이 뭐냐고 댓글을 써놓은 것을 확인한 바 있었는데, 은행 경비는 문자 그대로 경비다.
사무 업무 보조를 경비원에게 대신해버리는 건 순전히 은행의 인건비 절감을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필요하면 사무보조를 뽑아야지.
-띵동!
때마침 내 순서가 다가왔고 창구로 향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로 은행원에게 말했다.
"예금 가입 좀 하고 싶어서요."
"네.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혹시 일성 은행하고 첫 거래 신가요?"
"예금 금액이 좀 커서요."
"네?"
"10억 정도."
10억이면 충분했다.
내가 당장 일성은행의 최고등급 VIP가 되기 위한 조건을 간단히 암산해본 결과, 1억 예금 한 번이면 충분히 가능했으나,
지점장이 버선발로 내게 달려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10억 정도 예금 한번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VIP대기실로 모시겠습니다."
* * *
VIP실은 꽤나 호화로웠다.
현재 지점장이 외근을 나간 탓에 기다려야만 했고, 최영숙 부지점장이라는 사람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중역 책상에 내려놨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네. 안녕하세요."
"예금을 10억씩이나 가입을 하시는 분은 요즘 드물어서요."
"10억이 아니라 더 될 수도 있죠. 흐흐."
"그런데 다른 투자 상품은 안 보시나요?"
그녀의 나이는 40대 초반에 멀끔한 오피스 룩을 입은 모습.
"제가 딱히 돈 쓸 곳도 없고 해서 그냥 묵혀두려는 돈이에요."
"그러지 마시고 저희 투자 상품이 많은데 한번 상담 한번 해보시겠어요?"
"아뇨."
난 지금 투자하러 온 게 아니다.
"네?"
"그냥 예금이면 충분해요."
은행에 영업하러 온 거다.
"네. 곧 있으면 지점장님 오실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지점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지점장의 안내를 받고 VIP대기실을 빠져나와 지점장실로 향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지점장의 나이는 40 중반, 꽤나 젊어 보이는 모습이 놀랐다.
나름 50대 이상을 생각했던 건 내 편견이었을까.
"우리 일성은행하고 첫 거래라고 들으셨습니다. 오늘부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성은행 지점장 최행실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그가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지점장의 기본은 영업이라고 했던가. 분위기에서 그런 영업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이것저것 서로 사업 관련된 얘기를 하다 본론에 들어갔다.
"간혹 현금을 안전한 예금에 묶어 두고자 하시는데요. 그런데 아시잖습니까. 우리나라 도둑놈들 많은 거."
"네?"
지점장이 입맛을 다시며 따듯한 차 한 잔을 마셔댔다.
"솔직히 대표님께서 우리 지점에 10억 넣어주시면 저야 실적이고 고맙죠. 그런데 이거 하지 마요."
"하지 말라뇨?"
순간 당황.
"10억에 연이자 안전하게 들어와도 결국 세금 폭탄 맞는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연이자 2%만 가져가신다 생각하시고 적당히 딱 5억, 5억만 묶어 두시고 나머지 현금 5억은 파생상품에 투자를 하시는 게 낫다는 거죠."
하긴 10억을 예금에 넣겠다고 했으니 금융 지식이 전혀 없는 수준으로 봤을 수도.
"무슨 상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