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말에 모든 동대표와 회장이 나를 바라봤다.
"경비 대표가 아니라 입주민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아파트 관리 규약에 갑질 근절이라는 규약을 넣는 건 어떻습니까."
"..."
"관리사무소 직원 뿐만 아니라 저희 아파트 경비원들 미화원들 전부요. 이번 계기로 확실히 변화하는 게 맞다고 보거든요."
내 말에 관리소장이 벌떡 일어났다. 아마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이런 규약을 원했을 것이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입주민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결정 일까.
그리고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갑질 근절 규약. 뭐 어려운 일 아닌데, 만약에 촬영이 나온다면 그때 우리 입주민들이 갑질 근절이라는 주제로 회의 하는 모습을 좀 보여주는 게 어떨까 싶은데."
회장이라는 인간은 어떻게든 튀고 싶은가 보다.
"문제없죠."
이번 일은 확정이다.
나는 이 소식을 얼른 정길완 반장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정길완 반장은 경비원들의 저녁 점호를 끝내고 순찰 중이었다.
"반장님!"
단지를 돌아다니며 아파트 주차장 순찰을 하던 정길완 반장이 뒤돌아 나를 보며 웃었다.
"아이고 대표님!"
나는 그에게 급히 달려갔고, 조만간 있을 계획에 대해 말해줬다.
정길완 반장의 표정이 희색만면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허허."
"이게 정말 실현된다면 앞으로 갑질이나 부당한 일들 따위는 시키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연기를 하더라도 착한 짓 몇 번 연습해보면 좀 습관이 되지 않겠어요? 크크 그리고 갑질 방지 규약도 생길 테니까 앞으로는 정말 맘 놓으셔도 됩니다."
"대표님."
"네?"
정길완 반장이 이내 호주머니에 돌돌 말아 감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최근에 입주민 중에 한 아이가 제게 사탕을 주더라고요. 제가 이가 약해서 사탕은 먹질 못하니.. 대표님께 드리고 싶어서요."
하긴..
정길완 반장님은 내 할아버지뻘이다. 손주 같아 보이겠지.
사탕을 입에 물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 이 아파트도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류센터 200명보다는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내가 800세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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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
소문은 급속도로 퍼졌고 1층 엘리베이터 앞 공지문에 종이 한 장이 걸렸다.
-아파트 관리 규약
-경비원 갑질 근절 안내문.
나는 기분 좋게 사진 한 장을 찍어 올렸고 인별그램에 업로드 했다.
그리고 애라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 여보세요."
-도일씨. 이거 진짜 되는 거 맞죠?
"그럼요. 저희 아파트 입주민들 전부 동의 얻었습니다."
-제가 맡기로 했으니까. 이거 확실해야 돼. 거기 갑질 아파트로 엄청 유명하잖아요. 강제로 쥐어 짜내더라도 확실히 하던가.
"확실하다니까요."
-그래. 알았어요. 일단 메인테마는 갑질 아파트의 변화로 결정했으니까 내일 내가 한번 들릴게.
이번 촬영은 애라씨가 맡기로 했다. 그렇다면 명석이가 촬영 팀으로 오는 거겠지? 크크. 생각만 해도 재밌을 것 같아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렸다.
오늘은 분리수거 날이라 경비원들이 모두 수거 장에 모여서 정리를 도맡아하고 있었다.
입주민들이 버린 캔류를 찌그러뜨리고, 박스를 펴고, 접고, 플라스틱 분리 배출하는 등 잡일이 많았다.
그런데 정길완 반장의 표정이 그리 좋지많은 않았다.
계속해서 누군가를 노려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고, 한숨을 내쉬거나 했다.
일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 경비를 보며 말했다.
"박씨!"
"..."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플라스틱에 붙은 비닐은 뜯어야 된다니까. 수거를 안 해 간다고."
"네."
박씨는 들은 채 만 체하는 둥 일을 계속했고, 정길완이 페트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 기세는 금방이라도 쌍욕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
나는 급히 정길완 반장님을 끌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다름 아니라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한 달 전에 새로 들어온 경비가 좀 문제 있는 것 같아서요..따로 면담을 하려고 다가가고 몇 번씩이나 다그쳐 봐도 통 말을 듣지 않네요."
