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첨금으로 뭐 하실 건가요?"
"제가 빚진 분들에게 빚을 갚아야죠."
"혹시 로또 번호를 찍으실 때 특별한 방법이 있었나요?"
한 기자의 질문, 저 질문 아주 날카로웠다.
사실 로또1등 당첨자를 인터뷰하는 거 살다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
과연 저 아저씨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호기심과 불안감이 동반된 마음으로 지켜봤다.
"사실 제가 로또에 당첨된 것은 순전히 우리 딸 덕분입니다."
"네?"
"아이의 손에 적힌 번호를 발견했습니다. 그 숫자를 보고 로또를 썼더니..1등에 당첨이 됐습니다."
"딸이 복덩이네요."
"네."
김씨 아저씨는 무리 중에 섞여있는 모녀를 발견하고 아이의 손을 이끌고 기자들 앞에 세웠다.
아이의 손바닥에 쓰인 번호를 기자 앞에 보여줬다.
볼펜으로 써준 탓에 아이의 손바닥에 있는 숫자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이 번호..이번호입니다."
기자들이 아이의 손바닥에 쓰인 번호를 사진으로 막 찍어대자, 아이가 눈살을 찌푸려댔다.
한 기자가 아이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쓴 거야?"
딸이 머뭇거리며 말을 잘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엄마의 손을 잡아댔다.
"애가 말을 잘 못합니까?"
"또박또박 얘기할 수 있겠어?"
김씨 아저씨가 다소 서글픈 표정으로 아이를 끌어 안고 말했다.
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지만 겁이 나는지 말을 잘 하지 못했다.
김씨 아저씨는 아쉬운 마음에 다시 아이를 바닥에 내려놨다.
그제야 저 아이의 초점 잃은 눈빛과 생기 없는 표정이 이해가 됐다.
세상과 소통이 어려운 아이인 것 같았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 너무 안타까웠다.
"이제 치료를 잘 해야죠. 다들 감사드립니다."
아저씨가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흥미를 잃어버린 기자들은 복권방 할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대체 어떻게 이곳에서 당첨자가 연이어 나오는 거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이 터가 좋다고 들었습니다."
"터요?"
"지나가던 스님도 그러셨고 목사님도 그러셨습니다. 그거 말고는 제가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몇 시 오픈이죠?"
"곧 가게 오픈입니다. 1분 남았네요."
그리고 1분이 지나자 할아버지가 셔터를 열었고 기자들과 카메라맨들 모두 가게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복권 회사 본사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돼지복권방을 감사하겠다더니 이내 그들도 손님으로 둔갑해버린 상태.
로또를 구매하기 위해 선 줄은 거의 200M정도 됐다.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늘어선 줄에 나도 합세했다.
그런데 이거 너무 비효율적인데?
나는 돼지복권방 할아버지에게 향했다.
"할아버지, 이렇게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한 사람씩 받으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응?"
"차라리 자동으로 줄줄이 계속 뽑아버리세요..제가 로또 들고 다니면서 손님들한테 팔아드릴게요."
"..."
"저 못 믿어요? 5등 몰빵해서 10%까지 떼 드렸는데?"
로또 기계에서 쉴 새 없이 로또가 뽑혀 나왔다.
그리고 나는 로또 한 뭉텅이를 들고나와 길게 줄 서 있는 손님들에게 팔았고 돈을 받았다.
역시
손님들의 줄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로또 기계에서 로또를 뽑아내고 있었고, 김씨 아저씨는 로또 가게 앞에서 손님들에게 떡을 돌려대고 있었다.
김씨 아저씨의 저 행동이 이해가 안 됐다.
보통 1등 당첨되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비밀로 하는 게 일반적인데, 김씨 아저씨는 왜 저러나 싶었다.
또 저렇게 막 퍼주다가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을까 싶다.
"아저씨. 온 동네 소문내고 다니면 좋을 게 없다던데."
"허허. 뭐 다들 그렇다곤 하는데, 좋은 일 생겼으니 남들도 복 받으라고 하는 일입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신 분들도 있으니까. 그걸 잊으면 안 되죠."
"아. 그래요?"
"이 평상에서 매번 술만 퍼마셨던 게 불과 어제였는데, 사람일이 이렇게 역전돼버리네요. 참."
"그러게 사람일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한테 잘 해주세요. 그 돈으로 아낌없이 치료에만 매진해야죠."
"네. 그렇게 해야죠. 걱정마시죠. 흐흐."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 * *
나도 복권방 안에서 의자를 깔고 앉아 로또 OMR카드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1009회차의 로또 번호를 무엇으로 정할지 머릿속을 헤집었다.
무슨 숫자로 해야 할까.
대체. 무슨 숫자로.
이월을 위해 최대한 복잡 단순한 번호로 골라야만 하는 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좌우를 살폈다.
손님들이 심도 있게 번호를 생각하며 OMR카드에 번호를 찍고 있었다.
