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이윤과 수당이 일절 없기 때문에 클린빌딩 대표가 여태 용역비로 해먹은 건 퇴직 수당입니다."
"네?"
"퇴직수당이요. 1년을 채우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잖아요. 그걸 원청에서 매달 적립식으로 용역회사에 입금해주거든요."
"아.. 그러면 클린빌딩 대표가 그걸 전부 해 먹은 건가요? 그러면 저희 퇴직금 못 받나요?"
"청소용품 구매하는 데 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퇴직급여도 조금 남아있는 상태고요."
이번 계약 건은 원청의 갑질이 심각하게 개입된 계약서라 솔직히 클린빌딩 대표가 해먹을 게 거의 없었다.
"아.."
"어차피 1년 계약이기 때문에 퇴직금은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 이상 받으실 수 있게끔 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경술대학교와 계약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휴먼매니저 명함에 있는 정성희 주임에게 전화하시면 친절하게 답변해드릴 겁니다.
그때 총장실을 엎어버렸던 화연씨가 손을 들며 내게 말했다.
"혹시 저희 계약 해지 되나요?"
"네?"
"그렇잖아요. 대학교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게 분명한데, 계약 해지되면 저희 어떡하죠? 1년 근무해도 퇴직금 못 받는 거 아닌가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계약 해지되더라도 우리 회사 소속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여태 근무한 것들 전부 인정되니까요."
"아.."
"또 다른 거 궁금하신 게 있나요?"
"저희들 휴게실은 계속 화장실을 써야 하나요?"
연세 드신 아주머니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의 나이 58살. 청소미화 일을 처음으로 하는 근로자였다.
"현재 개선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냄새나요. 밥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서 매번 화장실 청소도구함에 들어가는데, 어휴, 죽겠다니까!"
"현재 몇 층 화장실을 쓰고 있어요?"
"3층이요!"
"오늘 중으로 답변 준다고 했으니 기다려보세요."
식사를 끝내고 아줌마들과 다시 경술대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휴게실에 불만이 잔뜩 쌓인 그들은 나를 끌고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다.
청소도구함이라고 쓰인 변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욕실 의자 하나에 간이 책상이 있었다. 전기를 또 어디에 끌어왔는지 전기포트도 보였고, 벽에는 이것저것 청소용품들이 걸려 있었다.
선풍기, 에어컨도 설치할 수 없는 이곳에서 곧 다가올 여름을 보낸다면 더위로 쓰러질 것 같았다.
휴.
총장의 지시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이지만, 청소 아줌마들에게 휴게실 하나 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여태 이곳에서 휴식하셨나요?"
"어휴. 말도 말아요. 매번 여기서 밥 먹는다고 생각해봐요. 지금도 속이 울렁거린다니까."
아줌마들의 하소연을 들은 뒤 나는 현준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한 대 물며 현준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래?"
"휴게실을 따로 만들어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수로? 총장이랑 또 한판 해버릴까?"
"휴우."
"사실 나도 학생 때도 신경 쓰지 않았거든, 뭐 학교가 개판이 되든 말든 내 학점이 우선이니까. 하아. 그런데 이건 좀 아니지.."
"그렇죠. 저도 학교 생활하면서 청소부 아줌마들 휴게실이 화장실이라는 건 처음 알았네요."
"몰라서 그런 거지. "
"..."
"그런데 이제 알았잖아?"
"네?"
"대학교의 주인이 누구야?"
"총장님이죠."
"총장은 임기 4년이야. 어차피 나갈 인간이고."
"그러면 학생이죠."
"학생들이 관심을 가져 줘야 돼, 이건 내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개선될 여지가 없어 보이거든."
"알겠습니다."
"뭘 알았단 거야?"
"대표님 저 믿고 맡겨주십쇼."
그리고 전화를 몇 통화 하더니 이내 대학교 정원으로 또 다시 유도학과 애들이 줄줄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흰색 도복을 입은 거대한 장정들이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운동과 애들의 선후배 관계가 이렇게 센 걸까.
현준이 앞으로 줄 선 유도학과 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며칠 전 현준이의 후배 녀석이 유도를 관뒀으니 선배 취급을 해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주 자존심 상할만한 일이지.
현준이가 일전의 일로 여태 쌓였던 얘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유도를 그만두면 선후배고 뭐고 끝이라는 거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너희들 입으로 얘기 했잖아. 선배가 유도 때려치웠으면 선배 대우 해줘야 하냐고."
"선배님.. 그건 저희가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너희들한테 언제 한번 빠따를 때린 적 있냐. 막말로 너희들이 메달 못 따고 아무 성과 없이 사회에 나가면 어쩔 건데? 선배 좋은 게 뭐냐고."
"..."
"뭐라도 해야 될 것 아냐. 요즘 유도장이 돈 되냐? 코치라도 해보게? 연줄 있어? 아무것도 없잖아 이 새끼들아. 그걸 알면서도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말해? 내가 유도를 관둔 건 부상 때문이라고, 내 의지가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내가 열 받아서 우리 동기애들한테 다 얘기하려다가 참았거든? 어? 아직 우리 동기애들 팔팔해, 졸업한 지 아직 1년도 안 된 새끼도 있다고."
"정말 죄송합니다!"
현준이의 감정이 다소 격앙된 것 같았다. 그래도 배운 게 운동이고 있는 거라곤 운동 인맥인데, 후배들에게 무시당했던 게 계속 뇌리에 남았던 것 같다.
"죄송하면 내 말 하나 듣자."
"...?"
