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사람에 대해 회의감이 들고 지치기 시작했다.
파벌에 참가하여 그간 강형식의 콩고물을 빌어먹고 있었던 인간들도 어느새 강형식에게 뒤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불합리를 겪어가면서 일했던 사람들이 전세가 역전이 된 듯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흘렀다.
이 과정들이 이제 내 머릿속에서 서서히 지겨워지고 있었다.
한 푼을 위해서?
구미 현장 저녁 7시부터 새벽 3시까지의 일급은 105,000원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상해진 건지, 나는 이 돈이 돈같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강형식이가 이곳에서 3년을 근무하면 벌어들인 돈은 약 2억 5천이었다.
한 달에 현장 관리수당과 인센과 말도 안 되는 높은 시급을 한 달로 계산했더니 이런 계산이 떨어졌다.
적어도 이 돈의 40%는 현장 사원들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그게 1억이다.
십만 원과 일억.
이제 내 기준은 일억 정도는 돼야 그게 돈으로 느껴지는 수준.
돈에 젖어든 뇌가 이런 건가 싶다.
최부장은 현재 수월하게 돌아가는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고 새로운 현장 관리자로 최창훈을 선임하기로 했다.
불합리함을 겪어본 사람은 적어도 그 짓을 똑같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름 리더십을 발휘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나는 현장에 위치한 워킹휴먼 사무실에서 인력사무소 소장과 함께 대면했다.
사실 인력사무소 소장을 대면하는 거 기빨린다.
거센 일을 많이 해 오신 사람이기도 했고 드센 사람들 상대하다보니 입도 거칠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 대면하니 편견이었다.
내가 인력사무소 소장을 대면한 건 혹시라도 이 현장에 근속이 가능한 사람을 묻고자 하는 것.
"오늘 상황을 보셔서 아실 겁니다. 일이 워낙에 좀 커진 상태라 내일 당장 인력이 상당수 빠질 것 같거든요. 혹시 소장님께서 데려오신 분들 중에 현장에서 근속이 가능한 분이 있다면 저희가 영입을 해도 괜찮을까요?"
"..."
소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인력사무소도 마찬가지 파견업이라 일당의 수수료를 제한 거로 수입을 얻는다.
그래서 인력이 돈이다.
그 인력을 빼달라는 말이니 소장도 말이 없을 수밖에..
"오늘 현장 상황을 저도 유심히 지켜보니까 사측에서도 당연히 그런 요구 정도는 할 수 있죠."
"..."
"제가 한번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곳에서 더 근무를 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급여는 저를 통해서 넣어주는 거로 하죠."
소장입장에서는 그래야만 일급의 수수료 10%를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회사 내규상 하도급은 금지다.
"아.. 죄송합니다. 그건 저희가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저희가 하도급을 주는 거라서요."
"음.."
"일단 내일 다시 한 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죠."
사무소 소장은 현장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새벽 늦게 퇴근을 했고 나는 소장으로부터 받은 인력사무소 출근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소장이 건네준 명단을 들고 일일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대조해야 했다.
"김과장. 출근명단하고 실 출근 인원 대조중인 거야?"
"네. 그래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죠. 소장님이 주신 명단하고 대조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맞겠지. 뭘 또."
"제가 일 하나는 빈틈없이 하잖아요?"
“김과장.”
“네. 부장님.”
“고생 많았다.”
40명의 인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실 근무 중인 걸 확인한 뒤 나는 홀로 흡연실로 향했고, 스마트폰을 켜서 인별 그램에 들어가 늦은 새벽 지영씨에게 DM을 보냈다.
[지영씨 혹시 지금 잠시 대화 가능하세요?]
[그럼요!]
[무슨 회사를 차리고 싶으세요?]
[네?]
[아까 회사 차리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심리센터요^^ 성인 상대로 하는 것 말고..아이들 상대로 해보고 싶어요.]
[회사 차리시면 되잖아요.]
[ㅋㅋㅋ 도일씨 그게 쉬운 일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ㅎㅎ 그렇긴 하죠.]
[도일씨는 돈 많이 생기면 뭐하고 싶으세요?]
사실 누군가로부터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질문이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잘 모르겠네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건물사서 월세나 받아먹는 삶은 재미없을 것 같고..]
[ㅋㅋ 도일씨 그게 재미가 없다니요?]
[ㅎ 저도 제 회사 한번 차려보고 싶네요. 저 만의 회사.]
[무슨 회사요?]
[음.. 투자회사도 좋고 제가 지금 하는 일과 관련된 회사도 좋고.. 정하진 못하겠네요.]
[도일씨 회사 차리면 저도 직원으로..?]
[ㅋㅋㅋㅋ그냥 대표이사 시켜드릴게요.]
내가 답장을 보낸 뒤로 몇 분 간 말이 없었다. 나는 수시로 DM을 확인하며 지영씨의 답변을 기다렸고 몇 분이 흘렀을까. 그녀가 내게 보낸 답장을 확인했다.
