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가 인별그램 보더니 이거 너 사진 아니냐고 묻더라. 사진 보여줄까?"
"뭔데?"
나는 기대반 설렘반으로 명석이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명석이의 인별그램에 접속해서 애라씨의 팔로우 친구를 통해 지영씨의 계정으로 들어갔다.
사진 한 장이 보였다.
브런치카페 창 너머 앉아 있는 내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문 프레임에 살짝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영씨가 식사 중간에 빠져나가 통화를 할 때 몰래 찍은 것 같았다.
그리고 사진 아래 지영씨가 쓴 글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
인력 펑크 났다고 했죠?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 자아실현의 욕구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2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명석이에게 로또 4등의 번호를 넘겼다고 퀘스트 성공률이 올랐다.
그런데 이거 내가 상대방에게 로또 번호를 넘겨줘야만 성공률이 오르는 건가?
[휴먼매니저는 김도일님이 1순위입니다. 김도일님의 능력을 펼칠수록 성공률은 상승합니다.]
‘그러면 내 능력으로 뭔가를 이뤄내면 오른다는 거네?’
[맞습니다.]
어렵게 느껴졌던 퀘스트
알고 보니 엄청 쉬웠다.
적당히 플렉스좀 즐기고 내 능력을 맘껏 펼치면 퀘스트를 깰 수가 있었다.
흐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근을 하고 있을 때 지영씨에게 DM이란 걸 보냈다.
살면서 처음으로 페이스챗과 인별그램에 가입했다.
DM이란게 인별그램에서 깨톡처럼 대화를 하는 기능이었다.
[지영씨가 올린 사진 이제 봤어요.]
[ㅠㅠ 도일씨 허락 맡고 올리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아니요. 괜찮아요. 다음에는 같이 찍은 거 올릴까요?]
[^^]
[오늘 볼까요?]
[네에. 대학로에서 봅시다요]
[칼퇴해서 일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월요일 오전이면 항상 지영씨와 상담을 위해 설렜는데, 이제 강제로 정시 출근을 하게 생겼다.
허전한 마음에 회사 인근을 돌아다니며 이제야 늦게 재미가 들려버린 인별그램이나 할 작정으로 회사 인근 화단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 앉아 인별그램에 접속했다.
친구들의 사진과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명석이의 인별그램은 멕시코 신혼여행 사진이 많았고 다른 친구들 역시 금수저들이라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었다.
예전에 주점에서 나랑 대판 싸웠던 창수는 결국 아버지에게 화원을 물려받았는지 꽃 사진과 화원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친구 신청을 해야만 볼 수 있는 비공개 사진도 있어서 친구들에게 팔로우 신청을 하려다가도 손이 가질 않았다.
됐다.
괜히 나대지 말자.
나도 사진을 한 장 올려볼까 싶었다.
대체 무슨 사진을 올려보지.
처음이라 굉장히 설렜다.
그리고 지영씨와 데이트를 할 때 찍었던 사진 한 장을 꺼내서 올렸다.
짧은 글귀와 함께.
[가볍지 않은 연애중!]
* * *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놓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저번 주 금요일에 나랑 술 한 잔 진지하게 마셨던 정주임이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퇴사는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나보다.
저번에 내게 취중 고백을 했었고 나는 선을 그었다.
그리고
일을 관두겠다는 정주임을 내가 붙잡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일을 그만두면 상처가 크게 남을 것 같았고 나도 마찬가지.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주말 잘 보냈냐?"
"네. 과장님."
"얼굴 보니까 뽀동뽀동 잘 먹고 잘 쉬었나보네?"
"네. 과장님."
"우리 동네에 로또 1등 나왔단다..하이고.. 나는 언제 1등 되나."
"네. 과장님."
"이번에 너 물류2팀으로 갈래?"
"아니요. 과장님?"
"담배나 한 대 필까?"
"네. 과장님."
사실 내가 정주임에게 계급장 내려놓고 살갑게 다가간 건 어차피 얼굴 마주보며 일할 사이라 하루 빨리 예전 관계로 회복하고 싶었다.
이런 관계에서 서로 어색하게 지내기만 하다가 시간 더 지체하면 그때는 손쓰기도 어렵다.
"내가 그렇게 매력 있어 보여? 아무리 거울을 뚫어져라 봐도 정주임 보는 눈에 한참 못 미칠 것 같은데 말이야."
"우웩."
"너 생각보다 눈 높은 거 알아. 그런데 내가 보는 눈이 엄청 낮거든? 아주 심해야."
"지금 저 꼽 주는 거예요?"
