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영씨가 아무 말 없이 발개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는 소주를 더 사온다는 핑계로 편의점을 들러 콘돔을 하나 산 뒤 집으로 향했다.
지영씨가 씻고 나왔다.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그간 내가 입었던 운동복을 입혔더니 마치 어린아이가 성인 옷을 입은 것처럼 옷이 늘어져 있었다.
침대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지영씨는 침대에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뭔가를 계속 찾아댔다.
베개 밑을 들춰보기도 했다.
나는 단번에 그녀의 행동을 눈치 챘다.
"여자 흔적 없어요."
내말을 듣던 지영씨가 이내 속마음을 들킨 듯 배시시 웃었다.
"강아지라도 있을까 봐요. 그래서 좀 찾아봤어요."
"긴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오면 그거 아마 전에 살던 아줌마 머리카락일 거예요."
"여태 청소를..?"
"그러게요."
지영씨가 질색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농담이에요. 와. 그 눈빛 저 질색한 거죠?"
"휴우. 아니 혼자 살더라도 기본적으로 청소는 하고 살아야지 않아요?"
"한다니까요. 농담이에요."
"그럼 이건 뭐죠?"
지영씨가 침대 밑에서 긴 머리카락 한 올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엉큼한 눈빛을 보내며 내게 말했다.
"제가 이럴 줄 알았어요. 제가 그래서 도일씨 집을 한번 와보고 싶었다니까요."
"그게 아줌마꺼네."
지영씨가 금발의 긴 머리카락 앞에서 잔뜩 찡그렸다.
"제가 언젠가 뒷조사 들어간다고 얘기했.."
지영씨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지영씨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를 쳐다봤다.
후크를 풀었다.
그녀가 미약한 신음을 내뱉었고 등을 한손에 받치며 천천히 눕혔다.
그때 지영씨가 내 입을 막으며 물었다.
"이것도 과정인거죠?"
이 동네에서의 마지막 밤, 그리고 지영씨와의 첫날밤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이제 이사를 준비해야만 했다.
이사 당일이라 지영씨를 귀가시키고 홀로 준비를 하려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며 준비는 함께 해야 한다며 결국 내 옆에서 이사 준비를 도와준다고 했다.
사실 전부 버리고 갈 물건들이라 이삿짐센터에서도 금방 짐을 뺐다.
그리고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집을 비우는 일이라 다른 세입자가 오늘 이사를 오기로 했었다.
젊은 부부였다.
그 부부도 나와 지영씨를 보며 부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신혼부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나는 택시를 불러 지영씨와 함께 아파트로 향했다.
지영씨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그냥.. 좋아서요."
"이사 가는데 짐이 참.. 없죠?"
"채워나가면 되죠."
이사 당일은 정말 할 일이 많았다.
이삿짐센터에서 제 모든 걸 다 포장하고 짐을 옮겨준다고 하더라도, 새로 장만한 세탁기나 침대 가전제품 등이 한 번에 몰려오기로 했었다.
기존 집에 미리 구비를 해놓고 이삿짐 옮길 때 한 번에 하는 게 국론인데 여태 너무 바빴던 탓에 가전제품을 이사 날짜에 도착할 수 있게 주문을 해놓은 상태였다.
집주인 할아버지와 공인중개사와 삼자대면을 하고 잔금을 치렀다.
그동안 지영씨는 집에서 홀로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잔금을 치루기 전까지 집을 모두 깨끗이 비워놓은 상태라 속전속결로 잔금을 치루고 매매 계약서를 받고 일을 빨리 끝낼 수가 있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33억의 아파트 매매금의 중개수수료는 헉 소리가 나올 정도.
그리고 나는 다시 아파트로 향하려 했으나 지영씨가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일손이 모자랄 게 분명했다.
잠시 머리를 굴렸다.
명석이에게 부탁하려 했으나 그 친구도 이제 결혼한 몸이라 한 번에 올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현준이에게 전화했다.
"현준아."
-과장님..
"너 일당 20만 원짜리 알바 하나 할래?"
-거기가 어디죠?
"우리 집. 택시타고와. 이사한다."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크크.
역시 현준이답다.
현준이만 와준다면 이삿짐 정리는 더 빨리 끝낼 수가 있었다.
지영씨는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집안에서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지영씨."
"네?"
지영씨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젊은 친구 한명 더 올 거예요. 지영씨는 좀 쉬고 계세요.."