[도일씨 일이 힘들면 진지하게 퇴사 고민 해볼 필요도 있어요. 새벽까지 근무 시키는 회사가 어디 있어요? 도일씨 정도면 무슨 일을 하던 잘 할 테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회사의 한계였어.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 자아실현의 욕구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5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일상과 일의 균형을 맞추는 거 쉽지 않다.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이 들었다.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로 적당히 건물사고 투자 하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인데,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구미 현장을 단도리질 했다고 쳐도 앞으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태라 갑갑하기만 했다.
왜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단순히 1팀사원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친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최부장이 홀로 고군분투하는 게 안쓰러워서?
나도 남들처럼 로또 1등 되면 일 때려치우고 내 살길 찾아가는 평범한 인간이다.
불합리도 불의도 내가 살아가는 데 지장만 없으면 무시하고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걸까 싶다.
새벽근무를 마치고도 다시 사무실에 복귀했다.
최부장과 나는 일을 쉬지 않고 구미 현장의 인원 충원과 새로운 관리자 체계를 잡기 위해 인사 작업을 해야만 했다.
송팀장이 내 앞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최부장이 송팀장에게 말했다.
"송팀장 이번에 구미 현장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여태 잘못된 관행들 전부 뿌리 뽑아야 된다."
"네. 부장님. 안 그래도 통화 했습니다. 그런데 부장님.."
"어?"
"부장님 안색이 좀 누렇습니다. 퇴근해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믿고 퇴근해? 새로 온 신규는? 적응은 잘하고?"
"뭐..그럭저럭 하고 있긴 한데.."
그런데 최부장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최부장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는 표현을 들으니 조금은 걱정이 됐다.
"부장님. 얼굴이 떴습니다."
"뭐?"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 죽어 인마."
그간 일적으로 최부장의 부담을 덜어준건 맞지만 예전에도 며칠 과로해서 입원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닌 상황.
최부장은 이내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사무실로 먼저 올라갔다.
나와 송팀장은 최부장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송팀장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저러다 쓰러질 겁니다."
"송팀장님도 요즘 많이 힘드시죠? 신규는요? 어때요?"
"어휴. 뭐 알겠습니까. 컴퓨터 켜고 끄고 마우스 잡고, 할 일 없으면 지뢰 찾기라도 좀 시켜주고, 그게 답니다."
"현장 관리라도 한번 맡겨 봐요. 나름 성질이 있어 보이던데."
송팀장은 이내 마시던 음료수 캔을 찌그러뜨리며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그리고 한숨을 푸욱 쉬어대더니 하소연이 계속됐다.
"누가 뽑았는지 아주 하자에요 하자. 하아..새로 들어온 신입도 영 시원찮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은 일대로 꼬여버리고 되는 일도 없고, 저희가 너무 욕심을 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네?"
"최부장님 일 욕심이지 뭐겠습니까. 적당히 잘 굴러가는 현장을 왜 그렇게 뒤집어엎는지 참.."
"아무래도 불합리한 게 좀 많다보니까 최부장님도 눈 뜨고 못 보는 거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그것도 적당히 해야죠. 아니. 막말로 김 과장님이나 저나 이게 무슨 개고생입니까. 구미 현장만 봐도 그래요. 거 쫌 관리자가 돈 몇 푼 해먹으면 어떻습니까? 굳이 그걸 건드려야 했어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요."
"..."
"구미뿐만 아니라, 현재 김해도 부산도 광주도 이거 하나씩 건드리면 감당 불가에요. 지금 있는 인력으로 간신히 유지하기도 벅찬데..안 그래요 김과장님?"
"그렇긴 하죠."
"김 과장님도 최부장님 옆에서 으쌰으쌰 해주는 거 좋은데.. 몸 사려가면서 해요.. 그러다가 최부장님 노선 타면 그땐 이미 일 중독자 돼버리는 겁니다. 아니 막말로 요즘 시대에 최부장처럼 일하는 양반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저렇게 못 살아요. 주말에 애들이랑 놀아줘, 집안일 좀 도와주고 하면 저녁이고 누우면 밤이에요. 뭐 평일이라고 다르겠어요? 지금 당장은 어떻게 버틸 순 있어도 며칠 좀 지나고 나면 최부장님도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드실 거예요. 적당히 현실하고 타협하면서 사는 법도 좀 아셔야지. 어휴."
"..."
송팀장의 말이 맞다.
그래서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송팀장의 하소연은 내 마음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송팀장님."
"네?"
"최부장님이 일하는 방식.. 저도 너무 잘 압니다. 밑에 사람들 고생하고 일거리 만들고 진짜 질색하는 상사 1순위로 꼽을 수 있죠."
"허허."
"그런데 제가 최부장님을 따른 건 적어도 잘못된 건 고치려고 하는 모습 때문이에요. 저희가 단순히 물건 때다 파는 상사 회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
"송팀장님 말씀도 너무 맞는 말이라 제가 차마 반박할 여지도 없고요. 그런데 2팀 황부장이 망쳐놓은 현장을 눈뜨고 보자니 최부장이나 저나 속이 뒤집어지고, 그래서 그걸 바꿔보자니 이건 매번 보스몹 때려잡는 기분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죠?"
"..."
