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워낙에 좁은 방에서 살았던 게 익숙해져 버린 걸까.
거실과 부엌을 합한 것보다 작은 게 여태 내가 살던 원룸과 투룸의 다가구였다.
그런데 지금은 방이 4개였고 펜트리룸이 두 개가 있었고, 화장실도 두 개다.
침실, 드레스 룸, 서재, 게임방 정도로 추렸다.
명석이 말마따나 방 하나는 내가 온전히 취미로 사용하고 싶었다.
그리고 베란다를 확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란다는 지영씨와 분위기를 잡는 장소로 꾸미고 싶었다.
미니 와인 바 정도?
-딩동.
누군가 벨을 눌렀다.
경비원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 안내문입니다. 이 부분 꼭 지켜주셔야 하니까 한번 읽어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경비원이 내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떠났다.
나는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총 7개 동에 18층 아파트 주차는 가구당 1.7대를 주차할 수가 있었고 관리비는 평균 35만 원 정도 됐다.
그리고 아파트 분리수거 날은 매주 월 수 목, 24시간 아무 때나 버릴 수가 있었다.
세대출입카드, 공동현관출입 겸 무인택배함카드, 음식물카드, 총 세종류의 카드도 있었다.
새벽 내에 고성금지, 층간소음 금지, 오물투척 금지 등 일반적인 조항들 중에 내가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 하나.
단지 내 절대 흡연금지.
그런데 이것도 뭐 애들이 많이 사는 건가 싶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까 싶었지만,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나는 월패드로 관리실에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이사 온 601호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네. 안내문 잘 받으셨죠?"
"확인했는데요. 이거 단지 내 흡연금지 부분에 대해서 문의 드릴게 있어서요."
"그럴 것 같았어요. 하아. 이게 저희 입주민대표 회의에서 자체적으로 결정 내린 조항이라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부분이에요."
"아.."
"공동생활 수칙이라고 생각하시고 부탁드릴게요."
"그러면 단지 내 흡연 부스도 없는 건가요?"
"네."
"왜요?"
"사실 예전에 입주민 몇몇 분이 설치 의견을 내셨는데.. 조경을 흐린다는 이유로 부스 설치는 못 하게 됐습니다."
"저는 회의 안 했는데요?"
"..."
"입주자 대표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건 죄송하지만 저희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네? 아니 입주자 대표 번호를 입주자가 알 수가 없다고요?"
"만약 불편한 사항 있으시면 저희한테 바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저희가 대표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관리소장님 번호 부탁드릴게요."
"네."
나는 소장에게 전화했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이사 온 601호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이사는 잘 하셨나요?
"수월하게 끝냈습니다. 다름 아니라 단지 내 흡연 관련해서 문의 드릴게 있어서요. 제가 알아보니까 단지내 흡연은 법적으로 제제할 근거가 없는 것 같은데..맞죠?"
-맞아요. 피셔도 돼요.
"그죠?"
-네. 저희가 막을 권한 없어요.
"그런데 경비원 분이 어제도 제가 흡연하는 데 막더라고요. 사실 이게 저희 동에 아이들이 많이 살아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맞나요?"
-그게 뭔 상관입니까. 그리고 저희 아파트에 신혼부부나 애들 거의 없어요.
"그런데 왜 입주안내문에 흡연금지라고 쓰여 있는 건가요?"
-입주자대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서요. 사실 저는 조만간 때려치우니까 말씀드리는데요.
"네?"
-맘껏 피세요. 아파트 복도, 계단, 엘리베이터, 지하주차장, 놀이터는 금연구역이고, 나머지는 권고사항이지 저희가 강제할 수 없어요. 펴도 됩니다. 저도 지금 피고 있어요. 지금 댁에 계시면 밑에 한 번 내려다보세요.
나는 베란다로 향해 단지 주차장을 내려다 봤다. 그리고 관리소 소장이 전화를 받으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보여요."
-몇 동이라고 하셨죠?
