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제가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 집에 이사 도와주러 온 거 진짜 완전 쪽팔린 거 알고 자존심 전부 내려놓고 온 거예요. 현준이 말마따나 돈 한 푼이 급해서 온 거라고요. 저도 일 할 만큼 했고 언니 옆에서 일 많이 도와 줬다고 생각하고 진짜 그게 전부니까..제발 그런 눈빛으로 그만 봐주셨으면 하는데요."
성희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쪽팔리는 짓 했다. 인정할게."
"그리고 지영언니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털어놓고 싶었던 말들 들어줘서 고맙다고요."
"그래."
"그리고 과장님."
"어?"
"그래도 멋지게 살고 있는 모습 보기 좋네요."
"..."
"저도 과장님 나이쯤 되면 아파트에 살 수 있을까요?"
그래도 희망적으로 얘기해주고 싶었다.
"네 정도 성격이면 정말 돈 많이 벌어서 때 부자로 살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너의 그 특별하고 순수한 싸가지만 잃어버리지마."
"칭찬이죠?"
"그럼."
성희가 나를 보며 히쭉 웃었다. 그리고 내게 간단히 목례 정도로 인사를 한 뒤 뒤돌아 현준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야!"
내 목소리를 들은 성희가 뒤돌아 나를 봤다.
"회사 잘 때려치웠다. 그딴 회사가 어디 있냐."
"쓰레기 같은 회사죠. 안녕히 계세요."
* * *
이제 곧 일몰이 시작 될 때.
나는 지영씨와 함께 베란다에 의자를 끌고 앉아 한강 너머로 타오르는 일몰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영씨. 어떻게 알았어요?"
"아.. 베란다 창가에 비친 성희씨의 눈빛이 되게 슬퍼보였거든요. 그래서 한번 떠봤어요.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어서요."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어떻게 그런 회사가 다 있어요? 듣는 저도 화가 났다니까요."
"아무래도 조부모 상은 회사 나름이죠. 오늘 고생 많았어요. 지영씨."
"저도 일당 주셔야죠."
"네?"
"농담이에요. 가끔 와서 일몰 정도 감상해도 될까요?"
"일출도 봐야죠."
아파트 뽑기 실패한 것 같다.
명석이에게 알려야 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서 명석이에게는 내가 한강뷰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명석이에게 따로 전화할 필요는 없었다.
명석이는 인별그램에 환장한 친구라 아파트 베란다너머 한강이 담긴 사진을 찍어 올린다면 몇 분 이내로 전화가 올 놈이다.
-찰칵.
사진이 아주 예쁘게 잘 찍혔다.
여기에 보정을 더해서 인별그램에 업로드 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길면 1분.
짧으면 10초였다.
-띠리리링
"미친 새끼야. 그거 사진 뭐야?"
"흐흐."
"뭐냐고 새끼야."
"내 집이지 뭐겠어."
"거짓말하지 말고...지영씨 집에서 해줬냐?"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고. 그런데 내가 아직 집들이를 못했네."
"간다. 주소 찍어라."
"얼른 와. 밥해놓고 기다릴게."
"딱 기다려."
크크.
명석이네 신혼집에서 차를 타고 30분을 걸리는 거리였다.
딱 40분이 지나자마자 월패드에서 벨이 울렸고 화면에 명석이의 얼굴이 보였다.
-문 열어.
"암호."
-닥치고 문 열어라.
명석이가 현관문을 들어오자마자 그래도 집들이 선물이라고 들고 온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내게 집어던졌고 나는 나이스 캐치로 받아냈다.
명석이가 신발을 벗고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역시 베란다.
그리고 명석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나를 감동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난 네가 성공할 줄 알았어. 네 얼굴 정도면 괜찮은 여자 한 명 꿸 줄 알았거든? 고생했다."
"말을 그따위로 하냐.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루마리 휴지 하나?"
"급하게 오느라. 마트 들릴 시간도 없었다. 아직도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 안보이냐?"
