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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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농담을 지영씨가 잘 받아줬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간 곳은 그녀가 평소 해보고 싶다던 방탈출 카페였다.

"지영씨 이거 해봤어요?"

"저 처음 해봐요. 그래서 언젠가 한 번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제가 이거 고수예요. 제일 어려운 난이도로 해도 금방 깹니다."

"진짜요? 믿어도 돼요? 저 무서운 거 나오면 기절할 수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탈출만 하면 돼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방탈출 카페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를 선택했다.

매장 직원은 처음 오는 손님이 이걸 선택하는 경우는 없다며 절대 못 푼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가장 쉬운 난이도를 추천해줬지만. 사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휴먼매니저]

흐흐.

지영씨와 어두컴컴한 방안에 갇히자마자 나의 스트레스 지수가 월등이 높아졌다.

[김도일님의 스트레스지수를 파악 중입니다.]

[파악 완료]

[1층 서랍과 옷장 뒷문을 살펴 번호를 조합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지영씨에게 바로 해답을 알려주기가 싫었다.

지영씨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며 힌트와 해답을 찾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다.

그녀는 평온하게 앉아 웃고만 있는 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도일씨! 너무 평온한 거 아닌가요!"

"알아요."

"지금..하..지금 너무 급한데.. 같이.."

"이정도 금방 풀어요. 그러니까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심호흡하고 해보세요. 제가 코치 해드릴게요."

지영씨는 내말을 듣고 더 급해진 듯 이리저리 뒤지더니 이내 1층 서랍 속에 감춰진 번호 두 개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겠나.

최고난이도의 방탈출이라면 웬만한 눈치와 지능으론 깨기가 힘들다.

특히 두 명이서는.

지영씨는 이내 울먹거리는 말투로 내게 다가왔다.

"도일씨. 도와주세요."

"자. 봐요. 지영씨가 1층 서랍까지 찾는 건 잘했어요. 거기 문장을 파악 해봐요. 뭐라고 적혀 있어요?"

"어..어...이게..외출을 한다고.."

"그러면 어디겠어요?"

"아. 옷장."

지영씨는 이내 옷장을 뒤지더니 옷가지 속에서 힌트를 또 발견해냈다.

그녀가 뛸 듯이 기뻐하며 자물쇠를 풀었지만 역시 또 하나의 미션이 등장.

[어느 날 엄마가 10살로 보이는 아이를 데려왔다. 그런데 아이의 손과 목에 상처가 보였다. 칼에 베인 흔적 같았다. 그리고 아이는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상처에 화장을 했다.]

방탈출 카페의 컨셉은 공포였다.

공표 영화에 나올법한 방 안에서 힌트를 풀고 탈출하는 과정이라 솔직히 해답을 알고 있는 나로서도 너무 쫄깃하게만 느껴졌다.

[김도일님의 스트레스지수를 파악 중입니다.]

[파악 완료]

[아이는 성인입니다.]

아이가 성인이라니. 그렇다면 엄마가 데려온 아이가 성인이라는 뜻 인건가.

막장도 뭔 이런 막장이 다 있는 거지.

지영씨는 이제 서서히 좁혀드는 방안이 무서워진 듯 울먹거리고 있었다.

"제가 해결할게요."

나는 이제 이 방을 탈출하기 위해 엄마의 화장대에서 아이의 흔적을 찾았고, 그 흔적을 토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지영씨 무서웠어요?"

"하아..."

"이거. 생각만 하면 되게 쉬운 문제들이에요."

"네..."

그리고 최고난이도를 최단시간으로 깬 나와 지영씨를 바라보는 직원들이 연신 축하를 해주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줬다.

"역대 전국 최고 신기록입니다. 와아."

매장 신기록 달성 기념으로 사진이 걸렸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카페를 빠져 나왔다.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카페에 들렀어도 그녀는 어떻게 내가 이걸 쉽게 풀었는지 의아해했다.

"저번에도 와봤죠?"

"처음입니다. 저도."

"그런데 어떻게... 말도 안돼요."

"흐흐. 지영씨. 한 번 더 가볼래요?"

"아뇨. 싫어요. 다신 안 갈래요."

지영씨와 커피를 마시고 시간을 보내니 어느 덧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저녁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탓에 곧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듯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도일씨를 집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네..?"

"저번에 데려다 드렸잖아요. 오늘은 제가 갈게요."

"아.."

하아.

겉모습은 베르사체, 프라다 반지갑에, 시계는 예전에 사뒀던 롤렉스를 차고 있지만 다가구 투룸 월세에 사는 모습은 보여주기가 싫었다.

오해할 것 같았다.

평범한 중소기업에 다니지만 명품에 환장한 인간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래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옆에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그녀를 떨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하철에 함께 올라탔고 그녀와 함께 나의 동네로 향했다.

저녁노을이 지는 골목을 걸으며 지영씨와 대화를 했다.

"옛날에 이 동네 참 많이 왔어요. 제 친구가 여기에 살았었거든요."

"정말요? 저는 대학생 때부터 살았어요. 이제 15년 됐죠."

"와. 되게 오래 사셨다."

"정 많이 들었죠."

"도일씨 사시는 곳이 어디에요?"

