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집이 어디시죠?"
아줌마는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인사를 했다. 다행히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김씨 아저씨의 집이 있었다.
나도 남들처럼 평범한 아버지를 두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 허다하게 많았다.
술에 취해 쓰러진 아버지 탓에 새벽마다 엄마와 함께 길을 나서 아버지를 찾았다.
파출소, 공용화장실, 도로, 길바닥
제집에 쉬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음에도 아버지는 그렇게 길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다. 길바닥에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었나 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김씨 아저씨 집에 도착하여 아저씨를 집안으로 들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다가구 주택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입구에 쭈그려 앉아 삶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이 굳어 있는 여자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생기를 잃어버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나의 어릴 때 기억이 스쳤다.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듯한 표정은 어릴 적 나의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
"쉿."
아이의 손에 숫자를 써줬다.
곧 예정된 1008회차 로또번호.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한테 전해. 알았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저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 자아실현의 욕구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1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돼지 복권방에 1등 당첨자가 생기겠다.
로또 1등 됐나보다.
기분이 뒤숭숭했다.
이런 기분을 대체 무슨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정을 살리기 위해 로또 당첨 번호를 넘겼다.
그런데 아무도 내 정체를 모른다는 건 굉장히 멜랑꼴리한 기분이었다.
간혹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외로워하는 캐릭터들을 보며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대체 저런 능력을 갖추고 왜?
그런데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그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순간 평범한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리는 일이었다.
그저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 하나로 했던 일이었는데 말이다.
토요일 저녁이면 김씨 아저씨네 집에는 난리가 나겠지?
숫자만 보면 환장하는 김씨 아저씨가 로또를 사지 않을 리는 없다고 본다.
만약 사지 않았다면 그건 당신 운명인거고.
현재 내 자산을 포트폴리오앱을 통해 한번에 파악했다.
주식으로 들어간 내 자산 100억은 3주 사이에 12%나 올라있었다.
3주 만에 벌어들인 금액이라곤 믿기 힘든 금액.
무슨 호재가 터졌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이래서 주식을 하나 싶었다.
그리고 사치품으로 빼놓은 금액과 아파트 잔금을 치르기 위한 금액을 합하면 약 39억이 내 계좌에 잠들고 있었다.
아파트 잔금 33억을 제외한 나머지 4억은 먹고 놀면서 써도 되는 금액이었다.
벤츠를 사고 옷과 시계 등 사치품을 구매하는 데 써버렸으니 2주 동안 3억을 써버렸다.
와아.
벤츠야 뭐 그렇다 쳐도 제외한 나머지 금액 1억을 2주 만에 써버렸으니 뭐.
옷장에 널브러진 명품 정장과 책상에 널브러진 시계를 보자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아직 내가 가진 자금으로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L타워의 시그니엘 레지던스 분양도 받지 못하는 정도다.
300억대의 아파트.
로또라는 이능이 생긴 지 이제 얼마 되진 않았지만, 서울 최고가 아파트 한 채를 분양 받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리는 수준이다.
게다가 로또 1등 15억으로 할 수 있는 건 겨우 평범한 아파트 한 채 매매 가능한 수준이다.
세상에는 부자들이 너무 많다.
내 능력이 미국의 메가 밀리언이나 파워볼 정도 된다면....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오늘은 지영씨와 점심 약속이 있었다.
벤츠도 동생을 줘버려서 지영씨를 태우고 어디 경기도 외곽으로 빠져 드라이브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렌트를 할까 생각했지만 지영씨와 걸으면서 풋풋한 데이트를 해보고 싶었다.
데이트 코스를 짜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다.
내가 코스를 짜며 지영씨가 내 코스를 따라오며 행복해하고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보람차다.
점심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는 게 연예 초반 데이트 국론이라고 하지만 나는 학창 시절 데이트를 그렇게 평범하게 짜진 않았다.
일단 점심 먹고 영화보고 카페 가는 거 생각보다 돈 많이 깨졌기 때문에 돈 없을 때는 건강을 빌미 삼아 한강에서 텐트 치고 무진장 걸었다.
사실 그렇게 보내고 싶었다.
미세먼지도 없는 맑은 날에 지영씨와 아무 생각 없이 한강에 텐트 쳐서 맥주 한잔 먹고 싶었다.
하아.
30대에 접어들어 처음 하는 연애라 데이트 코스를 짜는 것도 힘들다.
[도일씨. 혹시 점심 먹고 다른 계획 없으시면 오늘은 제가 리드해도 될까요?]