"미친놈."
"와아. 진짜 너는.. 씨발."
명석이가 나를 왈칵 안아줬다.
"오버하지 마 인마"
그래도 나름 집들이라고 배달 음식을 잔뜩 시켰다.
명석이는 아직은 휑한 방을 둘러보며 신혼집으로 너무 넓은 것 아니냐며 방 하나는 게임방으로 만들어서 온종일 게임만 하자고 말했다.
언젠가 자기 로망이라며 퇴근하면 우리 집으로 달려오겠단다.
미친놈.
하긴 명석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명석이는 게임을 좋아했고 나도 서툴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 때우는 정도로 재미는 들렸었다.
그래서 방 하나는 완전히 게임방으로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때마침 배달음식이 잔뜩 왔다.
족발과 보쌈, 튀김류 등이 테이블에 깔렸고 소주 네 병도 배치 끝.
그리고 명석이와 소주 한잔을 주고받았다.
"크아. 죽인다. 야, 이거 받아라."
"응?"
명석이가 지갑을 꺼내더니 나에게 현금 이만 오천 원을 건넸다. 이게 뭔가 싶었다.
"저번에 네가 나한테 로또 한 장 사줬잖냐. 4등 당첨됐다."
기억났다.
일주일도 더 된 일이었다. 명석이가 달동네에 놀러 왔을 당시 나는 명석이에게 4등이나 먹으라고 로또 한 장을 사줬었다.
"와.."
"왜? 감동했냐? 내가 너 몰래 홀딱 먹을 줄 알았어?"
"어."
"내가 2등까지는 암말 안 하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오만 원은 내가 너무 쪼잔하게 보이더라고. 이걸로 살림살이 보태 써라."
"너 애라씨한테 용돈 받아 쓴다며?"
"어떻게 알았냐?"
"그냥 한번 떠본 거야. 왠지 용돈 받아 쓸 것 같아서. 얼마 받냐?"
"삼십."
"애라씨가 돈 관리 다 하지?"
"어."
"애라씨한테 꼼짝도 못 하지?"
"당연하지."
"밤마다 봉사도 하고. 그지?"
"죽겠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돈을 받겠어. 그냥 너 써."
"고맙다."
명석이가 내게 돈을 받고 다시 지갑에 채워 넣었다.
그리고 널찍한 거실을 둘러보며 부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와이프한테 들어보니까 지영씨 집안이 꽤 빵빵한 것 같던데."
"관심 없어."
"관심이 없다고? 왜?"
"그냥.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서 지영씨에 대해 내가 아는 것도 많이 없는데 부모님까지 알아서 뭐 하냐."
"너 이거 지영씨 부모님이 해주신 거 아냐?"
"맘대로 생각해라."
사실 지영씨의 부모님에 대해서 묻고 싶었으나, 그러면 지영씨도 나의 부모님에 대해서 물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애초에 부모 얘기는 꺼내기도 싫었다.
"사실 와이프도 지영씨 부모님이 잘 산다는 것만 알지 구체적인 건 잘 모르더라고, 그런데 내가 듣기론 재산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거든. 수백억대 자산가?"
"그래?"
"지영씨한테 잘해줘. 지영씨 같은 여자 선 자리 줄을 선다. 줄을 서."
"..."
"내가 너라면 지영씨한테 고개 처박고 산다."
명석이가 자작하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족발 하나를 집어먹는 데 나는 명석이의 말에 동의하기 싫었다.
"왜 그러고 사냐."
"야. 현실적으로 따져봐. 네가 돈이 많냐? 재력이 있어? 이 집도 네 명의야?"
"어. 내 명의야."
"뭐?"
"내꺼라고 새꺄. 그러니까 개소리 좀 그만하고 술이나 먹자."
"이거 진짜 네 거야?"
"어!"
"와..그럼 소문이 진짜였네."
"무슨 소문?"
명석이가 조금은 충격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소문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주식 부자라는 소문."
"뭐?"