"너희들이 청소부 아줌마들 휴게실 만들어 줘야겠다."
"네? 그걸 왜 저희가.."
"학교 주인이잖아."
"..."
"너희들 없으면 학교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이 관심을 가지고 요청을 해야 청소부 아줌마들이 휴게실을 가질 수가 있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후배들이 다소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동기부여가 필요할 듯 보였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
"잠깐!"
내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맴매를 줬으면 당근도 먹여야지.
"나름 팁을 주자면 과대 애들하고 총학생회에 협조 요청을 해, 너희 학과 애들만 해서 달라질 거 없으니까, 그리고 만약에 이거 너희들이 성공시키면 장학금 쏜다."
"...!"
"순전히 너희들 장학금으로 쓸 수 있게끔 학과장한테 얘기해 놓을 거니까, 알았냐?"
"네! 알겠습니다!"
"해산!"
* * *
현준이가 조수석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대표님, 감사합니다."
"응?"
"장학금이요.."
"됐다. 오랜만에 대학생들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그리고 네 후배들이잖아, 나중에 네가 인력 좀 끌어오라고 미리 밑밥 쳐두는 거야."
"크크크. 알겠습니다."
"운동 그만둔 거 후회되지 않게끔 열심히 일해. 돈도 많이 벌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경술대 휴게실 건은 전적으로 네가 맡아."
"...!"
"돈 나가는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런데 몇 가지 조건이 있어."
"네."
"지하금지, 냉난방기 필수, 환풍기, 공기청정기, 정수기.. 외우고 있냐?"
"네."
"그 외 필요한 것들 있으면 회사 돈 아끼지 말고 정주임한테 얘기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준아."
"...?"
"네 나이 때는 데이트하면 뭐 하냐?"
"영화 보고 카페 가고, 돈 없을 때는 마냥 걷습니다."
"똑같네."
"네?"
"나도 그랬거든."
"아.."
"내가 이번에 리조트 쿠폰을 이벤트로 받았거든, 그런데 딱히 쓸 곳이 없네?"
"..."
"너 여친 있냐?"
분명히 있지, 정주임.
"옛날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직 없습니다."
거짓말은.
"에이, 너 주려고 했는데 그럼 다른 사람 줘야겠다. 어휴."
"아뇨. 저희 어머니랑 다녀오겠습니다."
"효자였구나."
"네!"
효자는 개뿔.
"그래, 너 줄게. 홈페이지에 리뷰도 좀 잘 남겨줘, 이벤트 당첨기념으로."
"네."
"좋냐?"
"흐흐."
현준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홀로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영씨가 나를 반겼으면 했으나, 가족들과 선약이 있는 탓에 홀로 쓸쓸히 밤을 보내야만 했다.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띠리리리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서 서류 가방을 집어 던지며 그대로 소파에 퍼질러 누웠다.
나름의 성과라면 경술대학교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줬다는 것이다.
특히 유도학과 학생들이라면 덩치도 있고 운동부 특유의 단합이 있기 때문에 다른 운동학과 학부생들도 합세하리라 봤다.
그러면 총장도 손을 들 수밖에 없겠지.
조금은 출출한 탓에 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에 쌓아놓은 정크 푸드를 꺼내들고 다시 거실로 향하려는 찰나.
그때
-으아아악!
펜트리 룸에서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튀어나온 한 사람.
지영씨였다.
간 떨어질 뻔.
"뭐에요? 오늘 가족하고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취소 됐어요, 흐흐"
"계속 그러고 있었어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도일씨 편의점에 있는 거 보고 엄청 뛰어왔다니까요. 흐흐."
서프라이즈를 위해 지영씨가 엄청 뛰어 왔을 생각하니 귀여웠다.
"진심 간 떨어질 뻔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외박해도 돼요?"
"동생이 부모님 잘 구슬려놔서 당분간 외박 자유 이용권 따냈죠."
지영씨의 동생 지훈이에게 펀드, 보험 상품을 들어줬더니 완전히 충신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오늘 밤도 혼나야겠네요."
"네?"
영업하러 가야지
"도일씨! 일어나요!"
벌써 날이 밝은 건가. 지영씨가 나를 흔들어 깨웠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
딱히 바라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지영씨가 과일주스와 연두부 샐러드를 만들었다.
"아침 주는 거예요?"
"도일씨는 아침 잘 안 먹죠?"
"습관이 돼버렸죠.. 아침을 차릴 여유가 없었으니"
"저는 일어나면 뭐라도 입에 넣어야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요."
"흐흐. 덕분에 아침도 먹네요. 지영씨. 이번에 제가 리조트 예약해놓은 게 있는데 다음 주 주말에 같이 가실래요?"
"갑자기요?"
지영씨와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먼 곳은 아니고, 경기도 인근에 위치한 리조트라 평소 해보고 싶었던 골프도 쳐보고 싶었고, 수영장에서 지영씨와 놀아보고도 싶었다.
나는 지영씨에게 앱으로 리조트 검색을 해서 보여줬고, 지영씨는 굉장히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싫은가?"
"어?"
"왜요? 싫으세요?"
"어제 성희랑 깨톡하다가 알게 됐는데요, 성희도 다음 주에 여기 놀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지영씨는 성희와 했던 깨톡을 보여줬다, 그리고 리조트를 링크한 홈페이지는 내가 현준이에게 선물한 곳과 동일했다.
"와 신기하네, 어떻게 같은 곳을 생각해두고 있었을까요."
"사실 고백할 게 있어요."
"네?"
"제가 현준이한테 리조트 쿠폰을 선물해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