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면 말 안 통해요. 앞으로 저희 직원들 일절 대리주차는 없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하아..대표님!"
"...?"
"제발 한 번만 봐주십쇼. 제가 싹싹 빌겠습니다. 네?"
순간 당황스러웠다. 주차 질서 문제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 보니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
"이거 주차 문제 다시 엉망 되고 민원 들어오면 저희 관리사무실 완전히 아작나버려요. 지랄 맞은 회장이나 동대표들 화살이 전부 우리한테 꽂힌다니까요."
하긴 최근 몇 년간 유지되고 있던 질서가 무너진다면 당연히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건 질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직원들이 부당하게 입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 것일 뿐이다.
경비원도 엄연히 정해진 업무가 있다. 회사원들과 마찬가지 근로계약서가 존재하고 근로 내용을 토대로 근무하면 될 일.
아무 성과금도 받지 못하면서 무상 편의를 제공한다?
그러면 본인이 해보던가.
"제가 생각했을 때 이건 생각을 전부 뜯어 고쳐놔야 될 것 같아요."
"네?"
"해결책을 만들죠. 관리소장님하고 동대표들 불러서 회의한번 하죠."
"알겠습니다."
나름 생각이 있었다.
* * *
관리소장은 아파트 동대표와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으로 입주자대표회의를 열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 2층의 소강당에 하나둘씩 입주자대표들이 모였다.
8개동의 입주자 대표들은 총 8명. 게 중에 7명이 각자의 동별 대표자였고, 내게 갖은 욕을 먹은 입주자대표 회장이 그들의 대표이었다.
동대표들은 회장으로부터 사연을 이미 들었는지 인상이 가득 찌푸려져 있었다.
아마 입에 침을 튀기며 싸우려 들겠지.
"이제부터 저희 직원들이 대리주차는 못하니까 대책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이 자리를 긴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바로 본론먼저 꺼내들었다. 입주자대표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내뿜고 있었고 그들 중 가장 기가 쌔 보이는 한 아줌마가 내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왜 여태 해온 일을 못하겠다고 하는 거죠?"
"부당하니까요."
"아파트 사정이 있는 거고 다들 정으로 살아가는 건데, 그걸 일일이 하나하나 법 따져가면서 하면 안 되지. 누군 그걸 몰라요? 정 때문에 사는 거지."
"동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뭐 하시는 분이세요?"
"보험회사 다닙니다! 왜요!"
"회사에서 동대표님한테 업무도 아닌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말마따나 부당한 것도 찍소리 못하고 참아가면서 해야 하는 거죠? 아주 정이 넘치시는 분이네."
"그거랑 맥락이 다르잖아 지금."
"뭐가 다릅니까? 경비도 엄연히 제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에요."
"하아.."
"입장차이 있는 것도 알고 여태 주차 문제로 꽤 힘들었던 것도 아는데요. 정은 아줌마 거실에서 찾으시고 저희는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정은 거절하겠습니다. 또 할 말 있으신가요?"
"참나.. 뚫린 입이라고."
"그리고 참고하라고 더 말씀드리자면 부당한 업무로 경비원이 노동부에 신고하면 그 피해는 전부 제가 받아요. 벌금이 천만 원 이하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거 제가 벌금 맞으면 아파트에서 내줄 수 있어요?"
동대표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관리소장의 말에 따르면 GN아파트는 경비원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만큼 경비원들의 근속률이 낮고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관둔다는 것. 각각의 입주자 대표들은 서로 눈치만 보더니 한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죠. 그래도 질서는 잡아야 하니까. 저희 아파트가 나름 30억대 아파트라 주차 문제로 사사건건 일 불거지면 이미지만 안 좋아져요."
"입주자 대표님들께서 해결해야 될 문제라서 지금 긴급회의를 잡았지 않습니까. 각자 동 대표들이니까 주민들 의견 물어보고 해결책을 만들어 보세요. 아니면 저기 가만히 앉아 계시는 회장님한테 물어보시던가요."
일순간 묵묵히 앉아있던 회장에게 이목이 쏠렸다.
주차 문제로 나와 대판 싸운 이후로 주눅 들었는지 입을 잘 열지 않고 있었다.
주목된 시선으로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회장이 침음을 삼키며 말문을 열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주차 자리는 모자라고 다들 차량 두 대 씩은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요?
"선착순으로 가야지."
