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똑같은 처지끼리 너무 우울해지지 말죠."
"하나도 안 우울하거든요?"
"도일씨 눈가에 촉촉이 맺힌 거 눈물 아니에요?"
"하품했습니다."
오랜만에 지영씨와 함께 데이트했다. 주말이라 어딜 가나 사람이 많은 탓에 지영씨 동네의 작고 아담한 카페에 들렀다.
"도일씨."
"네?"
"도일씨는 저에 대해서 안 궁금하세요?"
"아직은 서로 궁금한 거 좀 참고 그냥 만날 때 아닌가요?"
"저는 도일씨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아서요. 부모님도 궁금하고 형제 관계도 궁금하고, 우리 나이가 20대들처럼 연애만 하면서 지낼 때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물어봐요. 뭐가 궁금한지."
지영씨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가볍게 앞머리를 쓰윽 쓸어 넘겼다.
그리곤 의자를 당겨 앉아 내 얼굴과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잔뜩 기대하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질문했다.
"소주, 맥주, 택일."
"소맥이요."
"치킨 피자 택일."
"치킨 피자 둘 다요."
"연애는 몇 번 해봤어요?"
내 질문에 지영씨가 피식 웃었다.
"다섯 번요."
"하."
"왜요?"
"거짓말하지 마시죠."
"왜요? 진짠데요?"
"그럼 제일 오래 만난 기간은?"
"1년이요."
"언제죠?"
"20대 중반 때요."
"흐흐. 지영씨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에요?"
지영씨가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그리곤 반짝거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소매를 활기차게 걷었다.
이제 내 차례였다. 지영씨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제가 물을게요."
"네"
"도일씨는 연애 몇 번 해봤어요?"
"열 손가락 모자라요."
"네?"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지영씨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가장 오래 만난 기간은요"
"9개월이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가장 최근에 만난 여자는?"
"20대 중 후반 때요."
"이름은?"
"솔비요. 김솔비."
지영씨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셔댔다.
지금 내가 실수한 건가?
"도일씨는 연애 경험이 아주 풍부하시네요."
"지영씨 앞에서는 모든 걸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어서요."
"아.. 그러셨어요?"
"거짓말이 더 나쁜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죠. 그러면 제가 마지막으로 질문 드릴게요."
"네."
"도일씨는 결혼 생각 있으세요?"
지영씨가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드는 듯 자신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제 결혼 할 나이에 지영씨도 누군가와 쉽게 가벼운 만남을 가질 순 없겠지.
지영씨의 질문을 맛있게 곱씹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준비된 남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더 없이 멋진 말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자가 정도는 있어요."
내 말을 듣던 지영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요?"
나는 지영씨의 마지막 말을 계속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남자 재력 따위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
"이제 제가 마지막 질문해도 될까요?"
"네."
지영씨가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겼다.
"오늘 한 잔 할래요?"
“그러죠.”
“도일씨 집에서요.”
마지막 밤의 첫날밤
15년간 살았던 내 동네의 마지막 밤을 지영씨와 보낸다는 건 유종의 미를 거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와 단둘이 달동네를 거닐며 이곳저곳을 추억 삼아 얘기를 나눴다.
"저기 보이는 해장국 집이 20년 됐는데요. 할머니가 아주 기가 막히게 만들어줘서 저기서 해장 한 그릇 하면 끝내주거든요."
"내일 가볼까요?"
"좋죠. 그리고 저기 보이는 돼지찌개집 보이죠? 우리 동네에서 로또 당첨된 사람이 이번에 개업했는데요. 저 집 딸이 좀 아파요. 말을 잘 못 하는 것 같은데, 보니까 참 안쓰럽더라고요."
"아..그래요?"
"네. 그리고 저기 보이는 돼지복권방 할아버지 혼자 사는 독거노인인데, 이번에 아주 부자가 돼서 월세를 전세로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요?"
"네. 저도 복권방 하나 차려보고 싶어서 알아봤는데요. 국민기초생활자나 저소득층이 할 수 있는 조건이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했죠."
