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과 수납장을 뒤져보며 뭐라고 빼먹을 게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봤지만 정리되지 않은 경비원들의 근로계약서만 방치되고 있었다.
"안 먹어도 돼요."
"가만 있어봐. 분명 어딘가에 커피가 있을 텐데···없네."
"아마 저기 있을 것 같은데요?"
"어디?"
"정수기 옆에 빨간색 바구니요."
"있네. 있어."
나는 성희에게 커피를 한 잔 타주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면접.
"너 워킹휴먼에서 얼마 받았냐?"
"210만 원이요."
"여기서는 얼마 받고 싶어?"
"네? 벌써 연봉 협상 인건가요?"
"얘기해. 솔직하게."
"지금 사무실 상태로 봐서는 제가 백오십만 원을 받아도 유지가 될까 싶은데요. 맞죠?"
성희가 백오십만 원을 불렀다.
"삼백으로 맞춰줄게."
성희가 칠칠찮게 커피를 옷에 흘렸다. 워킹휴먼에서도 받지 못했던 금액이니 놀란 듯했다.
티슈 한 장을 건넸다.
"정말요?"
"왜. 싫어?"
"제가 그만한 돈을 받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요. 그런데 세전..세후..?"
"세후."
"감사합니다. 대표님. 뭐부터 하면 될까요."
"그런데 성희야."
"네?"
"일은 어려운 게 없을 텐데.. 네가 워킹휴먼에서 했던 일이 뭐였지?"
"인력 관리도 하고 오대리님 일손 밀리면 제가 간혹 회계업무도 봐주긴 했죠.."
"하아."
"왜요? 제가 못할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딱 인력관리랑 회계업무이었거든 그런데 현장에 도 상주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어느 현장이죠?"
"아파트. 그리고 경비원들"
"아.."
정성희의 표정이 금시에 어두워졌다. 뭔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회계업무만 봐줘도 될 일이었다.
사백을 불러줘야 하나.
"사실 저희 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경비원으로 근무하셨거든요."
"...!"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하셨으니까.. 20년은 넘으셨죠."
"..."
"해볼게요. 할 수 있어요."
"해보자. 어려운 일 없을 거야."
"네."
"그런데 삼백은 좀 적은 것 같다 그지?"
"...?"
"오십 더 줄게."
창립 멤버라 마땅히 받아야 할 금액.
그리고 경비원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경력직 회사원.
이 정도면 확실히 대우 해줘야지.
* * *
5평 남짓한 사무실이 내 인생의 첫 회사였다.
칙칙하고 더러웠다.
비록 밀린 월급도 많았고 빚도 이리저리 흩어져 회수하기 까다로울 것 같았지만, 어차피 로또라는 보험이 있기 때문에 부담으로 와 닿지 않았다.
일단 회사명부터 변경하고 싶었다.
경비만세라는 정말 멋없는 이름보단 회사를 이끄는 철학이 담긴 멋있는 이름을 짓고 싶었다.
뭐가 좋을까.
- 탁.
"대표님 발 좀 치워주시겠어요?"
성희가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써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회사명은 차후에 정하고 곧장 아파트로 향했다.
아마 회사 대표가 변경됐다는 것을 경비원들도 모를 것이고 관리소장도 모를 거다.
GN아파트 입구에 있는 경비실에는 흰머리가 자욱한 어르신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경비원이 내게 깍듯이 인사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경비실 한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801호에 사는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어르신 성함을 좀 여쭈어도 될까요?"
"정길완입니다."
"네. 요즘 경비 업무는 어떻게 진행이 되죠?"
"흐흠."
어르신이 다소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무슨 감사를 진행하는 것처럼 질문을 던졌으니 그럴 수밖에.
사실 가장 먼저 발렛파킹 업무를 중지 시키고자 했다.
"입주민대표 회장 발렛파킹 한 건 언제부터 그랬나요?"
"꽤 됐죠. 1년쯤... 됐습니다. 사실 회장님께서 이곳 아파트에 오랜 시간 사셨거든요. 그리고 작년에 회장으로 선출되시고 나서부터 저희들이 자발적으로 해주고는 있습니다."
"자발적으로요? 왜요?"
"저희 아파트 구조상 평행주차 구조기 때문에 회장님뿐만 아니라 주차가 어려우신 분들이 간혹 계시거든요. 아무래도 운전이 좀 미숙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저희들이 좀 도와주는 경우고.. 회장님께서는 직접 희생하신다고 본인의 아파트 동에서 좀 떨어진 곳에 지정주차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주차 질서 문제로 불가피한 문제였습니다."
"아..그러셨구나. 그런데 그거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요."
"네?"
"그건 희생이 아닌 거 같아서요. 혹시 지금 입주민들에게 공고 하나 올릴 수 있을까요?"
"그건 관리사무소장님께 허락을 맡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괜찮아요. 하세요. 친하니까."
"네."
그리고 경비원이 노트를 펼쳤고 나는 천천히 받아 쓸 수 있도록 불러줬다.
"안녕하십니까. 801호 입주민입니다. 앞으로 대리주차는 없을 예정이오니 해당 문의 관련해서 801호 경비만세 대표 김도일에게 문의하시면 되겠습니다."
내 말을 듣던 경비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회사 대표님이세요?"
"네. 넘겨받았습니다."
