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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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떠나고 나는 홀로 엄마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이번 기회에 용돈을 좀 쥐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엄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주방에서 반찬을 꺼내 담고 있었다.

"엄마. 나도 이제 갈게."

"가만 있어봐. 반찬 좀 가져가."

"주면 고맙지. 그런데 엄마 요즘도 일 해?"

"간혹 해. 파출에서 불러주면 가는 거고, 일 없으면 못하는 거고."

"쉬엄쉬엄해. 무리하지 말고. 조만간 용돈 넣어 줄 테니까 그걸로 아줌마들이랑 놀러나 좀 다녀."

"필요 없으니까 네 적금이나 부어. 엄마 아직 생생하고 일할 나이니까."

"그래야 내 맘이 편해."

엄마가 내 옆에 다가와 옆구리를 한 대 찔렀다.

"여자 친구는 언제 소개 시켜 줄 거야?"

"하아.. 괜히 얘기 했네."

"결혼 전제로 만나는 거 맞지?"

"결혼 전에 동거 전제."

"뭐?"

"내가 엄마한테 허락받고 그러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동거 먼저 할 거야."

"..."

"같이 살아봐야 평생 살든가 판단하지. 안 그래 엄마?"

"그런데 딸 가진 부모들은 생각이 다를 거다. 부부는 로또야. 매일 틀리면서도 살아."

"..."

"그래도 기대하고 있을게 알았지?"

"들어가."

차에 올라탄 뒤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엄마한테 1등 번호를 주지 못하는 건, 엄마는 간혹 연애를 하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엄마를 못 믿는 게 아닌, 엄마의 돈을 보고 달려드는 남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달이 200만원씩 넣어주면 그래도 엄마가 혼자 사는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동생은 달랐다. 동생은 먹고살기 빠듯하고 조카도 이제 벌써 네 살이다. 곧 몇 년 뒷면 초등학교에 입학 할 나이고 이리저리 학원비도 많이 깨지겠지.

갓길에 차를 정차했다.

동생에게 로또 번호를 주고 싶었다.

「LV6 SKILL 로또 번호 선택가능」

[현재 스킬을 발현하시겠습니까?]

「YES」

[1011회차 로또 당첨번호를 선택하십시오.]

「11」「14」「15」「21」「28」「30」

[해당 번호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동생이 편의점에서 수동으로 찍은 로또 번호였다. 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살길 바랐다.

그때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잘 가고 있냐?"

-응. 집에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형.

"어. 뭐야?"

-형이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형이 대체 얼마나 버는지도 모르지만 난 형처럼 생각 안 해.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형이 매번 도와주는 것도 고마운데..이건 내 생각이 맞아.

"네 인생이 우선이라는 게 틀린 말이라고?"

-어. 난 우리 가족이 우선이야. 형도, 엄마도, 아빠도 내가 돈 많이 벌면 전부 책임질 거야.

"..."

-앞으로도 그럴 거고. 형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11」「14」「15」「21」「28」「30」

[해당 번호로 선택하시겠습니까?]

가족이 우선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기준에선 동생은 틀렸다.

로또 1등을 선물한다고 해도, 언젠가 그 돈을 전부 탕진하고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매번 찾겠지.

아직 자립할 성격도 아니고, 지손으로 뭔가를 해결할 능력도 없는 애가 가장이 됐으니 큰 금액을 쥔다면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닐게 분명할 것 같다.

하아.

「NO」

5등이나 먹어라.

* * *

GN아파트에서 제때 용역비가 입금 되고 있는 터라 정주임은 경비원들의 4대보험을 관리하고 급여 및 비품 구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할 일 없다.

내가 아파트 관리를 수십 단지를 한 다면 정주임은 엄청나게 바쁘겠지만, 아파트 단지 하나로 직원 한 명을 쓰는건 사치.

그런데도 내가 정주임을 영입한 건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단계에서 사업이 갑자기 확장 됐을 때를 위해서였다.

사업은 금방 커진다.

아파트 입주민 회장들과 만나서 술 좀 먹어가며 친분도 쌓고 동대표들 회식도 좀 시켜주고, 입찰단가와 평가표 적당히 맞춰주면 난 최소 몇 년 안에 강남에 있는 아파트들 모조리 독식을 해버릴 심상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러선 안 되지.