정길완 반장은 며칠 전 휴먼매니저 사무실에 들렀고 경비원 중 한명의 근로계약서를 살폈다.
아마 그 사람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저도 정주임에게 들어서 그분 근로계약서를 살펴보긴 했는데.. 회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정착을 잘 못 하는 것 같더라고요. 단순히 업무 태만이 문제인가요?"
"..."
"말씀해보세요. 괜찮아요."
"절도가 있습니다."
"네?"
"큰일은 아니고. 휴게실에 있는 부식품이 지속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뭐가 사라지나요?"
"커피나, 컵, 빵 이런 것들인데 박씨를 지목하는 건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하네요. 이번 일은 제 선에서 정리해보겠습니다."
"잠시만요."
나는 잠시 생각을 해야만 했다. 박 씨를 자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파견회사에서 경비원을 파견할 때 경찰서에 신고하게 돼 있다.
성범죄 및 폭력 전과 여부를 확인하는 것인데, 최근 5년 이내에 전과 경력이 있다면 취업이 불가능하다.
나는 경비업체 대표로서 경찰서에 문의하여 박씨의 전과 기록을 문의했으나 전무했다.
최씨 어르신을 불러들였다.
최씨 어르신은 박씨에 대해 굉장히 안 좋은 말을 해댔다.
숙직실에 있는 커피나 물이 사라진다는 것.
엄연히 그건 절도라며 입에 침을 튀기며 말했다.
다른 경비원을 불러들여 박씨에 대해 물었으나 다들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해댔다.
오랜만에 머리가 아주 따끈따끈해졌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었다. 물류센터에서 근무할 당시 한 아줌마가 억울하게 앱패드 절도범으로 몰렸던 경우였다.
그때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복잡하게만 흘러갔다.
경비원들이 박씨 어르신을 지목하여 절도에 관하여 입을 맞춘 듯 꺼내는데, 이건 내가 그들의 말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직접 목격하여 다그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휴우.
박씨 근로계약서를 통해 그의 주소지를 확인했다.
강북 인근에 사는 분이었는데 옛날에 내가 살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이 어딘지 알았다.
달동네에서도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있는 곳.
퇴근길이 됐을 때 나는 박씨 어르신을 태워서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이것저것 할 얘기도 있었고, 정말 박씨 어르신이 물건을 훔쳤다면 왜 가져갔는지 묻고 싶었다.
"솔직히 얘기해주셔도 좋고, 거짓말하셔도 좋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겠습니다."
박씨 어르신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는지 창밖을 보며 입을 닫고 있었다.
"가져간 건 맞지만 훔쳐 간 것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의 말이 이해되질 않았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말과 비슷하다고 할까.
"며칠 전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 정길완 반장하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게 할당된 부식비를 먹지 않고 챙겨가는 것뿐입니다. 그게 가져간 건 맞지만 훔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왜 그걸 가져가는 거죠?"
"안 사람도 줄 겸해서 가져갑니다. 커피를 좋아해서요."
"다른 경비원분들이 불만을 품고 있는 건 아시죠?"
"네. 제가 고집을 피운 건 맞습니다. 제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챙겨갈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그런데 아깝잖아요. 괜히 죄송합니다."
"하아.."
솔직히 이런 사소한 일로 어르신들 사이에서 티격태격한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정길완 반장에게 그 자리에서 전화했다.
"반장님."
-네. 대표님
"이번에 저희 부식비 나온 거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무실 정주임한테 부탁해서 두 배로 더 올려달라고 하세요."
-..갑자기요?
"그리고 커피는 인당 한 통씩입니다. 서로 뺏어 먹지도 말고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마세요. 각자 독식하시라고요. 그리고 박스에 이름 써놓고 드세요.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정반장님과 통화를 끝내자 박씨 어르신이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이 커피를 좋아하시면 많이 가져가셔야겠네. 그죠?"
"..."
"사모님 좋으시겠네. 앞으로 커피도 원 없이 드시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어르신을 이해한다. 어릴 때 나도 그랬으니까.
학교에 햄버거가 나오면 제때 먹지 않고 가방에 싸서 동생과 나눠 먹었다.