"이걸 제가 몰라 뵙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를 하려하자 극구 말렸다.
"그러지 마시고요. 제가 말씀드린 내용만 아파트 입주민들이 공유 받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근 밀린 월급이 3개월 치죠?"
"..."
"내일 입금해 드릴게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현재시각 오후 4시.
경비원의 업무일정을 잠시 파악하는 중에 회장대표의 귀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귀가 시간에 맞춰 경비원들이 대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101동 앞에 있는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유유히 시계를 보며 회장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저 멀리서 롤스로이스 팬텀이 다가오고 있었고, 회장이 101동 앞에 차를 멈춰 세우며 자연스럽게 경비원을 찾았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무도 없을 텐데.
회장은 다소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소릴 질러댔다.
"어이! 정씨! 정씨 어딨어!"
"없어요."
"...!"
회장은 내 얼굴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주차는 당신이 직접 해야 될 것 같은데."
"당신 뭐하는 인간이야? 하..씨발 진짜 오늘 일 드럽게 안 풀리네, 당신 나한테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어?"
"정식적으로 인사드릴게요. 경비만세 대표고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이 아파트 경비업체 대표란 거야. 무슨 말인지 알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언제든지 계약 해지해버릴 수 있는 거 알아 몰라? 같잖은 새끼가 걸리적거리게."
"당신이?"
"..."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아파트 입주민 대표 회장이야. 이새꺄"
"아..회장이라서? 여기 아파트 주민들은 입주민 회장이 회사 사장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당신 그런 권한 없어요. 그리고 아무 사유 없이 독자적으로 경비업체를 짜른다? 그거 월권이고 위법이야 뚫린 입이면 뭘 알고 떠들어요."
"..."
"아..아니지 이러면 되겠네. 아파트 입주민 회장이 발렛을 안 해준다고 경비업체를 짤랐다.. 이렇게 해서 방송에 내보내면 어차피 당신도 모가지일 것 같은데요. 내가 방송국에 인맥이 좀 있거든."
"참나."
"차에 올라타세요."
"이 새끼가.."
"본인 지정주차 자리 있다면서요. 가서 직접 주차해 봐요. 내가 평행주차 하는 법 알려드릴게."
"하아.."
그때 경비원 한 명이 급히 우리 곁으로 달려왔고 꽤나 난처한 기색으로 대치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장은 경비원에게 윽박지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이. 박씨. 이리와요."
박씨 어르신이 머뭇거렸다.
"이리 오라니까!"
"그만하시죠. 지시할 권한 없어요."
"어이. 박씨. 내가 잘 해줄게? 응?"
이 새끼가.
"씨발 그만 하라니까!"
"...!"
"당신 직원 아니고 내 직원이야. 얻다 대고 내 직원한테 손가락질하고 지랄이야. 확 부러뜨려 버릴라."
"뭐?"
"너 한번만 더 내 직원한테 지시내리면 경비고 뭐고 싹다 파업시켜 버려서 아파트 개판이 되던 말든 농성 들어간다. 알아들었어?"
"..."
세대 당 아파트 관리비에 포함되는 경비 용역비 단 몇 만 원으로 내 직원을 하인 부리듯 하는 건 내 산수와 수지타산에 맞지 않다는 결론이다.
나도 이제 사업가다.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그리고 나의 첫 회사인 만큼 경비원들이 가장 근무하기 좋은 아파트로 꾸며보고 싶다.
대표회장은 잔뜩 화가 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람답게 좀 삽시다. 팔다리 달렸으면 주차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
그리고 우중충 서 있는 경비 어르신을 보며 말했다.
"어르신은 볼일 보세요."
"네."
어르신이 떠나자 입주민 대표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본인이 이리저리 핸들을 꺾어보며 주차 시도를 해보지만 평소 안 해본 평행주차가 어디 쉽겠나.
어휴.
꼴 보니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주차 안 해봤어요? 앞으로 쭉 나갔다가 후진하라니까! 왜 핸들을 또 돌려!"
"..."
"어휴 속 터져."
회장이 주차에 허덕이는 광경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경비만세 같은 멋없는 회사 이름보다 더없이 멋지고 가치 있는 회사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다.
「휴먼매니저」로 하는 거다.
소속감을 느끼는 게 해주는 것.
GN아파트의 주차문제는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현재 주차 가능한 대수는 세대당 1.7대이었으나 기본 두 대씩은 소유하고 있어서 매번 주차 문제로 입주민들끼리 시비가 붙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입주민들이 차를 두 대씩 가지고 있는 걸 왜 우리가 정리해줘야 하냐고요."
지금 내 앞에서 인상을 쓰며 담배를 물고 있는 양반이 기전과장이었다.
기전과장은 전기 및 기계 관련 자격증이 있어서 아파트의 공용설비 기술적 업무를 주로 담당하지만, 결국 가장 많이 담당하는 건 대민업무였다. 관리사무소장이 1인자라면 기전과장은 2인자라고 볼 수 있는 자리.
"경비원분들이 그간 잘 해왔으니까 그렇죠. 우리 회장님도 이거 제대로 질서 잡으려고 얼마나 노력하신 분인데요."
"과장님. 질서는 본인이 알아서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주차 관리원을 한명 뽑으시던가요. 그러면 일이 수월하게 해결될 텐데. 안 그래요?"
"주민 동의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