더럽고 지저분한 사무실이 완전히 깔끔하게 정리됐다.

정주임의 업무 중 하나가 사무실 정리였는데 그래도 틈틈이 정리해둔 사무실은 이제 예전의 경비만세 같이 더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들고 휴먼매니저 사무실로 향했다.

"뭐하냐?"

사무책상에 앉아 졸고 잇는 그녀가 놀란 듯 화들짝 일어났다..입에 묻은 침을 닦아냈다.

"회사에서 퍼질러 자기나 하고 말야. 인사고과 반영해야겠는데?"

"저희 그런 것도 있어요?"

"없지."

사무실 중앙에 마련된 중역 소파에 걸터앉아 아메리카노 한잔을 쭉 마셨다. 정주임은 따분한 듯 하품을 길게 한 뒤 내 앞에 앉았다.

"과장님."

"대표라고 불러야지."

"대표님. 저 솔직히 진짜 할 거 없거든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월급만 축내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대표님. 저 할 일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이야. 정주임."

"네?"

"이제 자발적으로 할 일을 찾는 거야?"

"아. 그게 아니라요."

"할 일 많지. 그런데 뭐하나만 묻자."

"..."

"할아버지는 평생 경비원으로 계셨던 거야?"

"아뇨.."

"그러면. 경비업에 몸을 담그신 계기라도 있을 거 아냐."

"계기가 있나요 은퇴하시고 시작하셨어요. 그런데 대표님"

"응?"

"여기 경비 반장님 정길완 할아버지 있잖아요."

"...?"

"혹시 오래 되셨어요?"

"응. 최고참 이셔,"

"아.. 그러셨구나."

"왜?"

"할아버지께서 최근에 사무실에 찾아오셨거든요. 근로계약서를 좀 봐야겠다고 하셔서 보여드렸는데.. 한숨만 푹 쉬고 다시 나가셨거든요?"

"그래?"

"네. 정확한 사유는 제가 물어봐도 별 말씀 없으셨고요. 할아버지가 살펴보신 근로계약서는 제가 아무리 봐도 문제 될게 없었는데요."

"그게 어떤 계약서야?"

정주임은 내 말을 듣고 근로계약서 비치함에 있는 것 중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박상철’

박상철 경비원의 근로계약서였는데, 입사날짜가 최근 한 달이었고, 경력도 얼마 없는 신입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회사가 1년 사이에 엄청나게 많이 바뀌었고, 공백 기간도 길었다.

딱히 문제될 만한 근로계약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건 차후 정길완 반장님께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문제될 건 없는데..왜 그러셨을까."

"그러니까요. 그래도 혹시라도 모르니 제가 따로 빼놨거든요. 대표님이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잘했다. 내가 까먹지 않게 메모해놔. 또 다른 특이사항은?"

"현준이 한테 전화 왔어요."

"뭐라고 하냐?"

"워킹휴먼 때려 쳤대요."

"미친놈. 여기 자리 없다 그래. 그리고 현준이 나이면 좀 놀아도 돼."

"걔를 요? 저는 대표님이 혹시라도 걔 불러들이지 않을까 걱정 했는데요."

"지금 당장은 그럴 일 없어."

"지금 당장은?"

나는 정주임을 이끌고 경비 휴게실로 향했다. 정주임에게 경비 휴게실을 책임지고 꾸며 보라고 시켰다.

필요한 물품과 전자제품을 회사 경비로 지출하여 구매하라고 했다.

"대표님. 제가 이거 책임지고 하긴 할 건데요. 이거 대표님 명의에요?"

"왜?"

"그렇잖아요. 대표님이 여기 단지에 아파트만 두 채씩 갖고 있는데...돈 벌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돈..?"

정주임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주식, 부동산투기, 비트코인중에 아무거나 한 가지 말하려 했으나 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해주고 싶었다.

"돈 벌려면 클럽 그만가고 술 적당히 먹고 택시 그만 타고 친구들 그만 만나면 돼."

"하..."

"왜? 정곡을 찔렀냐?"

"제대로요."