"제가 최부장님 한번 잘 설득 해볼 테니까 송팀장님 마저 그런 마음 가지고 있으면 저희 회사 이제 무너질 일만 남았어요. 팀장님 좀만 더 힘내시죠."
송팀장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아마 내가 로또라는 이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송팀장처럼 엄청난 불만으로 최부장을 바라봤을 수도 있다.
일거리 만드는 상사를 누가 좋아하겠나.
나는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과일주스 몇 개를 사들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회의실 소파에서 누워 있는 최부장에게 과일주스 하나를 내려놓으며 붙어 앉았다.
"힘드시죠?"
내 말을 듣던 최부장이 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누워 계세요 부장님."
"아니다. 좀 자니까 몸이 풀리네."
최부장의 안색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긴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김과장 덕분에 구미 현장은 마무리만 잘하면 빨리 안정화 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최창훈씨한테 달린 일이죠. 아무래도 그간 불합리를 많이 겪었으니 정상화 시키는데 오래 걸리진 않겠죠."
"강형석이한테 연락 왔더라.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이야. 사람 참 우습지 않냐? 흐흐. 나쁜 놈이야 아주."
"돈 앞에서 누구든 그렇겠죠. 강형식이 쫓겨날 때 사원들 표정 봤어요?"
"...?"
"그래도 강형식이한테 붙어먹고 살던 놈들도 많았는데 한순간에 뒤돌아섭디다. 참. 의리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어요. 흐흐."
"먹고 살자면 뭐 어쩔 수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먹고 살려면 이리저리 붙어 다니면서 빨대 꽂고 다니는 게 맞죠. 어차피 시간 지나면 또 반복이겠죠. 뭐 어쩌겠습니까. 사람 하는 일인데."
내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석연치 않은 말투에 최부장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듯 말했다.
"너 왜 그래?"
"부장님 2팀이 좀 벅차다는 생각 안 드세요?"
"뭐?"
"황부장이 왜 그렇게 관리자들한테 돈을 퍼줬는지 알 것 같거든요. 막말로 황부장이 매번 지방 현장을 돌아다닐 수도 없잖아요? 황부장 나름의 생존 방식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최부장님도 이제 좀 현실하고 타협 하면서 살아야죠. 언제까지 이러고 살순 없지 않습니까.. 부장님도 부장님 나름 생각이 있고 고집이 있어서 하시는 건 알겠는데, 밑에 사원들 좀 생각하셔야죠. 송팀장이 지금 지방 현장 혼자 마크 하고 있는 거 아시잖아요."
"..."
"천사장님한테 얘기해서 2팀 현장을 다른 도급사로 넘겨버리던지 해야 제가 봤을 때는 2팀이 삽니다."
"지금 나더러 2팀을 넘겨라? 타 도급사에?"
"현실적인 방법인거죠."
"김과장.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나. 김과장은 나처럼 할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2팀은 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책임지는 현장이다.
"그러다 쓰러져요. 쓰러지면 그땐 누가 부장님 일으켜 준답니까? 현장 사원들이요? 송팀장이?"
"..."
"이제 내년이면 부장님 나이도 50이에요. 지금 부장님 얼굴 누렇게 뜬 거 알죠? 그거 황달이에요. 황달. 딱 봐도 몸에 이상 있다는 신호거든요. 그런데도 맘 놓고 못 쉬고 일하는 거, 미련한 짓 같아서 제가 눈뜨고 못 보겠습니다."
"내가 일을 쉬면 2팀 현장은 누가 관리해?"
"아이고..참. 부장님 잠시 쉰다고 회사 안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제 말 듣고 가서 건강 검진도 좀 받고 어디 여행도 좀 다녀오세요. 부장님 말마따나 사람이 먹고 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난 그런 성격이 못 돼."
"그러다 진짜 병원 신세 집니다."
최부장이 내말을 듣곤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최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병원을 갈수가 없다."
"네?"
"두려워서 못가겠다고."
"그게 또 무슨 소립니까."
"아프면? 어? 내 몸에 진짜 이상이 있으면 어쩔 거야?"
".."
"첫째가 이제 19살이고 내년에 대학 간다. 둘째는 이제 고등학교 입학할 나이라고, 하아.. 김과장. 내가 이러고 싶어서 사는 줄 알아?"
"..."
"나도 진짜 두렵거든? 내 몸이 옛날 같지 않은 것도 느껴지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그냥 좀 아파도 못 본 척 살았고, 좀 덜 아프면 괜찮다 싶으며 살았는데, 김 과장.. 내 몸에 이상 있으면 회사도 무너지고 내 가정도 무너져. 그럼 어뜩하냐? 어? 내가 병원을 갈수가 있겠냐고."
"아직 안 늦었습니다. 그냥 부장님 머릿속에 있는 거 전부 비워버리고. 병원 다녀오시죠. 제가 대신 인사팀에 연차 올리겠습니다."
".."
최부장이 약한 소리 하는 거 처음 들었다. 그래서 이렇다 할 대꾸도 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아 버려야만 했다.
그래야 최부장의 고집을 꺾고 겨우 병원을 가든 말든 할 양반이다.
그런데.
최부장은 이미 건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