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생각은 못했다.
전국 최초로 경비실 휴게실이 아파트?
왜 나는 이 전국최초라는 말을 이용하지 못했을까.
"야."
"네!"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니까."
"뭐가요?"
"그 특별한 싸가지 말이야. 너는 꽤 사업수완이 있는 것 같은데?"
"일이나 보세요."
정주임이 화가 나서 한 얘기겠지만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전국 최초 경비원 휴게실이 아파트라는 건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고 우리 회사가 유명해 질수 있는 기회였다.
사업은 일단 유명해져야 하는 법.
그리고 나는 명석이를 만날 채비를 했다.
내 유일한 방송국 인맥을 만나기 위해.
800세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거다.
애라씨는 궁금한 이야기T나 세상에 저런 일이 같은 현장르포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그것도 공중파.
저번에 돼지 복권방에서 줄줄이 당첨자가 나왔을 때도 애라씨는 그곳을 촬영했다.
이슈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는 애라씨가 이런 떡밥을 물지 않을 수 없겠지.
사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명해지고 보는 법.
나는 명석이이게 전화했다.
"명석아."
-어이. 도일아. 오랜만이네.
"애라씨는 잘 계시고?"
-갑자기?
"예전에 돼지복권방 촬영한 거는 잘 빠졌대? TV에도 소식이 없네."
-조만간 방송될 것 같기도 한데..너 지금 뭐 하냐?
"일하고 있어. 너는?"
-나 지금 강남에서 촬영하고 있거든?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이따가 전화 줄게.
명석이는 바닥에서부터 촬영 보조 막내로 시작해 스텝으로 근무 중이다.
처음에는 파견근무 막내로 스텝 일을 하다가 어찌 잘 풀려서 방송국 소속 계약직으로 근무 중이라고 들었다.
애라씨가 전담하는 방송에서 스텝으로 근무하다가 눈이 맞은 케이스.
아무래도 촬영을 전담하다 보니 PD하고 긴밀한 관계가 있었겠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명석이로부터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야 촬영 끝났으니까 내가 너희 집으로 넘어갈게.
"안 와도 되는데. 내가 갈게."
-아냐. 아냐. 와이프한테 방금 얘기했어. 허락 맡았어. 현장 마무리 하고 미팅 끝내면 한 시간 좀 넘을 것 같거든? 그런데 무슨 일이야?"
"너 말고 애라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거든."
-뭐?
"방송 떡밥"
명석이는 틈만 나면 애라씨 곁을 벗어나려 애쓴다.
결국 방송 떡밥을 물고 명석이와 애라씨가 집으로 방문했다.
애라씨는 처음으로 오는 집들이라 에스프레소 머신기 선물을 사 왔다.
"이야. 집 좋네요. 도일씨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요. 저번에 명석이가 집들이 선물로 휴지 하나 사줬는데."
"휴지?"
애라씨가 명석이를 바라봤고, 명석이가 머쓱해했다.
간단히 음식을 시키고 난 뒤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임신 시도를 하는데 잘 안된다느니, 명석이가 생각보다 힘이 없다느니, 이런 저런 얘기를 꺼내다가 나는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어 본론을 꺼냈다.
"애라씨. 저희 아파트 경비원들 보셨죠?"
"그죠. 아까 입구에서도 뵙고, 올라오는 길에도 한 번 뵙고."
"저희 아파트 경비원 휴게실이 어딘지 아세요?"
"네?"
"아파트요."
아마 애라씨가 많이 놀랄 거라고 봤다. 그런데.
"아파트요? 경비 휴게실이 아파트라고요?"
"네. 106동 1층입니다."
"아.. 그게 떡밥?"
"네. 떡밥이요. 방송 떡밥. 괜찮죠?"
"..."
애라씨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명석이를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짓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다.
"경비원들이 아파트에서 쉬든 호텔에서 쉬든 그게 무슨 상관이.."
"애라씨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요. 이거 아주 특급 방송 떡밥이라고요. 기사에도 날 만한 소재인데."
"...요즘 시청자들은 자극적인 걸 좋아해서요. 이런 휴머니즘 다큐는 시청률 안 나와서 전부 간판 내리는 중인데.. 미안하지만 결재부터 막힐 거 같거든요?"
"아..정말요?"
"네. 일단은 제가 한번 물어는 보긴 할 텐데. 아마 힘들 수도 있어요. 차라리 경비원들이 먹방을 찍는 게 더 이슈죠."
"아..먹방.."
그때 명석이가 번뜩인 듯 말했다.
"차라리 먹방을 찍어. 그게 더 자극적이고 유명해질걸?"
"야."
"어?"
"밥 식는다. 밥 먹어."
애라씨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여 실망적.
