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70/200)

* * *

연출 팀이 아파트로 찾아왔다. 그래봐야 1번 카메라 명석이, PD 애라씨, 그리고 작가. 어차피 한번 훑어보고 스토리보드 작성 정도로 오는 거라 부담 없는 차림이었다.

명석이와 흡연실에서 담배를 폈다. 명석이는 이미 이 아파트의 극성인 부분에 들은 바. 다소 걱정되는 듯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대씩 피고 각자의 일을 위해 흩어졌다.

연출팀이 도착한 곳은 아파트 휴게실.

그들이 아파트 휴게실을 보며 감탄을 해댔다.

일반 가정집처럼 예쁘게 꾸며진 구조를 보며 본인들도 이곳에서 쉬고 경비 업무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

아무래도 정주임의 섬세한 손길이 묻은 터라 이곳저곳에 그 흔적들이 여성스러운 면도 많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경비 초소.

예전에는 에어컨과 냉난방기가 없었고, 용적률 탓에 구청허가 까지 몇 달이 걸려 어려웠지만, 이제 법이 바뀌어 일 이주 이내에 신청 허가가 떨어졌다.

그래서 바로 설치해버렸다.

정길완 반장과 애라씨가 사전 인터뷰했다.

정길완 반장이 머쓱해 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책 한권을 펼쳐 꺼냈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좋은 일들과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일들을 작성하는 공책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저 공책의 전말을 알지. 긍정적인 내용이 담긴 공책은 달랑 반 권 분량도 안 되지만 갑질 분량은 공책 10권 분량이니까.

그래도 정길완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경비원들의 일상에 대해서 인터뷰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경비 초소가 다소 시끌벅적한 탓에 주민들 몇몇 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정길완 반장이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초소에 뭉쳐있는 경비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뭉쳐 있지들 말고, 가서 일들 하지.”

“...”

“얼른. 주민 분들이 보기 안 좋으니까.”

“네.”

경비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려는 찰나.

한 여자아이가 소쿠리에 사탕을 가득 담아 들어왔다.

경비원들이 아무 말 없이 사탕 하나씩을 짚었다.

그리고 여자아이를 필두로 주민들이 커피와 차를 들고 촬영 스텝들과 경비원들에게 대접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전에 기획된 연출이 아니었다.

정길완 반장은 갑자기 등장한 소수 주민들의 물량 공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머쓱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그리고 일전에 정길완 반장에게 사탕을 건넨 한 아이의 엄마가 그에게 따듯한 차 한 잔을 건넸다.

따듯한 차 한 잔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주민들이 웃으며 건네는 인사 한 마디는 70세 노인의 눈가를 촉촉해지게 하고 있었다.

잔뜩 경직됐던 내 몸도 소수 주민들의 등장에 긴장이 풀렸다.

방송은 조작이 아닌 리얼리티로 갈수가 있었다.

이제 내가 이 아파트에서 할 일은 끝났다.

그리고 방송 촬영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홀로 초소를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묵묵히 걷던 중에 휴먼매니저의 시스템 창이 발현됐다.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 자아실현의 욕구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김도일님은 인간의 기본 욕구 퀘스트를 모두 완료 하셨습니다.]

[완료 보상 1000UNI를 입금합니다.]

하아.

자아실현의 욕구를 드디어 달성했고 기본욕구 퀘스트를 모두 끝냈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투룸 월세부터 아파트까지.

그리고 수많은 일들.

그 중에서 이번 퀘스트가 가장 힘들었고 애를 많이 먹었다.

다섯 번째 퀘스트 완료라는 휴먼매니저 시스템을 보며 순간 다리가 풀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완료보상으로 입금된 1000UNI로 로또 스킬을 레벨업 했다.

[로또스킬을 레벨업 합니다.]

「로또 LV6」

「로또 LV7 상승」

「새로운 로또 스킬이 생성됩니다.」

···

「로또 LV7 SKILL 독식」

[현재 스킬을 발현하시겠습니까?]

로또 독식...?

아직 삼천삼백 남았는데.

「로또 LV7 SKILL 독식」

독식.

쉽게 말해 혼자서 다 해 먹는 다는 뜻.

로또 1등 금액을 모조리 내가 독식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이번 1010회차 1등 총금액은 250억 원. 10명이 당첨됐고 한 명당 20억을 가져갔다.

1011회차를 만약 독식을 한다면 200억 원 이상을 혼자 먹을 수 있었다.

내 잔머리를 굴리자면 만약에 독식을 포기한다면?

이월이 되는 건가?

초창기에는 로또 이월이 간혹 있었다.

하나의 조합에 이천 원씩 했기 때문에 판매 수량도 적고 대중화가 안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

하지만 갈수록 로또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로또 이월 확률은 천문학적인 숫자다.

현재 로또 역사에서 한 사람이 가져간 최대 당첨금은 약 사백억 원, 최저는 4억이다.

만약 내가 이번 1011회차에 1등을 독식한다고 하더라도 최대 당첨금의 기록은 깨지 못한다.

현재 로또 이월 제한은 총 2회.

만약에 1011회차에서 1등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금액이 이월돼서 1012회차로 넘어가고 1012회차도 이월되면 마지막 1013회차에서 결판이 난다.

그러면 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판매량이 늘어나는 만큼..

내가 독식할 수 있는 금액도 늘어난다.

그때 휴먼매니저의 시스템이 발현됐다.

「YES」

그렇다면 이월이다.

* * *

오랜만에 할 일 없이 거실 소파에 누워서 TV를 켰다.