[와..]
[네?]
[아뇨. 너무 신기해서요.]
[저번에 저 퇴사 기념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제가 할게요 ㅎㅎ 이따 뵐게요.^^]
[기대해도 돼요?]
[^^몸만 오세요.]
이 기대감은 뭐지?
지영씨는 사람을 들어다 놨다 하는 구석이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언젠가 굉장히 리드가 뛰어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편했다.
매번 본인이 데이트 코스를 짜고 이것저것 여행 계획도 짜서 나는 돈과 몸만 가면 그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항상 본인이 원하는 것만 하게 되더라.
본인이 먹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만 찾아다녔고 나는 마치 들러리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조금은 불안했다.
그 여자하고 아주 대판 싸우고 헤어졌기 때문에 나하고 성격이 잘 맞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도 지영씨 정도면?
나는 샤워를 하고 슈트를 입은 뒤 세트로 구매한 베르사체 향수를 뿌렸다.
남성미 짙은 향보다는 우디 계열의 부드러우며 너무 가볍지 않은 향을 골랐다.
예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지영씨의 향수와 잘 섞이면서 어울리는 향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구두는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슈트와 어울리게 페라가모 로퍼를 신었다.
이 정도면 오늘 지영씨 앞에서 기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지영씨의 집 근처 대학로였다.
연극을 하는 극단과 맛집들이 즐비하고 쇼핑하기도 괜찮아 데이트하기 정말 좋은 동네였다.
나는 지하철 역 입구 앞에서 지영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일씨이"
내 뒤에서 지영씨가 콧소리를 내며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 그녀를 봤다.
목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눈은 사슴 눈망울처럼 빛이 났고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보니 숨이 멎을 뻔했다.
너무 아름다웠다.
"오늘 너무 예쁘네요."
"신경 좀 썼어요. 도일씨 만나는 날이잖아요."
그녀가 내 옆에 달라붙으며 팔짱을 꼈다.
지영씨의 팔짱이 어색해지지 않도록 나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녀가 이끌고 간 곳은 대학로 인근의 브런치 카페였다.
파스타와 피자, 샐러드가 있는 세트를 시키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테이블에 올려놓은 지영씨의 휴대폰이 지속적으로 울려댔다.
처음에는 벨소리, 그리고 진동, 무음.
지영씨가 미안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 편하게 통화하고 오세요. 괜찮아요."
"네."
지영씨가 식당을 나와 통화를 하는 모습이 창가 너머로 보였다.
꽤 심각해 보이기도 했고
뭔가 지영씨의 미간이 좁혀지는 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보였다.
지영씨가 애써 웃으며 내 앞에 앉았고 나는 전화 내용에 대해 묻질 않았다.
혹시라도 가정사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지영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이래서 제가 일을 쉽게 관두지 못하나 봐요."
"네? 누구예요? 팀장이에요?"
"아뇨. 예전 고객인데 갑자기 일을 관두면 어떡하냐고.. 상담받고 싶다고 연락이 왔네요."
"아..그걸 쉽게 거절할 수는 없나 봐요?"
"휴..제가 봤을 때 내담자분이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그래서 저도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갑자기 전화가 올 줄이야.."
"몇 살이에요?"
"네?"
"그냥.. 궁금해서요."
지영씨가 난처하게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저도 마음 같으면 말씀드리고 싶긴 한데.. 휴..그래도 꼴에 심리 상담사라고..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이게 내가 서운해 하는 게 맞는 건가.
솔직히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지영씨."
"네?"
"예전에 제가 상담받을 때 지영씨 막 노트북에 이것저것 쓰셨잖아요."
"네. 맞아요."
"그때 뭐 쓰셨어요?"
나의 호기심에 지영씨가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내지었다.
"도일씨가 처음에 저한테 온 날, 제가 그때 뭐라고 썼는지 알고 싶어요? 상처받으실 텐데?"
"네. 알고 싶어요."
"현실 부적응자요."
"아..."
나름 짐작은 했다.
"그리고 또 알려드릴까요?"
지영씨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내 얼굴을 보며 웃어댔다.
"네 알려주세요."
"우울증 증상 보임, 관계개선 필요, 친구와 불화, 가정불화"
"뼈 때리시네.."
"그런데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제가 다 틀렸단 거예요."
"맞을 수도 있죠. "
"네?"
"저 요즘 심각하게 우울하고 직장 동료랑 불화도 있어요."
"방 잡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