크크
그래도 이 엄청나게 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나 혼자 이월 당첨을 위해 머리를 쓰는 이 기분..황홀했다.
「LV6 SKILL 로또 번호 선택가능」
[현재 스킬을 발현하시겠습니까?]
「YES」
[1009회차 로또 당첨번호를 선택하십시오.]
내 눈 앞에 1부터 45까지의 선택 번호가 발현됐다.
「1」「2」「3」「4」「5」「6」
「7」「8」「9」「10」「11」「12」
...
...
일단 단순 복잡하게 번호를 써볼 작정이었다.
「1」「2」「3」「43」「44」「45」
그런데 왠지 누군가 장난으로 이걸 썼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도일님의 스트레스 지수를 파악중입니다.]
[파악완료]
[해당 번호로 5명의 인원이 로또를 구매하였습니다.]
하아.
로또 번호를 찍는 일이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나?
역시 이미 5명의 사람이 로또를 구매한 상태.
그렇다면 3의 배수로.
「3」「6」「9」「12」「15」「18」
[해당 번호로 1명의 인원이 로또를 구매하였습니다.]
미쳐버리겠네.
그렇다면..
「1」「2」「3」「4」「5」「6」
[해당 번호로 120명의 인원이 로또를 구매하였습니다.]
‘미친거 아냐?’
그렇다면 이건 절대 없겠지?
「1」「2」「11」「12」「44」「45」
[해당 번호로 1명의 인원이 로또를 구매하였습니다.]
이게?
이게 있다고?
나는 미친 듯이 이월이 될 가능성이 있는 번호를 선택했지만 결국 불가능한 수준.
답이 나오질 않았다.
[로또 이월 될 확률은 0.00046%입니다.]
역시 이 확률을 내 머리로 돌파한다는 건 지극히 불가능하다.
만약 정상적 수순으로 이월이 나오려면 약 4천 게임 중에 한 번 꼴로 나올 수 있는 확률.
그리고 가챠게임 최고 상위 등급 아이템의 확률보다 훨씬 높은 수준.
이건 신의 영역이었다.
그때 명석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석아."
-너 어디야?
"복권방 안에 있어."
-야. 줄 너무 길다. 지금 줄 섰는데 우리 것 좀 사줘라."
"자동?수동?"
"8번 13번 44번으로 수동 넣어주고 반자동으로 사줘."
"콜."
친구에게 1등 선물을 해주기 위해 번호를 정할까도 싶었지만,
개뿔
명석이는 1등 당첨되면 잠적할 놈이다.
친구를 잃는 게 싫다.
4등만 먹여줄 생각으로 번호를 정했다.
「8」「13」「19」「21」「30」「44」
[1,009회차 김도일님을 포함한 8명의 인원이 로또 1등 예정입니다.]
됐다. 이 정도면 로또 1등 인원이 나 포함해서 8명 정도는 나올 것 같고 나눠서 먹으면 20억 정도는 될 것 같았다.
[1009회차 로또 당첨 번호 「8」「13」「19」「21」「30」「44」 으로 결정하시겠습니까.]
「YES」
* * *
"야 씨발 너무 한 거 아니냐? 어떻게 딸랑 한 장 사오냐?"
"그게 몇 등이 될 줄 알고 병신아."
4등 정도나 먹으라고 오천 원 어치 한 장 뽑아다 줬다.
"너 만약에 이거 당첨되면 나 반띵 해주는 거다?"
"그래. 무조건이지."
크크.
명석이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애라씨는 현재 돼지복권방의 촬영 구도를 위해 복권방 내부 사진을 찍으며 할아버지와 간단히 인터뷰하고 있었다.
나와 명석이는 인근 카페에서 애라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받아라. 네 축의금 300만 원으로 형이 이번에 좋은 지갑 하나 사 왔다."
"뭐야?"
명석이가 작은 쇼핑백을 내게 건넸다.
지갑이 들어 있었다.
"소가죽? 악어가죽?"
"아나콘다 가죽"
"야. 장난해? 아나콘다 가죽? 멕시코에서 널린 게 아나콘다 아니냐? 이거 동대문에서 본 것 같은데?"
"비싼 거야 인마. 너 우리나라에 아나콘다 봤냐? 멕시코에서 물 건너온 가죽이니까 아껴 써라."
그래도 나름 뱀피 가죽이라 가족 모양이 특이했다.
그때 명석이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나를 빤히 바라봤다.
"너 요즘 연애하지?"
"어?"
"어제는 대학로에서 데이트했지? 브런치카페에서 밥도 먹고"
"너 나 미행했냐?"
"크크 병신아. 인별그램좀 해. 스마트폰 뒀다 뭐하냐. 나도 와이프한테 들어서 알았다. 상담사 맞지?"
하긴.
나는 페이스챗, 인별그램, 일절 안 했다.
학생 때부터 학을 떼고 살았다.
내 일상을 남들과 공유 하는게 의미가 있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