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완 반장의 이력을 살폈었다. 그는 평범한 회사에서 30년간 근무하고 퇴직하자마자 경비업에 달려들었다.
"암튼 대표님 덕에 저희가 한시름 놨습니다. 주차 문제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경비들이 한둘이 아니었거든요."
"개선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고요. 아참. 반장님."
"네?"
"앞으로 월급 밀릴 일은 없을 테니까 이 부분 경비원분들에게 잘 좀 말씀해주세요. 그간 버티기 힘드셨을 텐데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길완 반장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반장님. 경비원분들에게 당부드릴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해주세요."
"휴먼매니저 회사 직원으로서 소속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래야만 제가 목소리를 낼 수가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경비원들은 소속감이 없다.
제 스스로 아파트 소속이라고 생각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회사 소속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어느 한편에도 귀속되지 않은 위치다보니 갑질과 곤욕을 당해도 누구에게 설움을 토할 곳도 없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도 쉬쉬하고, 파견회사도 묵인한다.
그러나 그걸 바로 잡아주고 싶었다.
경비원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게 해주는 것.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었다.
역시 재력가 딸답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몇 가지 변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첫째로 경비원들이 대리주차를 하지 않으니 주민들 간의 주차 시비가 잦았다.
그런데 질서는 잦은 싸움과 합의로 자연스레 정립됐고 주민들도 변화에 서서히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정리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경비원들의 급여.
언제까지 내가 경비원들의 급여를 내 사비로 충당할 수가 없었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장의 직인이 예산서에 찍혀야만 관리사무소에서 내 회사로 급여를 보내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대표회장이 그나마 누릴 수 있는 그런 권한으로 갑질을 해대고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단순히 경비원이 과거 대리주차 이후 차가 고장 난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이유라면 대표회장은 진심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인간.
대표회장을 관리사무실에서 대면했다.
나와 회장이 탁상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몇 번의 설전이 오갔고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나는 꾹 참았다.
다시 침묵이 오갔다.
"계속 이러고만 있을 겁니까?"
나는 예산서를 그의 앞에 스윽 들이밀었다. 그리고 회장은 침음하며 눈을 감았다.
"대체 이유가 뭐예요? 예전에 회장님 차 대리주차 했더니 다음 날 차 고장 난 것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아닙니다."
"하아. 속 시원하게 말씀을 해보세요. 뭐 뒷돈을 안 찔러 줘서 이러는 거예요? 예?"
나름 내 추측이었다.
만약 정말 뒷돈을 원해서 이런다면 당장 회장 멱살을 잡고 함께 경찰서로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회장은 관리소장을 스윽 한번 바라보더니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소장 월급이 너무 세요."
"네?"
순간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관리소장도 이런 부분은 처음 들은 건지 제 자리에 벌떡 일어나 회장을 바라봤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관리소장 월급이 세다니요? 그래서 직인을 안 찍어 준다고요?"
"예. 하는 일도 없는 양반이 월급만 축내는 게 꼴사나워서요."
"참나..그래서 골탕 먹이려는 작정이었구나. 그런데 왜 애꿎은 경비원들만 그 피해를 봐야 하는 거죠."
"그 부분은 내가 사과하는데, 관리소장이 월급을 자진해서 깎으면 내 언제든 직인 찍어 드릴게."
관리소장이 헛웃음을 내비쳤다. 단순히 월급이 많다는 이유로 그간 집행 예산서에 직인을 찍어주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라니, 오만정이 떨어질 수밖에.
"거 문회장님."
관리소장이 문회장을 보며 말했다.
문회장이 실눈을 뜨며 소장을 바라봤다. 관리소장도 이제 눈깔이 뒤집어지기 직전
"직인 찍어줍시다.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게 하지 마시고. 예?"
"그러면 월급 깎으시던가."
"하아..내가 이번 달만 하고 관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관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관리소장님이 자진해서 월급을 깎아야만 다음 근무자에게 그대로 적용될 테니까."
일반적으로 관리소장의 월급은 연차별로 나뉜다.
그리고 정식 주택관리사로 임명이 된다면 그때는 아파트 세대별로 월급이 정해지곤 하는데, 현재 800세대 정도의 아파트 관리소장 월급은 360만원.
평균 이하다.
그래서 더 깎을 것도 없다.
그런데도 회장은 고집을 부린다.
어찌 됐든 본인 성과로 남길 원하고 다음 임기 때도 회장 자리를 노린다고 봐야지.
회장이 다시 눈을 감았다.
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다.
관리소장이 결국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나갔고, 기전과장이 뒤이어 따라 나갔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내가 관두면 관뒀지 월급을 왜 깎아? 개 또라이 새끼 앞에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시발 경비가 차를 부쉈냐고, 뻔히 15년 된 롤스로이스 끌고 다니는 거 방전된 거 같다고 따졌더니 저 지랄이네. 캬악 씨발."
관리소장이 온갖 쌍욕을 해가며 화를 식혀댔고 기전과장은 그저 인상만 써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소장을 보며 말했다.
"소장님. 월급 깎아요.‘
"에?"
"이번에 월급 깎고, 소장님 관두시면 어차피 아파트에서 소장 새로 뽑아야 될 일이잖아요."
"그죠."
"저희 회사로 들어오시죠."
"...!"
"제가 회장 잘 구슬려 볼 테니까, 우리 회사가 아파트 먹어버릴 수 있도록 해볼게요."
"그게 가능하겠어요?"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제가 생각해둔 작전이 있으니까 저 믿고 한번 따라와 보시죠. 만약 일이 아주 잘 풀리면.. 소장님도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닐 수 있고요."
소장과 나는 작전을 짰고, 기전과장이 이 연극판에서 조연을 맡아주기로 했다.