"크크. 농담이다. 일 때려치운다더니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
"혹시라도 오해할까 말씀드리는데요. 저 과장님 하나도 안 좋아했어요. 그거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죠."
"그래? 정말이야?"
"네."
"..."
"왜요?"
"그랬구나. 난 널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저 지금 진지하거든요?"
"크크 내가 조만간 좋은 남자 소개 시켜 줄 테니까 그때까지 매력 좀 올리고 있어라. 알았냐?"
"과장님이랑 동갑이에요? 저랑 나이차이 너무 나는 건 싫은데.."
"말에 씨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이 아.."
"아 퉤."
성희와 맞담배를 피웠다.
이제는 성희가 직장동료로 보였다.
그때 오대리가 흡연실로 들어왔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정주임 담배 한 대만 줘봐."
"네."
"오대리 왔냐?"
"이번에 저희 신입 큰일 난 것 같은데요. 지금 출근시간인데 아직까지.."
생각해보니 저번 주 채용한 팔씨름 우승 경력자 신규가 아직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정주임에게 물었다.
"신입 출근은? 확인 해봤어?"
"아..깜빡했습니다."
"설마 연락두절?"
나는 곧바로 신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워킹휴먼에서 면접 보신 분 맞으시죠? 김도일 과장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늘 출근 예정 잡히셨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좀 늦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아니 그러면 미리 말이라도 해줘야죠."
"금방 갈게요."
하아.
"어뜩하냐? 출근 날 갑자기 몸이 안 좋단다."
"안 봐도 고문관이겠네요. 이거 어쩌죠. 무르면 안 됩니까?"
"무르긴 뭘 물러..일단 뽑았으니까 어쩔 수 있나. 그리고 진짜 몸이 안 좋을 수 있으니까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고."
"정주임 괜찮겠어?"
오대리가 정주임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정주임의 업무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저야 뭐. 오늘 점심 카드로 간식도 긁고 밥도 엄청 비싼 거 먹으면 되죠. 괜찮아요. 그리고 어차피 저희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에요. 2팀이 문제죠."
* * *
최부장의 고성이 오갔다.
"아니 씨..하아. 출근 확인 전날에 미리 확인 해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최부장이 2팀 송팀장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들은..신규 전원 펑크가 난 것 같았다.
송팀장이 억울한 듯 대꾸했다.
"분명히 저번 주에 출근 한다고 했거든요..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여버릴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지금 당장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지금 구미로 내려가고, 너는 혼자서 사무실 관리하고, 이게 될 것 같아?"
"..."
"너 왜 계속 그래? 일하기 싫어? 황부장 밑에서 적당히 일 배웠으면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아서 해야 할 것 아냐?"
"..."
"매번 죄송하다. 죄송하다. 주말에 연락 한번 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어? 이게 내가 꼰대 같아 보이는 게 아냐. 우리 일이란 게 그렇잖아. 주말에도 현장은 돌아가는 거 몰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집안에서 퍼질러 자고 있지 말고 신규들 출근 여부 확인하고, 주말에 현장 관리자들한테 전화 한 통화 씩 돌리는 게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이냐? 어?"
"아닙니다."
"내가 너 때문에 아주 복장이 터진다. 복장이 터져."
"죄송합니다."
송팀장이 아주 잔소리를 제대로 먹고 있었다. 최부장이 저렇게 까지 잔소리 해대는 거 별로 본적이 없었다.
하긴 나 같은 경우 최부장이 신경 쓸 만한 일을 내 밑에 애들에게 미리 지시해두거나 내가 알아서 처리 했으니 말이다.
아마 최부장도 2팀 황부장이 망쳐놓은 사내 분위기와 개판으로 돌아가는 2팀 현장의 체계를 다잡기 위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인 것 같았다.
최부장이 의자를 발칵 밀며 자리에 일어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담배 한 대 피자는 시늉을 했고 함께 흡연실로 향했다.
"설마 전부 아웃입니까?"
"이거 큰일이다. 김과장. 이거 우리 잘못하면 다 무너지겠는데?"
"인력이 이렇게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도 미쳐버리겠네요."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박대리 까지는 내버려 둘 걸 그랬다."
"..."
최부장이 이정도로 판단력이 흐린 사람은 아니다. 분명히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다.
"구미는? 구미현장은 어떻게 됐어요?"
"이번 주말에 안 그래도 한번 내려갔다 왔는데. 상황이 좋지 많은 않아. 이 새끼들이 파벌을 아주 제대로 만들어 놨는지 아주 그냥 지네들 세상이더라."
"어쩌실 생각이세요? 구미 강현식 반장이면 어느 정도 말은 통할 텐데.. 제대로 썩고 고였나봐요?"