"네?"
동대표 아줌마가 눈을 버럭 뜨며 말했다.
"아니 그러면 저희 남편은 늦은 밤에 퇴근하는데 주차 못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선착순이라는 게 지금 그게 합당한 대책은 아니잖아요."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여. 경비원들이 못한 대잖아요.
"그러면 경비 업체를 바꿔요! 제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거니까! 왜 몇 년간 잘 시행되던 질서가 한 번에 무너지냐고요!"
동대표와 회장의 설전을 지켜보다 참지 못하고 내가 말문을 열었다.
"아줌마."
"뭐. 아줌마?"
그럼 아줌마를 아줌마라 그러지 참..
"법이 바뀌었다고 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어요. 법이 바뀌었다고요. 법! 당신 남편이 늦게 들어오든 말든 경비원들이 대리주차를 못 한다고요."
"업체를.."
"아줌마. 업체 바꿔도 어차피 똑같아진다니까. 왜 계속 뻐꾸기 마냥 똑같은 말을 반복하실까."
결국 아줌마는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전과장!"
아줌마가 기전과장을 부르자 기전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이거 어떻게 대처할 거야?"
"..."
"당신들이 일을 똑바로 처리해야 하는 거 아냐? 어? 당신들이 우리 아파트 관리 주체 아니냐고!"
"죄송합니다. 제가 경비측 대표님하고 최대한 합의점을 만들어서.."
"일 좀 똑바로 하세요. 그리고 관리소장님."
"예."
"언제 관둘 건데요? 관둔다 관둔다고 하더니 아직도 여기에 계시는 거 보니까 경비업체하고 무슨 담합이라도 한 것 같은데 뭐 뒷돈이라도 받으셨나?"
"그런 일 없습니다."
"당신들이 더 문제야. 경비업체 한번 휘어잡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 아파트 입주민들이 뭐가 되겠어요? 저깟 그지 같은 회사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말이야. 아주 내가 답답해 죽겠어. 그따위 업무 마인드로 우리 아파트를 관리하려니. 어휴."
"죄송합니다."
관리소장과 기전과장이 그저 눈치만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기전과장이 앞전 내게 싹싹 빌며 호소 했던 게 이해가 됐다.
저 정도 성질을 가진 동대표라면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스트레스도 엄청났겠지.
동대표의 지랄맞은 성질 때문에 회장도 나름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긴 듯 이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깟 거지같은 회사라니. 내 첫 회사인데.
"아줌마."
"왜요!"
"당신 집이 얼마나 잘사는지 모르겠지만 비하 발언하신 거 취소하고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요."
"못하겠는데요? 경비업체가 무슨 개뿔. 암튼 이번 계약만 끝나면 당신들은 끝이야. 내가 무슨 힘을 써서라도 다 끌어내려 버린다고. 알아들었어요? 회장님!"
"네 말씀하시죠."
"변호사 불러서 이번 기회에 전부 싹 갈아 엎어버리죠. 기전과장도 관리소장도 이번 기회에 전부 잘라버리고. 다른 동대표 분들도 정신 차리세요. 여기 우리 땅이고 우리 집이야. 뭐 같잖은 인간들이 와서 이래라 저래라 을질들 하고 있어. 짜증나게. 어휴!"
이 여자 선 넘었다.
"아줌마. 나도 여기 아파트 입주민이야."
"뭐요?"
내 말을 듣던 아줌마가 인상을 가득 쓰며 나를 바라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
"나도 아파트 입주민이라고. 그깟 동대표 자리 뭐라고 거들먹거리는지 모르겠는데, 뭐? 을질? 내가 언제 무슨 을질을 했는데? 이 아파트는 입주민을 무슨 개뼉다구 취급하는 거야? 어? 당신 방금 나한테 한 말 취소하세요. 아니면 내가 입주민으로서 당신한테 갑질 제대로 보여줄게."
"..."
"사과해요."
"설마 윗집 총각이세요?"
나는 아줌마의 말을 듣고 기억을 되짚었다. 기억났다. 떡만 받고 문 쾅 닫은 아줌마.
"애 있냐고 물어보더니 문 쾅 닫은 아줌마 맞죠? 이야. 101동 동대표였어요?"
"..."
"잘됐네. 여기서 이웃을 만나네. 사과하실래요. 아니면 집으로 가서 야밤에 한번 끝장을 보실래요. 내가 취미가 노래였는데 이번에 춤이라도 좀 춰야 될 것 같아서."