빵도, 우유도.
그 마음이 아주 잘 느껴졌다.
그리고 간혹 어르신들이 이런 사소한 일을 문제로 삼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나도 비슷한 처지면 그럴 것 같았다.
사는 게 힘드니까.
박씨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대학로를 지났다. 그리고 나는 지영씨에게 전화했다.
"지영씨이"
-흐흐. 뭐 하세요.
"대학로요. 어르신 데려다주고 대학로 지나는 길이요."
-어? 그런데 안 내리고 그냥 가시는 길이에요?
"그죠. 제가 갑자기 연락하고 나오라고 하면 짜증 내실 거잖아요. 화장도 해야 하고 옷도 차려입어야 하고, 그거 흔한 클리쉐 아닌가. 그래서 그냥 가버리려고요."
-아.. 그러셨구나. 아쉽지만 저는 대학로 카페에 있거든요.
"사실 저도 주차하는 중이요."
얼른 차를 돌렸다.
* * *
오랜만에 지영씨를 만났다. 이것저것 할 말도 많았고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도 말했다.
지영씨는 현재 취업을 준비하는 것보다 사업을 구상하고 싶다고 했다.
35년간 부모님 집에서 얹혀살다 보니 생활비 나가는 것도 없어 돈을 많이 모아놨다고 한다.
지영씨는 예전부터 심리센터를 직접 차려보고 싶다고 했다.
아동 상대로.
"요즘 그런 프로그램 인기 많잖아요. 은쪽같은 애새끼? 오운영 박사님 나오는 거."
"그죠. 선생님 강의도 몇 번 들어 봤는데 정말 훌륭하신 분이죠. 그런데 도일씨. 애라언니한테 들었어요. 방송 촬영하신다면서요?"
"네. 일이 그렇게 됐네요."
"..."
지영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꼭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건가요? 갑질 아파트로 유명한 건 알지만 굳이 연기까지 해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괜히 도일씨한테 피해가 갈 것 같아서..."
"지영씨."
"네?"
"제가 예전에 물류센터에서 일했던 거 알죠?"
"거기서 고생 많이 하신 것도 알죠."
"물류센터에서 제가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면서요.. 아무리 지랄 맞은 무리들 일지라도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분위기상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고. 괜히 나섰다가 시선의식 받기 싫은 거고. 그래서 그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저희 아파트가 갑질로 유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고 보거든요. 저 믿어보세요. 분명히 나올 겁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아.."
"그리고 지영씨. 꼭 아동상대로 해야 하나요?"
"네?"
"제가 나름 사업가로서 말씀 드리자면. 심리 상담이 정말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타겟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누구..요?"
"파견 근로자들이요. 이거 제가 한번 국가사업으로 뚫어 볼 수도 있어요. 정신적으로 고된 일을 하시는 분들 있잖아요. 콜센터나 경비원이나 백화점이나 기타 서비스업. 그런 분들 위주로 할인 혜택 해주는 거고 상담도 해주는 거죠."
"그런데 국가사업은 뭐죠?"
"사실 그건 제 능력 밖이에요. 뻔질나니까 해본 소리에요. 흐흐."
"가능도 할 것 같긴 한데."
"네?"
"잘하면 가능할 것 같아요. 국가지원창업센터에 문의해서 제대로 포인트 잡고 사업계획서 제출하고 뽑히게 되면 충분히 괜찮을 것 같은데요?"
"오. 역시. 저는 잔머리만 있고 기능은 없는데, 지영씨는 역시 다르다니까."
"고마워요. 도일씨."
"흐흐. 커피 사요."
지영씨 정도의 재능이면 성인 상대로 충분히 심리센터를 오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사업이 커진다면 지영씨 회사와 협약을 해서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물론 회사 지원으로.
그렇다면 지영씨 회사가 나날이 커지겠지.
흐흐.
장기적인 계획이라 지영씨도 바로 실행에 옮기진 못하겠지만 지영씨의 추진력을 봐서는 몇 달 가지 않아서 사업을 꾸릴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나도 멈출 순 없지.
지영씨의 회사에 내 직원이 상담을 받으려면 내 사업도 커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