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기서 지영 언니랑 주방 정리 돕고 있을게요. 방 청소는 금방 끝내니까 걱정 마세요."
"..."
"왜요?"
"아니다."
하..
저 애를 어떡하지. 저 미소에 담긴 표정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현준이와 함께 박스와 스티로폼을 들고 아파트 단지 내 재활용품 버리는 곳으로 향했으나, 이내 경비 아저씨를 마주했다.
"새로 이사 왔죠?"
"네. 어르신."
"분리 배출 날이 따로 정해져 있으니 제가 조만간 아파트 입주 안내문 따로 보내드릴게요. 이사하셨으니 오늘만 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박스와 스티로폼을 버린 뒤 나는 현준이와 함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담배 한 대 씩 물며 얘기를 나눴다.
"현준아."
"네. 과장님."
"요즘 회사는 어때?"
"회사요? 개판이죠. 세상에 그런 개판도 없어요."
"왜?"
"최부장님도 병원에 계시고.. 천사장님도 사무실 들어와서 일하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누가 들어왔는지 아세요?"
"누구?"
"박대리요."
"하. 박찬혁이도 들어오겠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너는 1팀에서 근무하고?"
"네. 오대리님이 저희 팀 책임잔데.. 휴우.. 너무 힘드네요."
"무슨 일 있었어?"
"오대리님이랑 박대리랑 대판 싸우고.. 천사장은 의자 집어 던지고.. 그리고 성희누나도 관뒀어요."
"뭐? 진짜?"
"네.. 박대리 들어오자마자 바로 천사장한테 달려가더니 관둔다고 하고 뛰쳐나가던데요?"
"미쳤네. 미쳤어."
"그런데 과장님."
"응?"
"성희 누나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왜?"
"과장님 관두고 한 며칠간 성희누나가 말도 없었고.. 흡연실에서 혼자 우는 것 까지 봤다니까요."
"그래? 스트레스가 많나보다."
"그러니까요. 관두는 날에 입에서 술 냄새까지 났으니까요."
술 냄새?
현준이의 말을 듣자니 성희가 꽤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그만둔 뒤로 성희가 이상한 증세를 보였다고 하니 내 마음도 석연치 않았다.
담배를 후딱 피우고 집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다시 경비원을 마주했다.
"단지 내 금연입니다."
"네? 아니 왜 단지 내에서..금연..? 그러면 단지 밖에 나가서 펴야 하나요?"
"그렇죠.. 오늘은 첫날이시니까 제가 그냥 넘어가 드릴께. 다음번에는 안 돼요."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현준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단지 내 금연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럴 수도 있지. 뭐. 애들이 많이 사나보다."
"아.."
나는 현준이를 이끌고 다시 집으로 향했고,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성희가 밀대걸레로 거실의 먼지를 제거하고 있었다.
지영씨는 주방 정리가 끝났는지 신발장에 서있는 내게 다가왔다.
"주방이 단출하네요. 딱히 짐이 많이 없어서요."
"고생 많았어요. 미안해요 지영씨. 괜히 이삿날.."
"아뇨. 성희씨 덕분에 재밌었는데요."
"네?"
"재밌는 얘기를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네요."
"회사에서 워낙 재밌는 일들이 많았거든요."
집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돼가고 있었다.
인력이 달라 붙어주니 일주일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을 미루지 않고 후딱 해치워 버렸다.
이제 식사 시간이 된 탓에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고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4명이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현준이가 짜장면을 흡입하면서 먹어댔다. 그걸 본 지영씨가 다소 걱정이 되는 듯 말했다.
"체해요. 천천히 드세요."
"네."
현준이가 걸신이 들린 듯 탕수육과 짜장면을 해치웠다.
지영씨가 그런 현준이의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장면 한 그릇 더 시켜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할래? 현준이 너 한 그릇 더 먹을래?"
"아뇨. 아뇨. 괜찮아요. 성희 누나꺼 먹으면 돼요."
그러고 보니 성희가 자장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현준이가 성희의 자장면에 젓가락을 들이밀자 성희가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적당히 해라. 진짜. 하나 더 시켜달라고 그래. 그지 같은 게."
"그지? 지금 나보고 그지라고 했어? 일당 십만 원 받겠다고 따라온 사람이 누군데 나보고 그지래. 이 상거지에 백수야."
"뭐..? 말 다했냐? 백수?"
"그래. 누나 백수잖아. 적어도 직장인 앞에서 그지라고 하면 안 되지. 안 그래요 과장님?"
"나..? 나도 백순데. 네 옆에 계신 누님도 백수셔. 여기 전부 백수야. 너 빼고."
"아..죄송합니다."
지영씨가 킥킥 웃어댔다. 그리고 나는 성희를 보며 말했다.
"일을 왜 그만 둔거야? 그냥 맘먹고 참지 그랬어."
"오대리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속 터지고, 최부장님 없으니까 일도 안 되고, 과장님 없으니까 재미도 없고, 박대리까지 오니까 터졌네요. 완전 정떨어져서 그냥 때려치웠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을 때려 치냐. 그럼 이제 앞으로 계획은? 먹고는 살아야 될 것 아냐."
"과장님도 쓰레기 같은 회사라며 때려치운 거 아니었어요?"
"..."
"그리고 계획이요? 없어요. 그냥 뭐 물 흘러가는 데로 사는 거죠. 또 다른데 취업하고 때려 칠거고, 또 때려 치면 또 다른데 취업해야겠죠. 원래 좋소 라는 게 그렇잖아요?"
"..."