"101동이요."
-피곤하겠네. 101동이면 대표가 거기 살 거예요. 성질이 워낙 더러운 인간이라 웬만하면 흡연할 때 걸리지 마요. 생각만 해도 아주 그냥.. 캬악 퉤. 아주 개새끼라니까.
"아.."
-한 대 피고 싶으면 내려와요. 지금 대표 외출 했으니까 오늘은 봐드릴게.
"네."
-뚝
하아.
아파트 뽑기 실패한 것 같다.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숨으세요!"
관리소 소장과 맞담배를 피며 아파트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급히 숨으라는 말과 함께 나는 제설함 뒤에 숨었다.
소장과 나는 제설함 뒤에 숨어 얼굴만 내밀며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숨은 거지.
"저 인간이 입주자대표 회장 아들인데, 잘 봐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101동 입구 앞에서 차를 세우자 경비원이 달려들며 발렛 파킹을 해줬다.
그리고 유유히 아파트 동 내부로 들어갔다.
"저 씹새끼."
소장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자 나는 관리소 소장을 보며 말했다.
"와.. 여기는 발렛도 해줍니까?"
"안 되지. 그런데 저 인간은 해주는 거죠."
"아.."
"저 차부터 봐요. 딱 봐도 잘나가는 기업가 아들내미 같죠?"
"네."
"여기서 왕의 아들이야. 킹 오프 손. 완전 개 싸가지야. 씹새끼. 캬악 퉤."
손 오프 킹...인데.
그런데 내 아파트 단지에 왜 저렇게 가래침을 뱉어댈까.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이제 곧 관둔다는 관리소장은 이미 잃을 게 없겠지.
"여기 입주민들 연령대가 어떻게 돼요?"
"나이 어린 애들은 또 한참 어리고, 또 많으면 노인네들이고, 그래. 중간이 거의 없어요."
"아..저도 여기 처음 이사 왔을 때 뭔가 분위기가 굉장히 우중충했다고 할까요? 놀이터는 휑하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말라버린 곳 같은데.."
"여기가 그래서 경비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은 곳이에요. 경비원들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지."
"전혀 몰랐네요. 하아.."
"그런데 아저씨는 왜 이러고 있어? 아저씨는 입주민이니까 당당히 피라고."
"네? 숨으라면 서요?"
"그랬지. 이제 일어나시죠."
소장은 앓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무릎을 펴서 일어났고 뻐근한 허리를 돌려댔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꺼낸 일회용 봉투 안에는 담배꽁초가 잔뜩 들어있었다.
꽁초를 봉투 안에 버린 뒤 쉰 소리가 나는 한숨을 푸욱 쉬어대며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름 생각이 있는 양반 같으니까 얘기해주자면 내가 아파트 경비원 짬밥으로 따지면 이미 20년은 족히 넘었어요. 그런데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아파트는 처음이라니까."
"갑질이요?"
"갑질은 애교지. 어떨 때는 한강에 반사되는 태양 빛이 너무 강렬하다고 민원이 들어올 때도 있다니까요"
"네? 그게 말이 되는.."
"내가 신이야? 태양을 어떻게 막아.. 안 그래요? 집안에 커튼은 장식이냐고."
소장이 그때 생각에 아직도 열불이 나는 듯했다.
나는 최대한 달래주기 위해 동의해 줬다.
"그죠. 그죠."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하아. 하여튼 내가 임대 아파트 경비도 해보고 고급 아파트도 해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
"경비원은 하인이여."
"네.."
"잘 놀다 갑니다."
꽤나 캐릭터였다.
얼굴은 말상처럼 길었고 일부러 수염을 기르는 듯 정돈된 모습이었다. 독특한 마스크였다.
그는 발렛파킹을 해준 경비원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마 고생했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관리소장이면 직급도 가장 높고 급여도 괜찮은 거로 알고 있다.
경비원들을 관리해야 하고 입주민의 민원을 총괄해야 한다.
