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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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님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녜요. 어차피 전액을 못 받는다면 이겨봐야 결국 돈 잃고 시간 잃고 지랄 맞은 세상이라며 술만 늘고, 결국에 회생 아니면 파산일 텐데.."

내가 현실을 너무 꼬집었나? 대표가 이내 울상인 표정으로 담배를 펴댔다.

"그렇죠. 사실..그런데 대표님 너무 잘 아신다. 나이도 꽤나 젊어 보이는데."

"익숙하죠."

클린빌딩 대표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버티는 건 그나마 본인 직원들에 대한 양심이 있어서겠지.

"그런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너무 비참하잖아요? 어디 비빌 언덕이라도 있어야 겨우 숨 좀 붙이며 살지."

"소송 취하하시죠."

"네?"

대표가 이내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송 취하하시고, 계약 저한테 양도하세요."

"...!"

계약을 양도받는 것은 내가 그 빚을 떠안겠다는 뜻.

"가끔은 법이 필요 없을 때가 있어요. 막말로 그 법이 대표님이 처한 상황을 전부 보호해 준답니까?"

"대표님은요?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

생각은 없다.

그런데 돈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클린 빌딩 대표와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서 용역비 산출 내역을 살폈다.

청소 아줌마들은 4대 보험조차도 가입돼 있지 않았다.

용역비를 산출할 때 대학교 측에서 퇴직충당금과 연차수당, 그리고 최저시급만 산출하여 급여를 책정했고, 간접비용, 즉 사대보험은 용역비 내역에 포함되질 않고 있었다.

최악의 계약.

제경비도 피복비와 교육비가 전부이며, 나머지 청소에 필요한 도구들도 전부 업체 측에서 준비해야 하는 상황.

갑이 을에게 압박하기 위한 계약 내용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을에게 돌아가는 복지혜택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휴게실은 계약 내용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현재 경술대학교 청소 미화원들의 휴게실은 각 층 여자화장실 청소도구함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밥을 먹으며 2시간을 휴게한다고 했다.

계약서를 살피는 내 모습을 보며 클린빌딩 대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괜찮겠어요? 영 맘이 불편하네."

"대표님."

"네?"

"다음부터는 계약 꼼꼼히 살펴보시고 하세요."

클린 빌딩 대표와 계약양도를 마무리 짓고 나오는 길에 그가 나를 붙잡았다.

클린빌딩 대표는 내게 엎드려 절해야 하는 격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 * *

"그래서 이번에 청소계약을 양도받았다고요?"

"네. 많이 놀란 것 같은데요?"

늦은 저녁 지영씨와 함께 카페에서 만났다. 근래 일이 바쁜 나머지 지영씨와 만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시간을 쪼개서라도 지영씨와 만나고 싶어 무리하게 늦은 저녁 불러냈다.

물론 주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계약 기념으로 자그마한 선물 하나 샀어요. 지영씨하고 어울릴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명품백 하나를 건넸다. 그녀가 종이가방을 받으며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빽이요?"

"네. 백화점 들렀다가 지영씨 생각이 나서 샀어요."

"..."

지영씨가 종이가방에 담긴 박스를 열어 백을 꺼내 들었다.

"예쁘네요."

"그죠?"

그런데 지영씨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도일씨."

"네?"

"저 그냥 마음만 받을게요."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아뇨. 그게 아니라. 도일씨 사업하는 데 필요한 것도 많으실 텐데.. 차라리 거기에 보태 쓰세요."

"제가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 정말 가볍게 데일리 백으로 메라고 샀으니까 맘 편하게 받아주세요."

"..."

사실 좀 미안하기도 했다. 그녀는 백수였고 시간은 많았으나,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평일에 자주 못 만난 탓에 물량 공세로 마음 좀 풀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영씨는 단호했다.

"아뇨."

"네?"

수백만원짜리 명품을..

"저 못 받겠어요."

"아니 왜요. 이게 큰 의미가 있는 선물도 아니고 제가 가벼운 마음으로 사드리는 건데요."

"도일씨 마음 다 알아요. 갑자기 이런 선물을 할 성격도 아닌 거 알고..그러니까 마음만 받을게요. 도일씨 사업자금에 보태 쓰세요."

"아니. 괜찮다니까요."

"제가 안 괜찮아요. 도일씨. 그러니까 환불받으세요."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도 이해된다. 사업 초기라 이리저리 돈 들어가는 데 많을 텐데 무리해서 백을 사는 게 내내 마음에 걸리겠지.

더 이상 그녀에게 요구는 하지 않았다.

"제가 도일씨 능력을 무시하는 게 아녜요. 그런데 때가 있잖아요. 지금은 도일씨가 사업에 집중할 때지 이런데 돈을 쓸 때가 아닌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다음에요. 다음에 기분 좋게 받을게요."

"..."

마음 같으면 그녀에게 로또 당첨자라고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그녀도 돈이 많다.

지영씨 집안이 얼마나 잘 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현재 가진 재산보다는 많을 것 같았다.

예전에 명석이로부터 들은 바 수백억 이라고 했으니까.

지영씨와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고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섰다.

2층 주택.

조경으로 가려진 실내.

게다가 부자들만 산다는 성북동.

그녀는 내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대궐 같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자동차 전조등 탓에 환히 비쳤다.