지영씨가 성희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저 불쌍하죠? 저도 제 자신이 너무 불쌍해 죽겠어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는가 싶기도 하고. 되는 일도 없고.."
"성희씨 나이면 다 그렇죠. 저도 성희씨 나이 때 딱히 뭐 한 거 없어요."
"정말요? 하긴 제가 주위 친구들에 비해 취업을 일찍 한 편이기는 한데.. 중요한 건 벌어 놓은 돈이 얼마 없다는 거예요. 아직 학자금대출도 남았거든요."
"아.."
정성희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한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한강뷰 아파트에 한번 들어와 보네요. 진짜 너무 좋다. 저는 이집 살려면 평생을 일해도 절대 못 살 텐데요. 한강이 꼭 바다 같아요."
그녀의 뒷모습이 왜 불안하게만 보이는 걸까.
"자장면 다 분다. 안 먹을 거지? 나 먹는다."
현준이가 때를 놓치지 않고 성희의 자장면을 본인 그릇에 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성희가 지영씨를 보며 말했다.
"지영 언니."
"네?"
"과장님하고 오래 됐어요?"
"아뇨. 도일씨 저희 얼마나 됐죠?"
"일주일 됐나.."
"그런데 왜요?
지영씨가 다소 호기심 짙은 눈으로 성희를 보며 물었다.
여자의 촉이 있다고 했던가.
지영씨는 이미 분명히 성희의 말투와 태도에 뭔가 있다는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여자의 촉은 무시 못했다.
"아. 그냥 좀 궁금해서요. 그간 과장님이 만나시는 분이 누군지 알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과장님이 충분히 반할만하네요. 흐흐. 참 멋있으신 것 같아요. 두 분다."
"심리학 전공하신 분이야."
"멋있다. 그러면 사람 마음 치료해주시는 분인 거죠?"
"나도 치료 많이 받았지. 지영씨 덕분에. 너 요즘 안 좋을 일 있어? 안색도 안 좋고 기분이 꽤 우울해 보이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요즘 사는 게 오죽 답답하면...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
지영씨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아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겠지.
그런데 여기서 스톱.
"성희야 분위기 그만잡고 이리와 앉아. 현준이가 다 집어 먹는다."
"입맛이 없네요."
그리고 지영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도일씨."
"네?"
"정말 죄송한데요.. 저. 성희씨하고 대화 좀 해도 될까요?"
"..."
나는 지영씨의 부탁에 현준이와 담배를 한 대 피우자는 이유로 집 밖으로 나갔다.
단지 외부로 나가면 한강변으로 바로 통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
나는 구석진 곳으로 향해 현준이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현준이는 대체 이 상황이 뭔지 궁금해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준아."
"네. 과장님."
"불가항력이란 게 있거든."
"네?"
"이건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야."
"아.."
"한 번에 몰려와버려. 어쩔 때는 이런 불가항력이 정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손쓰기가 힘들어. 그런데 이걸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가 뭔 줄 아냐?"
"네?"
"가끔은 제삼자가 돼 보는 거야. 난 상황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지켜보는 관찰자일 뿐이라고. 그러면 딱 답이 나오거든?"
"아.."
"너는 성희를 보면 무슨 생각이드냐?"
"철없고 바보 같은 누나죠. 가끔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짜증나기도 하고요."
"성희가 혼자 흡연실에서 울었다고 했지?"
"네. 서럽게요."
"그게 언제야. 내가 관뒀을 때?"
"아뇨. 꽤 지났었죠?"
성희가 아직 마음 정리를 하지 못했다는 게 나의 답이었다.
현준이와 함께 담배를 태우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성희가 지영씨 품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지영씨가 성희를 안아주며 눈물을 닦아주며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는데, 위로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영씨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천천히 그녀들에게 다가갔고 성희가 나를 발견하자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싶었다.
현준이도 성희의 눈물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여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성희가 애써 눈물을 닦아내며 화장실로 향했고 지영씨가 나를 이끌고 방안으로 향했다.
"성희씨가 우울증이 심한 것 같네요."
"네?"
"직장도 그만두고 집안은 형편이 어려워서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상황이고..게다가..휴.. 도일씨 알고 계셨어요?"
"..."
"며칠 전에 어렸을 때부터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회사에서 연차를 못 쓰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회사가 있는지 참.."
"아..."
"안 좋은 일만 계속 생기다보니까.. 그러는 것 같은데.. 가끔 성희씨 만나서 얘기도 좀 나눠도 괜찮겠죠?"
"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사규마다 다르겠지만 워킹휴먼은 조부모상을 당하더라도 공가 처리가 없이 연차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최부장이 입원하고 내가 그만두니 천사장은 아마 정주임의 연차를 반려했던 것 같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조부상인데..
사실 성희가 질투심에 지영씨에게 나에 대해 나쁜 얘기나 속마음을 말한 줄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내 스스로가 너무 멍청하게만 보였다.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성희의 마음이 이제 좀 진정이 된 듯 현준이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지영씨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고 나는 택시를 잡아주기 위해 함께 단지 밖으로 향했다.
"고생했다."
"아뇨.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담에도 꼭 불러주세요. 큰 도움이 못된 것 같은데 일당도 많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과장님. 앞으로도 충신이 되겠습니다."
"일당은 계좌로 넣어줄게. 문자 보내놔."
"넵!"
그리고 성희를 바라봤으나 아무 말도 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나는 현준이보고 택시를 잡고 있으라고 말을 한 뒤 성희를 불러 세웠다.
"얘기 좀 해."
"할 얘기 없어요."
"..."
"하아..저도 과장님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