물류센터에서 근무했던 일과 경험을 토대로 작전을 짰다.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관리사무실로 향했고 회장은 여전히 부동자세로 앉아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소장이 회장에게 다가갔다.
"월급 깎을게."
"예?"
"월급 깎으면 되잖아요. 애꿎은 경비원들한테 피해 주기 싫으니까 내가 희생 한번 해야지 뭐."
기전과장이 소장을 보며 다그쳤다.
"소장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희 아파트가 그래도 강남에서 꽤 비싼 아파트인데, 소장님께서 월급 깎으시면 다른 아파트에서 근무하시는 소장님들에게 민폐에요."
"뭐 어쩌겠나."
박소장이 집행 예산서를 직접 수정하여 본인의 월급을 깎아 회장 앞에 건넸다.
직인만 찍힌다면 박소장은 자진해서 월급을 깎은 꼴.
회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박소장을 향해 아주 약 오르게 말했다.
"내가 이겼다. 박소장."
회장이 직인을 찍기 위해 인주를 묻히는 찰나, 기전과장이 말했다.
"하아. 소장님. 그러면 저도 관두겠습니다. 그냥 지금 다 관두죠."
기전과장이 최대한 오버액션을 하며 사무업무를 보고 있는 경리직원 두 명에게 말했다.
경리직원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상황.
"소장님 없으면 우리 일 못합니다. 매번 이런 일도 한두 번 이여야죠. 소장님 월급 깎이면 다음은 누구겠어요? 당연히 제가 깎일 거고, 그리고 경리도 깎일 거고, 뭐 경비원, 청소부들, 전부 다 깎으려고 들겠죠. 저 여기서 일 못 합니다. 그냥 다 관두죠."
그랬더니 경리 한 명이 갑자기 펜을 책상에 집어 던지며 때려 친다고 하더니 나갔다.
이 부분은 실제 상황이라 소장과 기전과장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회장은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
"회장님.. 제가 경비업체 대표가 아니라 입주민으로서 말씀드리면요.. 소장님이나 기전과장님 한 번에 두 분 다 관두시면.. 저희 아파트 어떻게 할 겁니까? 그리고 방금 경리 한 분도 관뒀잖아요. 소장님 저 경리가 무슨 업무를 보고 있었죠?"
"당장 내일 있을 관리비 정산하고 있었습니다."
"..."
"당장 해야 될 일이 산더미인데요. 이러다가 회장님 다음 선거 때 재선할 수 있겠어요? 예?"
"크흠."
"회장님이 직접 말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실래요?"
기전과장이 더 오버액션을 펼쳤다.
"아니요. 대표님 그냥 저 관두겠습니다. 지금 똥 배관에서 똥물이 줄줄 새고 있는데, 막말로 그거 여태 제가 했거든요. 앞으로 그냥 제가 관두고 정당하게 업체 불러서 고치든가 하죠. 씨발 저 못하겠으니까."
기전과장의 설움은 연기가 아니라 진심처럼 느껴졌다.
"기전과장. 그래도 입주민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지. 똥물이 줄줄 새면 지금 그걸 누가 막아."
"그냥 입주민들 아파트 변기에 역류되게 내버려두죠."
"하아."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대표회장을 보며 말했다.
"지금 만약에 소장님하고 기전과장님 관두시면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제가 목격자로서 입주민들에게 이 사달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요."
"알겠다..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들 하지."
회장이 진땀을 빼며 말했다.
"수정된 예산서 말고 기존 예산서에 찍어주시죠. 소장님은 임금 변동이 없는 거고, 저희 경비원들도 마찬가지. 콜 하시는 거죠?"
"..."
문회장이 떨리는 손으로 직인을 찍었다.
-탕!
내가 이겼다.
* * *
-띠리리링
오랜만에 지영씨에게 전화가 왔다.
주말이라 일을 쉬고 지영씨와 온종일 데이트를 하고 싶었으나, 그래도 아파트 경비원들은 주말에도 휴식이 없기 때문에 초보 사장으로서 쉽게 일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영씨와 시간을 맞춰 우리 집 근처에서 데이트했다.
지영씨와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셨다.
내가 회사를 인수한 뒤로 지영씨와 겨우 한숨 돌리는 자리였다.
오랜만에 서로 못다한 얘기가 많이 오갔다.
"도일씨 이렇게 보니까 저희 공통점이 있었네요?"
"네?"
"저도 사람 상대하는 일이고 도일씨도 그렇고. 그죠?"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그런데 저는 경비원들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요. 제가 직접 겪지 않은 일들이라 막상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지영씨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주 오래전에요. 대학 실습 때 경비원 한 분이랑 상담해본 적이 있었어요."
"아. 정말요?"
"그때 상담이 아직도 기억나는 건 내 아버지와 별반 다를 게 없으시구나. 딱 그런 감정이었어요. 그래서 가깝게 다가갔죠."
"가깝게.."
"경비원분들이 가장 결여돼 있는 심리가 소속 및 애정 욕구에요. 소속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갑질에 취약한 직업이다 보니 욱하는 성질보다는 참는 성향이 많으시고요. 사람은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작은 애정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매번 자존감이 무너지고 무기력해지고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니까.. 그게 자칫 극단적인 선택까지 불러올 수 있죠."
"아..."
지영씨는 아무래도 심리를 전공했으니 이 부분에 많은 조언을 얻을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작은 애정이라는 표현이 와 닿았다.
내가 처음에 산재를 당했고 생활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투룸 월세방을 얻었다.
그리고 첫 번째 퀘스트를 완료한 뒤 두 번째 메인퀘스트가 소속 및 애정욕구였고 나는 회사에 취업하여 직원들과 유대관계를 맺으며 퀘스트를 달성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