"괜찮아요. 그릇이나 주방조리도구는 설거지를 한 번씩 더 해야겠죠?"
"안 해도 될 거예요. 제가 딱히 썼던 적이 없어서요."
"그래도 해야죠."
지영씨는 박스에 담긴 주방 용품들을 가져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지영씨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고마워요. 제가 다 갚을게요."
"가서 일 봐요."
"네."
그리고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삼전, 엘쥐의 가전제품들이 물밑 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삼전, 엘쥐의 직원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가전제품과 이삿짐 위치를 잡아달라고 나를 불러댔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나는 가전제품의 위치를 잡아주기 위해 이곳저곳 바삐 움직였다.
그때
현준이가 도착한 듯 휴대폰이 울려댔다.
"어 현준아. 왔냐?"
-네 과장님. 도착했는데요. 어디로 가면 돼요?
"주소 찍어 줬잖아."
-단지가 너무 넓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다려 내가 나갈게."
나는 현준이를 데려오기 위해 급하게 밖으로 나갔고 단지를 서성거리며 길을 찾고 있는 그를 발견한 뒤 소릴 쳤다
"야! 현준아!"
-과장니임!!!
그리고 현준이가 해맑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왜.
옆에 누군가 있는 거지.
검은색 외투를 입고 머리는 단발머리였다.
하아.
왜 정성희 주임이..
특별하고 순수한 싸가지만 잃어버리지마.
일손이 부족하여 현준이를 부르면서도 정주임도 함께 부르고 싶었다.
일당도 좀 벌게 해주고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주임과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클럽에서 만났고 내게 고백도 한 여자였다.
그래서 지영씨가 있는 상황에서 성희마저 오게 된다면 내가 괜히 난처해질 것 같아 따로 부르진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왜
정주임과 고사원이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걸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그들이 걷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으나 서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걷는 걸보니 둘이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대 대체 왜 여길 나타난 건지..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안녕하세요."
현준이와 성희가 내게 인사를 했고 나는 이제 상사의 위치가 아닌 형, 오빠로서 맞이해줬다.
"오랜만이다. 이 자식들. 잘 지냈냐?"
"헤헤. 과장님도 잘 지내셨죠?"
"과장은 개뿔, 이제 형이라고 그래.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성희는?"
내 질문에 고현준이가 해맑게 웃어댔다.
"아. 일당 20만원은 아무리 봐도 좀 쌘 것 같아서요. 성희 누나랑 반반씩 나누기로 했어요."
"그랬냐? 20만원이 좀 쌨어?"
"엄청 쌔죠."
"하아.."
"왜요?"
"아니다. 성희는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요즘 뭐 안 좋을 일 있냐? 안 본 사이에 애가 핼쑥해졌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과장님 집이 어디에요?"
"따라와. 아 그리고."
"네?"
"너희들 일당 이십 쳐줄게. 와줘서 고맙다."
현준이가 ‘나이스’를 외치며 웃었고 옆에 있는 성희를 툭툭 쳐대며 다 내 덕분이라며 으스댔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들을 끌고 집으로 향했다.
정리되지 못한 짐과 쓰레기들이 널브러진 탓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제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모두 빠졌고, 가구들과 가전제품들도 모두 들어온 상태.
남은 건 이제 청소와 정리였다.
주방을 정리하고 있던 지영씨가 동생들을 보며 반겼다.
"도일씨 회사 사람들이라고 했죠?"
"네."
지영씨와 정성희의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정성희가 지영씨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성희가 지영씨를 보며 물었다.
"과장님 여자친구 분이시죠? 처음 인사드려요. 과장님이랑 예전에 같은 회사 근무했던 정성희라고 해요."
"네.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네요."
"저는 고현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힘쓰는 일 있으면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정성희와 고현준은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하면 돼요?"
"성희 너는 방 청소 하고, 현준이는 이리 와서 나랑 가구 위치 다시 잡고 박스 정리 좀 하자."
"네."
나는 현준이와 침실로 들어가 가구들을 다시 재배치하였고, 널브러진 박스들과 스티로폼 등을 버리기 위해 끈으로 묶었다.
그런데 방청소를 시켰던 정성희는 지영씨 옆에 달라붙어 주방 정리를 돕고 있었다.
"성희야."
"네 과장님."
"방 청소 하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