그것뿐이겠나.
주택관리사로서 아파트 관리, 보수, 장기수선충당금 징수하고 공문서 처리하고, 안전사고, 도난 사고, 모든 걸 책임지는 매우 무거운 자리, 게다가 입주자에게 재산상 손해를 입힌 경우 손해 배상까지 해야 하는 자리니 가시 박힌 왕관이지 않을까 싶다.
물류센터의 센터장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예전에 최부장에게 듣기론 아파트 관리소장 정도면 경력도 있어야 가능하며 정년도 길어서 최고 인풋이라고 했다.
그래서 최부장도 말년을 준비한다고 주택관리 자격증을 준비했었다.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이라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소장 자리는 웬만하면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게 맞는데, 제 자리 박차고 나가는 거 보면 오죽 이가 갈렸을까.
-딩동!
월패드를 확인하니 어제 주문했던 입주 떡이 도착했다.
예전에는 자취 이사를 하도 많이 해서 어느 순간부터 입주 떡을 안 했었는데, 그래도 아파트 첫 이사기념이니 아주 고급스럽게 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4대 떡집이라는 곳에 전화했더니 입주 떡으로 가장 잘나가는 세트를 소개해 줬다.
한 세트에 1만 원.
난 더 높은 가격을 요구했고 순식간에 30만 원으로 올랐다.
입주 떡이 아니라 명절 선물세트 수준.
계단식 구조라 내 앞집과 윗집 아랫집만 떡을 돌리면 된다.
떡은 고급스러운 황금빛 보자기에 싸여 있었고 나는 한 세트를 들고 앞집으로 향했다.
-딩동
...
-딩동
-딩동
평일 오후라 어디 나간 건가? 나는 아래층 집으로 향했다.
50대쯤 돼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애 있어요?"
"아뇨."
-쾅
아마 층간소음 때문에 아이가 있냐고 물어본 것 같았다.
그리고 윗집으로 향했고
아저씨 한 분이 나를 웃으며 반겼다.
"아이고 신혼부부가 이사 오셨네요. 되게 젊으신데."
"아직 혼자 삽니다."
"이야. 이게 입주 떡이라고요?"
"네. 좀 과한가요?"
40대 특유의 아재 말투와 반바지, 민 소메를 입은 모습에 금방 정감이 가버렸다.
"하이고. 잘 먹겠습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잠깐만요. 제가 하나 저기 해야 될게 있는데요."
"네?"
"우리 애가 아직 어려서요. 좀 뛸 수 있는데.. 전에 살던 어르신한테 죄송해서 제가 매번 인사드리고 했거든요."
"층간 소음이요?"
"네..저희가 층간소음 매트하고 진짜 할 거 다 하고 완전 무소음으로 했는데도, 아파트 구조상 벽을 타고 소음이 내려가니까.. 쉽지 않네요."
아저씨가 다소 미안한 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네?"
"제가 노래 부르고 듣는 걸 좋아해서요, 집안 전체에 흡음재를 깔고 벽지 두르고 방음벽도 설치할 거니까. 흐흐. 맘껏 뛰어노세요."
"와..."
"혹시라도 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면 바로 말씀해주시고요."
"혹시 가수세요?"
"아뇨. 그냥 백수입니다."
아재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계단을 타고 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8층입니다.
때마침 8층 승강기 문이 열렸다.
한 여자가 강아지 두 마리를 이끌고 집 대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계단에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급히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나는 떡을 전달하려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이미
-쾅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왜 나를 보면서 도망간다는 느낌을 받은 걸까.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고 살아야 이런 더러운 기분은 느끼지 않을 것 같아 다시 벨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앞집 이사 온 사람이요. 입주 떡 돌리려고 왔어요."
그제야 얼굴만 들이밀며 문을 열었고, 나는 그녀에게 떡을 건넸다.
"네. 제가 괜히 오해했네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저기요"
"네?"
"저.. 누군지 알죠?"
"모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