하긴 경비원들 입장에서는 큰 이슈가 될 만한 일이지만 공중파 방송을 탈 정도로 자극적이지는 않지.
게다가 내 선행을 돈 벌이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게 오글거리긴 했다.
됐다 말자.
그때 애라씨의 휴대폰이 울렸고,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PD라고 말하며 지금 한번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어. 김PD. 그래. 촬영은 잘 끝났지. 그런데 이번에 내가 건수 하나 잡았는데..별건 아니고.. 경비원 휴게실을 아파트 단지에서 1층으로 내줬나 보더라고.. 응. 그치. 괜찮을까? 잘만 솎아내면 좋은 장면들 좀 뽑힐 것도 같은데... 그래. 알았어..이따 전화줘."
애라씨가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지원해준 게 아니라 제 소유 자가에요. 제가 경비 대표거든요."
"그래서요?"
"네?"
"너무 다분히 의도적이고 사업적으로 보이잖아요.맛집 프로도 아니고.. 만약에 방송 들어가면 도일씨는 방송 못 나와요. 방송을 통해서 회사 홍보하려는 건 알겠는데, 그건 불가능한 거 알죠?"
"..."
사실 애라씨의 말이 맞다. 방통위에 걸리면 애라씨만 경위서 작성하고 징계 먹는다.
크흠.
그러면 작전을 바꿔야지.
"애라씨. 차라리 이렇게 가죠. 제가 이번 일을 방송에 내보내고 싶은 건 그래도 이런 아파트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요?"
"GN아파트 입주민들이 전부 천사예요. 경비원들한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원도 엄청 많이 해주는 정도? 그렇게 가면 좀 괜찮지 않을까요? 요즘 경비원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으니까."
"그건 조작 아닌가요?"
"제가 알기론 버라이어티 예능도 대본 있는 거로 아는데요. 크흠."
"..."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제가 설득해 볼게요. 한 번만 찔러봐 줘요. 네? 촬영 날에 입주민들이 경비원에게 대하는 모습들이 진심으로 담기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주된 포인트는 경비 휴게실, 그리고 그 주위의 이웃들과 경비원들 이야기로 풀고 나가는 거죠."
"알았어요. 일단 구체적으로 입주민들이 어떻게 경비원을 대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 내용 정리해서 보내줘 봐요. 검토해보고 알려드릴게요."
"넵!"
나는 이게 통할 거라고 봤다. GN아파트처럼 네임드가 있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가 방송된다면 영향력 정도는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내 회사 이력도 하나 생기는 거고.
흐흐.
하지만 문제는 입주민들.
그간 엄청난 갑질로 내 직원을 못살게 굴었지만 이번 기회로 한번 싹 뜯어고쳐 버리고 싶었다.
입주민들을 설득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고 봤다. 아파트 값이 조금이라도 오른다면 기를 쓰고 달려드는 군상들이기 때문에 적당히 이 부분만 건드려 준다면 찬성하고 먼저 달려들 거라고 봤다.
늦은 밤 애라씨와 명석이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역시나 관리사무소에서 혼자서 깡소주를 마시고 있는 소장을 발견했다.
어차피 경비업체 대표는 아파트 관리 주체인 관리사무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영업 방법의 하나다.
"어이!"
관리사무소장이 나를 발견하고 화색이 돌았다.. 최근 입주민대표 회장과 갈등이 있었지만 요 며칠 담판을 지었다고 한다.
"표정이 아주 좋아 지셨네요? 회장은 뭐래요?"
"내가 저번에 혼자서 사무실에서 술 처먹을 때 기억나죠?"
"지금도 마시고 계신거 보니까 일이 잘 안 풀렸나 보네요?"
"지금은 축하주로 먹지."
"네?"
"회장하고 담판 지었슴다. 아파트 한번 제대로 살려보자고."
"아..그랬더니요?"
"어쨌든 회장도 이제 남은 1년 임기 끝나면 재선하고 싶어 하니까.. 잘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잘됐죠. 뭐.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관리소장이 내게 꾸벅 인사하려는 걸 말렸다.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진득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요."
"네?"
"단지 내 흡연 공간 만드는 거 회장님도 허락하셨고, 이제 입주민들 상대로 동의서만 받아내면 되거든요. 흐흐."
"와. 그러면 저희 아파트에 흡연 구역이 따로 생기는 겁니까?"
"그죠. 이게 아파트 단지 내 흡연 때문에 주민들끼리 좀 다툼도 잦은 편이라 서요. 동의서만 받아내면 구청에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아. 그렇게 해야죠. 막말로 흡연자들이 내는 세금이 얼마입니까. 이정도 흡연권은 지원해줘야 마땅하죠."
"흐흐. 담배나 한 대 피시죠."