"내 밑에만 있어. 네 나이에 그 정도 월급 받는 친구들 없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경비 휴게실 정리가 끝내야 돼. 화장실 청소도 안 됐고, 필요한 것도 거의 없는 상태야. 그러니까 쿠몬이든 뭐든 당일 배송 해주는 업체에다가 주문해버려. 알았냐?"

"네! 알겠습니다!"

정주임이 내게 경례를 했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위해 고무 장갑을 꼈다.

-딩동.

벨소리에 문을 열고 나갔고 앞집에 사는 입주민 한 분이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그러시죠?

"저기요. 얘기 좀 하죠."

"네?"

나는 문을 활짝 열어 아줌마를 맞이했고,

아줌마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금 소란스럽게 군 탓에 민원을 넣으려는 건가 싶었지만 106호 아줌마는 전혀 다른 얘기를 꺼내 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 제가 떡을 안 돌렸구나. 이번에 새롭게 오픈한 경비 휴게실이요."

"하. 저도 주민들한테 소문듣고 방금 알았어요."

"...?"

이 아줌마가 왜 이러나 싶었다.

"그거 저희 아파트 공동 규약에 불법이거든요. 회사 휴게실이나 숙직실로 못 쓰세요. 그건 알고 있어요?"

"네. 저희 아파트는 전세나 월세는 주민들 과반 동의 얻어야 기숙사로 쓸 수 있는 거 알고 있는데요."

"알고 있으신 분이 그러시나요?"

"그런데 이거 제가 샀어요. 정당하게 매매된 아파트니까 제가 주인이에요. 긴말 안 해도 알아들으시길 바랍니다."

나의 당당한 말투에 아줌마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경비원들이 저희 집 앞에 살면 불안하다고요."

"아니 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경비원이 살면 더 안전해 지는 거 아닌가요?"

"워낙에 세상이 흉흉하니까."

"하. 참나. 아줌마. 요즘 경비원들도 까다롭게 채용해요. 평생 법 없이 살아온 양반이고 나쁜 짓 한번 안 해본 사람들이라고요. 애초에 징역살다온 사람은 경비원 채용하지도 못해요. 뭘 알고 떠드세요. 짜증나게 진짜."

"..."

-쾅!

나는 기분이 나빠서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경비를 한다는 이유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만하는 건지, 참 경비 세상을 알면 알수록 정말 다이내믹했다.

방금 전의 일에 정주임도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뭐 저런 싸가지 없는 년이 다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넌 처음 겪는 일이구나? 나는 아주 미쳐버리겠다니까. 아니 막말로 경비원 휴게실이 타워팰리스든 호텔이든 지네들이 뭔데 신경을 쓰냐고. 짜증나게."

"휴우. 잠깐만요."

정주임이 갑자기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대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앞집 문의 벨을 누르더니, 화가 나는 듯 문을 쾅쾅거리며 쳐댔다.

"아줌마!"

"누구세요?"

"경비원들이 호텔에서 쉬든 타워팰리스에서 쉬든 아줌마가 무슨 상관인데 이래라 저래라 딴지를 걸어요? 경비원이 우스워요?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요! 저희 할아버지도 경비원 이었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아줌마도 할머니 되면 편하게 놀고먹고 할 것 같아요? 사람일 모르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할 거 아니에요!"

"아니 젊은 아가씨. 내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화 풀어."

"좋은 줄 알아야죠."

"네?"

"GN아파트처럼 이름 있는 아파트에서 경비원 휴게실을 아파트로 사용하고 있다면 당연히 브랜드 값이 올라가지 않겠어요? 어떻게 생각이 그렇게 근시안적이에요?"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당연히 뉴스에도 날거고, 기자들도 올 거고, 그러면 아파트 브랜드 가치 올라갈 거고, 당연히 아파트 값도 조금 오를 거고, 여기 주민들 저희 회사 대표님한테 절해야 돼요 절!"

"알았어. 알았어. 아유. 젊은 아가씨가 무슨 말을 그렇게 잘해."

-쾅!

정주임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씩씩 거렸다.

"어우 열불나!"

"정주임."

"네?"

"잘했어."

정주임의 말이 너무 충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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