"아..."
"그리고 저기 보이는 2층 다가구집. 매번 싸워요. 싸우는 소리 때문에 제가 잠을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솔직히 진짜 짜증 나는 집이긴 한데, 겨울만 되면 저 집 아저씨 매번 눈길 쓸어주더라고요."
"나름대로 정감 있네요."
"네. 이 동네. 진짜 후졌고 언젠가 빨리 뛰쳐나가야지 했는데, 막상 마지막이 다가오니까 시원섭섭하네요."
지영씨와 한없이 달동네를 거닐었다. 그리고 하천 인근 벤치에 앉아 맥주캔 하나를 들고 마셨다.
"도일씨."
"네?"
"사실 제 성격이 이러지 않거든요?"
"어땠는데요?"
"살짝만 건드려도 터지는 성격? 싸가지 없었죠. 매번 제 욕심만 부렸고 내 의견이 다 맞고, 내가 가진 고집으로 상대방을 누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 그거 완전."
"알아요. 주도권을 잡고 싶어 했죠. 그 주도권이 연애할 때 제가 쥐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생트집도 잡아보고 사소한 거로 싸우고 심지어 바람피우는 것 같으면 제가 뒷조사까지 했다니까요?"
솔직히..
짐작은 했다.
그녀의 사소한 습관에서 묻어 나오는 행동들이 그녀의 성격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웬만한 남자들은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심리상담사인데?
"저는 지영씨하고 반대였어요."
"네?"
"과거 연애 할 때 제가 가진 것 없고 뭣도 없으니까 믿을 건 얼굴밖에 없었죠. 그래서 항상 맞춰줬어요. 맞춰주다 보니까 어느새 제가 목줄 달린 강아지 같이 느껴지더라고요."
"..."
"어릴 때고 생각 없을 때라 그저 남 성격 적당히 맞춰주고 억울해도 참고 잘못한 거 없어도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항상 옆에서 기분 맞춰주고 풀어주고 안아주고 그랬거든요."
"아.."
"그런데 그게 사랑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이 좀 먹고 보니까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내가 주도권을 잡아보자고..그런데 그것도 결국 통제거든요. 사람이 사람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건 군대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그걸 알게 됐을 때 이거 내가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서 그냥 받아 들였어요."
"지금은요?"
"서로 맞춰주지 말고 각자 살아가는 길에 어울리는 연애. 저 사람이 식탐이 많든 주사가 있든 더럽게 살든, 내가 가진 기준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터치할 마음도 없고 저도 간섭 받기는 싫은 거죠."
지영씨가 머리를 정리하며 귀 뒤로 넘겼다.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도일씨. 저희는 어떻게 만나볼까요? 그냥 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만날까요? 아니면 서로 마음에 안 드는 것들 하나하나 되짚어가면서 고쳐 볼까요. 뭐가 더 좋을까요?"
"그냥.. 살죠."
"네?"
"연애가 뭐 이렇다 할 기준 정한다고 해서 잘 풀리는 거 아니잖아요. 저는 지영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아요."
"그 말 취소 안 할 수 있죠?"
"그럼요."
지영씨가 고개를 숙인 채 두 발을 보더니 이내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사람인 냥 지그시 눈을 뜨며 바라봤다.
"도일씨 동거 해봤죠?"
"안 해봤어요."
"정말요?"
"네. 정말 안 했어요."
"사실 저도 동거는 안 해봤는데요. 제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기본적으로 결혼 전 1년 동거는 필수라고. 국가에서 법으로 정해준다면 이혼율이 극명하게 떨어질 거래요."
"그래서 저희 동거하자고요?"
"동거보다는 좀 살갑게 살아보자는 거죠."
"동거는 안 해봤지만 나름대로 철학은 있어요. 적어도 연애는 사계절은 해보자. 한 사람하고 사계절을 만나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든 뭐든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도일씨. 최고 연애 기간이 8개월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네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대부분 겨울에 헤어졌네요."
"겨울에요?"