순간 마시던 술을 뿜을 뻔했다.
그리고 왜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주식부자로 소문이 났는지 기억을 되짚었다.
내 추측에 의하면 명석이 결혼식 당시 나는 명품이란 명품은 다 두르고 갔었고 친구들과 뒤풀이를 했을 때 거짓말이랍시고 작전 주에 올라타서 크게 먹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게 인별 그램에서 와전되어 떠다니다 결국 나는 동창생들 사이에서 주식부자라는 소문이 난 것 같았다.
하아.
"지금 친구들 사이에서 네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건 아냐? 술자리 안주야. 안주."
"누가 그렇게 떠들어 대? 창수가 그래?"
"창수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그렇고. 너 돈 많아졌다고 개 싸가지 없다고 하던데. 크크. 술 먹고 깽판 부렸다고."
"새꺄. 그건."
"그때 왜 그랬어?"
"그냥 짜증나니까 그랬다. 됐다."
"화해해 인마. 창수 새끼 만날 때마다 네 얘기 꺼내는 데 나도 귀 아파 죽겠어."
"싫어. 내가 뭐 하러 그 새끼들이랑 화해를 해? 막말로 네 축의금도 오만 원씩 낸 새끼들이잖아. 됐다. 그런 친구들 필요 없다. 너도 정신 차려 인마 딱 봐도 너 개무시 하는 거 뻔히 보이는 데 아직도 만나냐? 어휴 벨도 없는 새끼."
"너 확실히 변한 게 맞네."
"뭐?"
"변했어. 새꺄. 우리가 뭐 친구 좋다고 만났냐? 걔들 옆에서 뭐 배울 건 없을까. 뭐 좀 떨어지는 게 있을까 싶어서 만난 거지."
사실 명석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학창 시절 명석이와 라면을 먹다가도 금수저 친구들이 옆에 있으면 김밥 하나라도 더 생겼었다.
그런데 그렇게 얻어먹으면 항상 뭔가를 해줘야만 했다.
"명석아. 우린 그때 걔들하고 친구 관계가 아니었어. 그걸 인정해야 돼. 너도 잘 알잖아? 난 내 인별 그램에 친구로 등록된 사람이 너밖에 없어. 그런데 나는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내 말을 듣던 명석이의 표정이 굳었다. 아마 자존심이 깨나 상했을 수도 있다.
"그래 네 말 토씨 하나 틀린 거 없다. 그런데 걔들이 꼭 나빴던 건 아냐. 우리도 병신이었던 거지. 그것도 인정하자고."
"그래 우리 병신인 거 인정."
나는 명석이와 함께 담배를 태우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단지 내에서 담배를 물려고 하는 명석이를 말렸고 나는 단지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고 말해줬다.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봤고 나는 아파트 규정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얘기해줬다.
"이제 어떻게 살 거야? 네가 주식에 재능이 있는 줄 몰랐는데..전업으로 할 거냐?"
"주식은 취미고 이제 일 시작해야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네 명의로 된 아파트 한 채 있으면 뭘 못하겠냐. 인생 1티어 달성한 건데. 적당히 소일거리나 해. 생활비나 벌고 인생 지겹지 않게끔."
"그래."
명석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통금 시간이 정해진 터라 명석이는 급히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고 나는 남은 뒷정리를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의 그릇과 반찬통들이 너무 깔끔하게 정리가 돼 있었다.
지영씨가 주방을 도맡아서 정리를 해줬는데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해놓을 줄은 몰랐다.
잘 정리된 주방 조리도구부터 냄비까지 제자리를 잃지 않고 아주 각이 잡힌 채 정리가 돼 있었다.
한 달에 선자리만 줄기차게 들어온다고 했다.
그만큼 지영씨는 이미 혼기가 가득한 상태.
그래서 얼른 부모님을 뵙고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결혼 전 동거 1년은 서로 필수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허락해 줄지 모르겠지만..그래도 부딪쳐야만 하는 일이었다.
* * *
집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단칸방에서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