그녀가 내게 손을 흔들었고, 나도 전조등을 끄고 손을 흔들어줬다.

언젠가 저 대궐 같은 집에 들어갈 때가 오겠지.

* * *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계약서를 더 면밀히 검토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가만히 살펴보면 분명히 구멍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명시된 청소 범위에 대해 파악했다.

건물의 바닥, 복도, 계단, 유리창, 천정, 벽체로 구성된 곳, 그리고 건물 내외부 고정물품 또는 조형물, 강의실, 화장실, 주차장으로 나누어졌다.

현재 미화 인원은 총 8명이며, 청소반장 1명, 7명은 40대, 50대 이상의 아줌마들이었다.

청소 구역 및 인원 등을 모두 머릿속에 입력했다.

습관이었다.

워킹휴먼에서도 계약서를 거의 달달 외워버릴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비록 내가 현장에서 일하지는 않지만, 원청에서 부당한 요구를 했을 경우, 바로바로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대처하지 못하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내 밑에 있는 용역 직원들에게 시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불필요한 소모를 애써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내 성질이었다.

비록 이번 계약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최부장이라는 든든한 방패가 있었기에 내 뜻대로 움직이고 옳고 그름을 최부장이 판단 해줬으나,

이제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야만 했다.

나도 아직 모르는 거 많고 알아야 할 게 많았다.

그런데.

무식한 인간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무식한 사람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한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읽은 한권의 책은 부당하게 살면 안 된다는 것.

그것만 믿자.

* * *

다음날 아침.

경술대학교 미화 반장에게 연락했다.

"안녕하십니까. 반장님 휴먼매니저 대표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네. 방금 클린빌딩 대표님께 전화 받았습니다. 계약 양도 받으셨다고요, 목소리가 굉장히 젊으시네요."

"오늘 중으로 일정 잡고 방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괜찮으시죠?"

"네. 안전히 오십시오. 대표님."

내가 말했잖아요? 벤츠로 안 끝날 거라고.

현준이가 아침 일찍 사무실에 들렀다. 현준이와 이렇다 할 대화도 나누지 않고 나는 그를 차에 태우고 함께 경술 대학교로 향했다.

"이제 알아서 조수석에 타는구나?"

"네?"

"기억 안 나냐? 너랑 첫날에 외근 나갔을 때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타던 놈이."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아서라. 지금도 부족하니까. 일을 관뒀으면 노트북은 워킹휴먼에 반납했어야지. 응?"

"넵! 바로 반납하겠습니다."

미화 반장을 만나기 전에 주차장에 차를 정차한 뒤 그의 근로계약서를 먼저 살폈다.

미화 반장의 나이는 54.

정석환 반장이었다.

경력은 대학교, 빌딩, 고등학교, 등 오랜 기간 청소를 업으로 삼고 있었다.

미화 반장에게 산출된 급여는 최저시급에 월 직급 및 관리수당 20만원이 더 들어가서 약 210만 원 정도 됐다.

주차장에서 그에게 전화했고, 그를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반장이 얘기한 곳에 도착해보니 사다리를 타고 연신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반장의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청소는 엄연히 조경이 아니다.

조경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관리 인력이 따로 있음에도 대부분의 관공서나 대학교는 청소 용역에 조경 일을 포함시켜 버린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어떻게든 일감을 더 얹어주고 싶은 심정이겠거니.

정원 청소라는 명목으로 계약서에 명시된 부분은 제초, 가지치기, 잔디깎기, 땟밥, 병충해 방지 등이다. 이게 조경이지 청소야?

다행히 이 부분은 경술대학교와의 계약서에 없는 사항이었다. 나는 미화 반장에게 말했다.

"반장님."

"네?"

미화 반장이 사다리를 타며 가지치기하다 나를 내려다봤다.

"아이고 대표님이십니까!"

"네. 내려오시죠. 얘기 좀 하시게요."

"네."

미화 반장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고, 그에게 캔 음료 하나를 건넨 뒤 함께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꿀꺽꿀꺽

"목이 많이 타셨나 봐요."

"요즘 날이 갑자기 더워지니까요. 하아. 조경일이 워낙에 많은 시기라. 만만치가 않네요."

그리고 궁금한 것, 왜 계약서에도 없는 내용을 하고 있었는지.

"이 부분은 구두계약으로 정해진 부분입니까?"

"네?"

"조경이요. 청소 용역에 없는 부분인데."

"아.. 뭐 상부 지시가 있으니까 하는 거죠. 허허."

"이제 하지 마시죠."

"...?"

"엄연히 조경 관리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청소는 청소만 하면 될 일이지.. 조경까지 관리할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조경회사도 먹고 살아야죠?"

"허허.. 그런데 대표님."

"네?"

"이게 저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계약서에 내용이 있든 없든 어쨌든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죠. 사람이 정 없이 계약서대로만 살면.. 안 되는 거죠.."

"반장님."

어르신들은 간혹 고집이 있다. 그 고집을 꺾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지

"...?"

"죄송하지만, 그거 착취당하고 있는 거예요."

"네?"

미화 반장이 나를 보며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제가 반장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고 인생 경험은 부족하지만..그저 위에서 시킨다고 이것저것 다 해줘 버리면.. 반장님이 받을 수 있는 급여도 그만큼 줄어드는 거고, 반장님 밑에 있는 사원들이 고생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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