"네. 겨울에 헤어진 게 많아요. 거의...한 80%?"
"푸웁."
"진짜라니까요."
"겨울에 무슨 원수 지셨어요?"
"그게 아니라, 사실 제가 성격이 겨울만 되면 좀 움츠러드는 게 있나 보더라고요. 지금 와서 느끼는 거지만 이상하게 겨울에는 밖에 나가기가 싫더라고요."
"아.. 곰 같은 분이구나."
"아마 어릴 때 기억 때문인 것 같아요.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보내야 적어도 사는 거라고 배웠는데, 제 유년기는 겨울에 너무 추웠거든요. 너무 추워서 겨울만 되면 집에 갇혀 있었어요."
"..."
"무거운 얘기해서 미안해요."
지영씨가 내 눈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도일씨."
"네?"
"우리 연애하는 거 맞죠?"
"연애...하는거죠."
"그런데 왜 고백을 안 하세요?"
"사랑해서 하는 연애도 있는 거고, 연애하면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있고, 그런데 지영씨."
"네?"
"저는 후자인 것 같아요."
"..."
"이걸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지영씨한테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 솔직하게 얘기한 건.. 단순히 제 기준에서 연애는 사랑에 도달하는 과정일 뿐이었어요. 그 선이 남들하고 달라서 자주 헤어졌고 싸웠어요. 그래서 연애 기간이 짧기도 했고요."
"아..."
"지영씨는요?"
"저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30대 중반 먹고도 연애를 한다는 게 조금 낯간지럽기도 해서 이걸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다만 제가 지금 감정을 표현하자면 도일씨는.."
"...?"
"굉장히 방어적이네요."
"아.."
"상처받기 두려운 면도 보이고..제 말이 틀렸나요?"
"..."
"도일씨가 맺었던 가족 관계를 제가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거 상처가 깊어서 그래요.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을만하고 미운 거 싫은 거 좀 참아가면서 살아가도 될 텐데..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도일씨는 굉장히 좁아요. 특히 인간 관계요. 도일씨는 그런 인간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신중하고 멀리 내다보는 것 같아요."
".."
"제가 도일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상담했을 때, 그때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눈빛이 저를 반하게 만들었거든요. 제가 너무 부담스럽게 말했나요?"
"아뇨."
지영씨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좀 걸을까요?"
집으로 향하는 길에 벚꽃나무에 벚꽃이 피어 있었다. 지영씨와 나는 그래도 이 동네에서 추억은 남기자고 사진을 함께 찍었다.
때마침 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지영씨가 다가구 주택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의 결정을 기다리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제가 라면은 잘 끓이는데요."
방 두 개 투룸이라 옷 방과 침실로 쓰고 있었던 탓에 지영씨와 나는 좁디좁은 방안에서 식탁 하나를 두고 마주 보며 앉아 편의점에서 산 안주를 가운데 두고 소주를 마셨다.
"크. 좋네요. 여기가 도일씨 방이라는 게 참 믿겨지지가 않아요. 여기가 도일씨의 야망이 꿈틀거렸던 곳이죠?"
"제가 이집의 비밀을 알려드릴까요?"
"네?"
나는 지영씨를 이끌고 옷방으로 향했고 붙박이장을 앞으로 당겨 벽지를 보여줬다.
그곳에 쓰인 글귀를 지영씨가 신기한 듯 쳐다봤다.
"여기서 살다간 세입자들이 서로 댓글을 달아 놓은 것처럼 써놓은 것 같더라고요."
"아... 여기 도일씨 글씨도 있나요?"
"그럼요. 여기 탈출이라고 쓰인 거 보이죠? 제가 저번 주에 썼어요."
"아.."
"신기하죠? 여기서 살다간 사람들이 대체 뭐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지영씨와 소주를 세 병정도 깠다.
이미 좀 술에 취해 더 마시지 못할 것 같아 이제 마무리를 하려고 지영씨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이미 지영씨는 좀 취기가 오른 듯 보였다.
"집에 갈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