"저기 보이세요? 언덕 달동네. 저곳에서 투룸 월세에서 살아요."

"...?"

"놀랬죠?"

"아뇨."

"네?"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곳에 사는 사람이 중요 한 거죠."

"..."

지영씨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돼지 복권방 앞에서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돼지복권방 앞에 펼쳐진 현수막을 보며 말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네. 맞아요. 로또 중복 당첨자가 2회 연속 나온 곳이죠."

"와. 저 여기서 좋은 기운 많이 받아야겠어요."

"오늘 즐거웠어요."

"저도요.."

"지영씨."

"네?"

"고마워요. 제 옆에 있어줘서."

지영씨를 택시를 태워주고 홀로 집으로 올라가는 길,

갑자기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의 고함 소리가 울렸다.

이 고함은 엄청난 기쁨과 울분이 잠재된 소리였다.

-으아아아!!

현재 시각 저녁 8시 50분.

김씨 아저씨네 집이었다.

로또.

1등 됐나보다.

로또 당첨번호 「8」「13」「19」「21」「30」「44」

혹여나 내가 큰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생기를 잃은 여자아이에게 숫자를 써주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 아이를 지나치지 못한 건, 그 아이의 표정이 마치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그저 쭈그려 고개를 파묻고 있는 아이를 보며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저질렀지만 앞으로 어떤 파국이 몰려올지 다소 걱정이 됐다.

-야 네 동네가 쌍문동 아니냐? 거기 돼지 복권방 있는 곳 맞지?

"어. 지금 난리다."

일요일 아침 일찍 명석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혼연행이 끝나고 주말에 몸보신 이유로 약속을 잡았었다.

"야. 우리 와이프 거기 촬영갈 것 같은데? 오늘 같이 볼까?"

"뭐? 왜? 갑자기?"

"돼지복권방 씨발 난리 났잖아. 오늘도 당첨자 나왔다며?"

"어."

"크크. 우리 와이프가 이번에 돼지복권방 촬영 좀 하겠단다.."

"아.."

명석이 와이프는 궁금한 이야기T나 세상에 저런 일이 같은 촬영을 하는 현장르포PD였다.

그런데 이번에 줄지어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와 버리니 방송국에서도 촬영을 나온다는 것이었다.

"언제 촬영한다는데?"

"오늘 와이프가 사전 답사로 거기 방문하기로 했거든, 겸사겸사 같이 얼굴 좀 보자고."

"알았다. 이따 봐."

일이 이렇게 연관이 되는구나.

그리고 지영씨에게 깨톡이 왔다.

[도일씨, 저 지금 쌍문동 이사하려고 부모님 설득하고 있어요.]

[ㅋㅋㅋ 돼지 복권방에서 또 1등 나왔답니다.]

[그러게요. 진짜 어제 거기 앞에서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ㅜㅜ]

[ㅎㅎ 가족들이랑 푹 쉬고 계세요?]

[부모님이랑 산책중입니다 ㅎ]

[전 오늘 애라씨가 우리 동네 복권방 촬영 답사 온다고 하셔서 외출 준비 중입니다 ㅎ]

[헉. 애라 언니한테 저 일 관뒀다고 하지 말아주세요.ㅜㅜ]

[네 ㅋㅋ 걱정 마세요.]

쌍문동 돼지 복권방도 이제 사람들로 완전히 미어터져 버렸다.

그 중심에 김씨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1등에 당첨된 이후 본인의 정체를 들키고 자시고 간에 동네사람들에게 모조리 얘기하고 다녔다.

심지어 주말에 쉬는 방앗간을 강제 오픈 시켜 온 동네 떡을 돌릴 작정이었다.

저 아저씨.

비록 사업에 고꾸라져 나락을 맛보긴 했지만 내가 예상컨대 둘 중 하나였다.

엄청나게 생각 없는 양반이거나, 대단한 거상이었거나.

보통 사람은 아니다. 확실히.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아마 떡을 돌리기 위해 찾아온 모녀가 아닐까 싶었다.

문을 열고나서니 여자아이와 엄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좋은 일 있어서 떡 돌리러 왔어요. 어제 도와주신 청년 맞으시죠?"

"네.."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애기 이름이 뭔가요?"

"수정이요."

"수정아.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야. 항상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돼. 알았지?"

아이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녀가 떠나고 나도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돼지 복권방으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이 돼지 복권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나도 구경꾼의 한 명으로서 군중 사이에 끼었다.

돼지 복권방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듯이 서 있는 김씨 아저씨와 복권방 할아버지는 기자들의 셔터 세례를 받고 있었고 핸드 마이크 앞에서 인터뷰를 했다.

특히 이번에는 로또 회사 본사에서도 돼지 복권방에 나타났다.

이런 희박한 확률을 뚫고 한 장소에서 당첨되는 게 지네들도 믿기지 않은 거겠지.

저번 주 로또 2회 중복이 터졌을 당시 로또 회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로또 추첨 방식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돼지 복권방에서 당첨자가 발생하니, 아예 복권방을 이리저리 뜯고 보고 맛볼 작정인가 싶었다.

돼지복권방 앞에서 김씨 아저씨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언젠가 된다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제가 살면서 그래도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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