“...”
아랫집 윗집은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법.
아줌마가 눈을 감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미약하게 나온 한 마디.
"미안해요."
"안 들려요."
"미안해요!"
아줌마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사과했다.
"소장님하고 기전과장님에게도 사과하세요."
"..."
"일어나서 고개 숙이고 사과해요!"
아줌마가 의자에서 일어나 기전과장과 관리소장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회장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굳게 닫으며 끙 앓기만 했다. 이제 패색이 짙어보였는지 체념한 듯 보였다.
불과 하루 만에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그 충격이 상당하겠지.
회의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의견만 지속적으로 부딪치는 가운데, 나는 누구나 싫어하고 질색할 만한 의견을 꺼내야만 했다.
"관리비 올리면 해결될 수 있는데요."
"...?"
내말을 듣자 일제히 나를 바라보며 인상을 써댔다.
"경비업체 대표 입장이 아니라 입주민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내가 이번에 소장님이랑 얘기해보니까 주차비로 거둬들이는 금액이 거의 없더라고요. 다들 아시다시피 1.7대면 이게 반올림해서 두 대거든요."
"주차비를 더 걷자는 거죠?"
"그렇죠. 그간 0.3대 분의 주차비만 걷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대 분 주차비 걷어야죠. 그러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그간 1.7대라는 이유로 가구당 두 대씩은 기본으로 소유 할 수 있었으나 이 애매한 숫자 1.7이 주차문제의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주차비를 거둬야 한다.
아파트 값은 강남과 한강뷰라는 이유로 30억대라 비쌌지만, 연식이 꽤 오래된 탓에 흔한 주차 관리 시스템이 없었다.
그리고 주차 관리 시스템을 설치해서 입주민들 외 차량이나 미등록된 불법 주차 차량을 감시해야만 했다.
"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럼 회장 말마따나 선착순으로 하는 거죠 뭐. 앞으로 경비업체는 대리주차에 손을 뗄 거고, 그러면 당연히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력하는 사람이 주차 자리를 따내는 거 나름 매력 있는데..안 그래요?"
"..."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들."
"저는 찬성입니다. 입주 초기에는 문제가 없던 게 다들 살림살이 좀 나아지니까 차량이 계속 늘어나는 것도 문제였고, 제가 알기론 인근에서 몰래 주차하는 차량도 몇 대 있는 거로 압니다. 이번 일로 주차비 더 거둬들이죠."
어느 동대표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줄줄이 찬성의견을 냈다.
회의를 마무리 짓기 위해 관리소장이 말문을 열었다.
"다음 달부터 주차비 할증해서 관리비 청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주차 바리게이트 설치로 출입 관리하려면 돈깨나 나갈 겁니다. 바로 설치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동대표 분들은 각자 맡은 입주민 분들에게 양해 좀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경비원 분들은 입주민의 주차 문제는 개입 없는 겁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차가 없었다.
"저는 차 없는데요?"
"그러면 주차비 안 내셔도 되고요."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 * *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 자아실현의 욕구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7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휴먼매니저」의 자아실현의 욕구 상승률이 대폭 상승했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새롭게 꾸린 사업체 이름도 휴먼매니저였다.
경비만세의 간판이 떨어져 나가고 휴먼매니저 간판이 새롭게 달렸다.
"어. 사장님 저기 좀 삐뚤어요."
비록 낡고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하지만, 명망 있는 기업가들 대부분 시작이 비슷하겠지.
화환과 화분도 도착했다.
사무실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은 최부장이 보내준 화환과 친구 명석이가 보내준 화환, 그리고 지영씨가 들고 온 화분.
간판 작업이 끝나고 몇 시간 뒤 휴먼매니저 소속의 경비반장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경비반장 정길완이 정장을 빼입고 사무실에 과일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GN아파트에서 1년 5개월간 근무했으며 아파트 경비 중에 최고참이었다.
아파트 경비들이 1년을 버티지 못하거나 짧으면 한 달인 경우가 허다했으나 정길완 반장은 나름 뚝심이 있는 양반이었다.
"사무실이 예전보다 많이 깔끔해졌네요."
어르신이 과일바구니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정주임이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많이 부족하죠. 이번 기회에 사무실 좀 전부 갈아엎고 새 단장 좀 하려고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