TV에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동네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돼지 복권방에서 줄줄이 당첨자가 나왔을 때 애라씨 방송국에서 촬영을 왔었다.

기분이 묘했다.

돼지 복권방 촬영 당시 애라씨가 연출했고 명석이가 카메라를 들었는데, 지금 GN아파트에서도 그들이 촬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로또에 당첨된 김씨 아저씨는 돼지 복권방 옆에서 여전히 찌개 집을 하고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로또 1등 당첨번호를 건넸던 김씨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솔직히 한 사람의 인생에 내가 개입을 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김씨 아저씨는 가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인터뷰가 인상적.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겨우 살림살이 나아질 때 또 고꾸라졌습니다. 이번 기회를 하늘이 주신 거라 믿고, 잘 가꿔 나갈 것입니다.

김씨 아저씨의 표정이 예전보다 많이 환해졌다. 장사도 곧잘 되는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다행이네."

-딸도 몇 년간 말을 못 했는데, 곧 말을 너무 잘하게 됐습니다.

김씨 아저씨는 옆에 서 있는 딸을 보며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며 채근했다.

-감사합니다.

정확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누구에게 감사한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김씨 아저씨의 행동을 보고 배운 듯했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특유의 세레머니를 했다.

-쉿.

카메라는 돼지 복권방으로 향했고, 그곳은 여전히 로또를 구매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전국에서 로또 판매율이 가장 높은 만큼 최근에도 2등 당첨자가 나왔다고 한다.

로또를 사기 위해 줄 선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최부장.

분명히 최부장이었다.

크크크크.

혼자서 배 잡고 웃었다. TV 속에 보이는 최부장은 로또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최부장에게 다가가자 최부장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짓궂은 애라씨가 그에게 질문했다.

"돼지복권방은 자주 오시나 봐요?"

"업무차 잠시 들른 김에 사려고 방문했습니다."

업무차는 개뿔. 저 동네는 물류센터가 없다.

"1등 당첨되시면 앞으로 뭐할 생각이세요?"

"쉬어야죠. 일도 그만두고, 아파트 대출금도 갚고, 뭐 있겠습니까. 다 똑같죠."

몇 달 만에 최부장의 얼굴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히 예전보다 얼굴은 좋아진 건 맞다.

황달기가 돌았던 피부색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전화나 해볼까 싶었다.

"부장님."

-어이. 이 새끼 이거. 퇴사하면 끝이야?

"흐흐.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요."

-무슨 일이야? 전화 한 통도 없더니..

"부장님 얼굴 보고 전화 드려요."

-뭐?

"돼지복권방에서 인터뷰했잖아요. 지금 그거 보고 있어요. 아 혼자서 배 잡고 웃었다니까요."

-아.. 그 새끼들 진짜. 아니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나한테 카메라를 들이대냐고..하.. 쪽팔리게. 내 얼굴은 잘 뽑혔냐?

"그럼요. 햇살에 비쳐서 아주 뽀샤시 합니다요."

-너 때문이야 새끼야. 너 때문에.

"아. 또 왜요."

-회사 다 망가졌다고. 고현준이도 도망가 버리고, 오대리는 지금 내 앞에서 운다 울어.

"오대리는 아직도 다니나 봐요."

-먹고 살아야지. 바쁘냐? 놀러 올래?

"거기 취업시킬 생각이면 사양하겠습니다."

-밥이나 한 끼 먹자. 우리가 남이냐?

"넵!"

* * *

최부장과 나는 오랜만에 회사 근처의 참치 집에서 만났다.

이제 휴먼매니저 회사 대표로서 최부장을 대접해주고 싶었다.

"이야. 도일아. 너 얼굴이 훤해졌다?"

"흐흐. 안녕하십니까. 최부장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앉아 앉어.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났지?"

"꽤 됐죠."

"넌 내 생각 안 나든? 내가 회사생활 하면서 너 같은 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냐?"

"다들 저 같을 순 없죠."

"어휴. 요즘 뭐해? 사업한다며?"

"말도 마세요."

"왜?"

"사업체 하나 인수 했습니다."

"뭐? 무슨 사업체?"

"경비업체요. 그런데 빚더미에요. 못 받은 돈이 지금 1억이 넘으니까."

"너 또라이야?"

"흐흐."

"아이고. 너 무슨 생각으로.."

"그러게 말입니다. 돈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참."

"어디야? 무슨 업체에서 돈 못 받은 거야?"

"뭐 건물 청소 용역도 몇 개 있고, 대학교도 몇 개 있고."

"흠."

"왜요?"

"건물 청소야 명의 바뀌면 받아내기 힘들고.. 대학교는 의외인데? 파산하지 않는 이상은.."

"에이 설마요."

"그런 일 많아 인마. 건물도 짓다가 파산해서 공사금 못 받는 게 허다한데."

"그런데 대학도 파산해요?"

"당연한 거 아니냐? 학생 없으면 파산하는 거지 뭐. 그런데 어느 학교야?"

"지금 제일 많이 잡힌 곳이 경술 대학교라고 있는데요. 거기서는 4천만 원이요."

"이야.. 너 진짜."

"저는 찾아가서 멱살 잡고 내 돈 달라고 따지려고 했는데요."

"아이고. 참. 그러면 아이고 드려야지요 하면서 잘도 주겠다."

최부장과 담배를 한 대 태우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부장님."

"왜?"

"저희가 워킹휴먼에서 아주 제대로 날려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제가 사업 외연을 확장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네요. 아파트 단지 하나 맡고 있긴 한데 인건비도 안 나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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