"황부장 방식이 이렇게 까지 개차반인줄 알았나. 반장 시급이 얼마 인지 알아?"
"...?"
"만 오천 원이다. 여기에 관리수당에 연장 수당 야간 수당 붙으면 한 달에 강현식이한테만 들어가는 월급만 대략 600만원이야. 씨발. 우리가 뭐 대기업 부장급 정도로 받을 만한 일이야?"
"와아..어떻게 그렇게까지..."
"황부장 방식이야. 현장 말단 사원들 주휴수당이나 이것저것 인센들 전부 현장 관리자들한테 몰아주는 것 같더라고."
"그렇게 해서 득 될게 있나요?"
"너. 아직도 모르겠냐?"
사실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황부장은 유독 현장 관리자들의 월급을 많이 책정해줬다. 한 달에 600만원이면..대기업 부장급보다 좀 높은 수준 아닌가? 아무리 인력관리가 힘들다고 하더라도.. 너무 쌔다.
"모르겠습니다."
"이게 아주 옛날 방식이라 지금은 드물긴 한데, 새로운 현장 하나 잡으면 현장 관리자 시급이나 직급 수당을 높게 쳐주는 거다. 그리고 회사에 충성하게 만드는 거야. 그런데 여기까지는 괜찮아. 충성하게 만드는 거? 그것도 능력이라 보거든."
"...?"
"문제는 돈독 오른 현장관리자들이 어떻게 하겠어? 현장 사원들을 챙겨주겠냐? 다쳐도 나 몰라라 하는 거고, 물도 없고, 현장 선풍기도 없어지는 거지. 왜? 회사에서 관리자에게 퍼준 돈이 전부 현장 사원들 복지비용이거든. 결국 현장 관리자 돈에서 나가야 하는 구조다 보니까 사람이란 게 지 주머니에서 돈 나가기가 싫은 거고, 그러면 피해는 고스란히 말단 사원들에게 돌아가는 거지."
"와아.."
"2팀 산재내역을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간 산재 지출 비용이 턱없이 적은 걸 보고 의심을 하긴 했는데, 전부 현장관리자들이 다친 사원들을 묵인하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 참나. 뭐 그것 뿐이겠냐?"
"사원들이 그걸 걸고넘어지지 않나요?"
"김과장. 어차피 일용직들이잖아. 다치면 본인이 손해라는 거. 현장 관리자들이 아주 주입식 교육을 시켜 놨지 않겠냐?"
"하..그럼 어쩌실 작성입니까?"
"모르겠다. 너무 썩어버린 상태라 이걸 베어내기도 만만치 않을 것 같고. 막말로 내가 강현식이를 해고한다고 해도 줄줄이 그 파벌들 빠져나갈 거고, 인력 구하는 데 출혈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천사장님은 뭐래요?"
"천사장은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지. 뭣 하러 또 일을 만드냐면서... 김과장."
"네. 부장님."
"그냥 내버려 둘까?"
"그러면 어차피 강현식이한테 이리저리 끌려 다닐게 뻔하죠. 황부장 자식들 아닙니까? 못된 것만 배워서 나중에 더 일 커지기전에 싹을 잘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최부장은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본인이 칼을 빼들어 현장을 본인이 바라는 대로 바꿀 것인지, 현실과 타협하여 그저 예전과 같은 황부장의 방식을 답습 할 것인지.
전자로 결정을 할 경우 1팀처럼 반장과 현장 사원들의 현장 만족도가 평균적으로 높아진다. 하지만 그 과정으로 가기까지의 출혈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후자처럼 현실과 타협할 경우 2팀 황부장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 하게 되는데, 소수 인원은 계속 죽어나고 파벌을 만든 인원이 소수 인원의 피를 빨아먹는 구조.
게다가 현장 관리자의 권한이 지나치게 높아 회사에서도 손 쓸 수 없는 지경이다.
사실 일반 회사입장에서는 전자든 후자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어쨌든 소수 인원은 일에 지치고 힘들어 제 발로 나가고 또 신규로 채워지는 게 수순이고, 현장 관리자들도 태업이나 파업만 하지 않으면 될 일.
그런데 최부장은 그런 현장을 아주 질색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을 책임지는 관리자가 현장 관리자가 아닌 파벌 관리자로 변질 돼 버리니까. 그렇게 모인 파벌은 회사에 불이익을 끼치는 명분 없는 태업을 조장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 조용하더라도 언젠가 터질게 분명한 일.
최부장이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인상을 쓰며 나를 바라봤다.
"황부장이 새끼 쳐놓은 자식들 이번기회에 전부 쳐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