관리소장과 나는 단지 내 구석으로 향했고 소장에게 담배를 건네받았다.
"요즘 어때요? 경비원들 관리는 잘 돼요?"
"정길완 반장님께서 워낙에 철두철미하셔서요. 제가 맘 놓고 있습니다."
"정 반장님이 그래도 여기서 가장 오랜 시간 근무하셨으니까. 아무래도 경험치가 훨씬 높죠. 참을성도 대단하신 분이고. 아참. 이번에 경비 휴게실 있지 않습니까."
"네."
"그거 대표님 개인 소유 맞죠?"
"그렇죠. 전월세도 아니고 제가 샀는데요. 또 무슨 문제 있나요?"
"아뇨. 신기해서. 흐흐.. 젊은 양반이 뭔 돈이 그렇게 많기에 아파트를 두 채씩이나 갖고 있으까 싶죠. 주식해요? 비트코인?"
"둘 다요."
관리소장이 박수를 치며 화답했다.
"이야. 역시 대표님 성질 보고 알았다니까. 대표님 정도의 깜냥은 돼야 돈은 벌지. 크흠."
소장과 이리저리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계획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소장님. 우리 아파트 방송 한번 나가보죠."
"네?"
"제가 방송국에 아는 지인이 있거든요. 경력도 있는 PD라 나름대로 힘도 있고. 제가 이번에 경비휴게실 만들면서 그래도 이런 선행은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될까요?"
"소장님도 회장님하고 이제 좀 사이가 좋아졌으니까.. 설득만 잘해본다면 입주민들 동의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서로 윈윈이잖아요? 아파트 브랜드 가치 올라가는 거고 기사도 날 게 분명하고."
"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으면 GN본사하고 협약을 맺어도 되고.. 뭐 일이야 얼마든지 가지 칠 수 있으니까."
"그렇죠. 좋은 아이디어 같긴 한데.."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뭐죠?"
"저희 입주민들이 천사로 변해야 돼요. 세상에 저런 일이에 나올 정도로 엄청나게 착한 천사로."
"하아. 그건 좀 힘든데."
"될 겁니다. 저 믿어보시죠."
"음..그러면 일단 내일 안 그래도 저희 관리규약이 몇 가지 변경되는 점이 있어서 입주자대표 회의 있거든요. 안건은 내일 한번 올려보죠."
"넵."
* * *
다음 날
입주자대표회의에 나는 경비대표라는 입장으로 참석했다.
최근 들어 아파트값이 하락한 이유와 관리 규약을 변경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리고 안건들이 마무리되고 관리소장이 회장의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이번에 경비업체가 바뀌고 난 이후부터 경비원분들의 복지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는 부분 잘 아실 겁니다."
"잘 알죠. 특히 새벽에 그 지하 주차장은 너무 심했죠. 그래도 대표님께서 잘 관리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전과장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 촬영을 한번 해볼까 합니다."
"...?"
"아시다시피 다른 아파트 같은 경우 휴게실이 화장실인 곳도 있고, 지하주차장이야 뭐 흔하고, 그래서 이번에 저희가 전국 최초로 아파트 휴게실을 내줬다는 취지도 있고.."
"..."
"여러분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촬영을 하는 건 경비들 위주지만 더 중요한건 아파트 단지 입주민들이 경비원들에게 착···착···착한.."
소장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나섰다.
"연기라도 착한 척 좀 해보는 게 어떨까요."
"...?"
"그간 매번 내 직원들에게 갑질만 했으니까.. 사실 연기라도 힘든 건 아는데, 그래도 방송에 나가려면 입주민들이 연기라도 해서 경비원분들에게 선한 모습 좀 보여주는 겁니다."
"크흠."
"다들 알잖아요? 본인들이 했던 갑질들. 이번 기회에 그거 전부 초기화시켜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거죠."
"휴. 대표님. 저희가 굳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할 일도 많고 귀찮아 죽겠는데."
"아파트값 떨어진다면서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요구는 아니잖아요? 그간 이 아파트에서 그만둔 경비들만 최근 1년간 50명이 넘어요."
"..."
"그 50명들이 막말로 피켓 들고 저희 아파트 앞에서 갑질 규탄 시위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니까요. 내 아파트는 내가 지키고 싶어요."
물론 구라다.
"어떻게 하실래요? 어찌 됐든 아파트에 손해 볼일 없잖아요? 우리 아파트가 최초로 경비 휴게실이 아파트란 것도 이점이 있고, 그런 선행들을 몇 가지 보여주면 충분히 가치가 올라갈 거라고 보는데요.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하죠. 대표님 말씀처럼 그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동대표들이 손을 들고 동의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주민들의 동의를 받는 일.
어차피 동대표가 동의했으면 주민들의 동의를 받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남았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