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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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서럽게 울고 있는 정주임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 줬다.

손이 쉽게 가질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어휴.

"울지마라."

내가 한 마디 내뱉자 그녀는 더 서럽게 울어댔다.

"너..설마 아니지?"

저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니길 바랐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 내 뜻대로 풀리겠나.

술자리는 어색하기만 했다.

정성희는 아무 말 없이 고기만 집어 먹으며 술을 마셔댔고 오대리는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 먼저 자리를 비웠다.

고사원도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먼저 떠버렸다.

정주임은 이제 이성을 좀 차린 듯 보였다.

그때

[사원들하고 회식 왔어요. 푹 쉬고 계세요?]

라고 지영씨에게 깨톡을 보냈던 답장이 도착했다.

[ㅎㅎ 엄마랑 쇼핑 다녀왔답니다. 내일 언제 만날까요?]

[주말이니 아무 시간대 상관없어요. 점심 같이 드실래요?]

[네^^ 그럼 12시는 어때요?]

[내일 뵐게요. 지영씨^^]

그리고 나는 이성을 차려야만 했다. 예전 지영씨와 술을 마실 때 풀어 놓았던 술자리 패시브 스킬을 동기화시켰다.

[알코올 분해 PASSIVE SKILL]

[동기화를 완료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정성희와 취중 진담이 아닌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이었다.

"정주임."

"..."

"말없이 계속 앉아만 있을 거야?"

"과장님. 그냥 없던 일로 하죠."

"아. 없던 일로 하자? 무턱대고 네 감정만 쏟아내면 끝날 일이라 이거네."

"그게 아니라요. 저도 제 마음 정리하고 있으니까 과장님도 너무 쏘아붙이지 말아주세요."

"..."

"제가 미쳤다고 했잖아요."

"정주임. 너랑 어색한 사이 만들기 싫다."

"아. 과장님도 그런 거죠? 저는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고 과장님이 마음 불편하게 회사 다니기 싫으니까. 저보고 확실하게 마음 정리하란 거네요?"

"..."

"맞아요. 저 과장님 좋아했어요. 왜요? 좋아하면 안 돼요?"

"..."

"과장님은 클럽에서 왜 저한테 그랬어요? 케이크 올려 준 거.. 그거 뻔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박찬혁이 쥐어박은 것도 그렇고 제가 오해하게끔 만든 거 아니냐고요."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

"..."

"내가 그때 너한테 선심 쓴 건 여동생 같이 느껴져서 그런 거뿐야. 아무 사심 없었다."

"과장님 그러면 그냥 속 시원하게 선 그어버리세요."

"그어."

"..."

"선 긋자고."

"네. 김도일 과장님. 잘 알겠습니다."

나는 정성희와 확실히 선을 그어버렸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를 내가 잘 유지만 해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정성희는 아주 뿔이 났나 보다.

"저 관두겠습니다."

"..."

"정주임."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앞으로 과장님 앞에서 제가 이성적으로 일을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

"그동안 감사했어요. 매번 점심도 내주시고 회식도 맛있는 거 사주시고, 저도 아쉬워요. 이 회사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퇴사는 제가 천사장님한테 따로 말씀드릴게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정성희가 외투를 챙겨 입고 나가려는 찰나 그녀를 붙잡았다.

"앉아."

"..."

"앉으라고. 내 말 안 끝났어."

"..."

"일을 관두는 건 네 자유고 내가 막을 권한도 없지만..너 실수하게 만드는 건 싫다."

"하아.."

"그리고 너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퇴짜 한번 맞았다고 일을 관두네 마네 하냐? 고백하는 게 죄냐? 엉? 이건 내가 감당하면 될 일이고 앞으로 너를 대할 때 선만 지켜주면 돼. 딱 거기까지야. 그런데 왜 일을 관둬. 이게 지금 네가 잘못 한 일도 아니잖아."

".."

"나도 숱하게 많은 여자를 만나면서 많이 차여봤고 헤어져봤어. 여자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도 봤고 울어도 봤고 미친 듯이 술만 퍼마시는 날도 있었다고. 나 완전히 찌질 중에 상 찌질이였거든?"

"..."

"이렇게 보니까 나 완전 병신 같지. 응?"

"..."

"그런데 내가 얼마 되지도 않은 인생 살아오면서도 느낀 건 그런 감정에 상처 주는거 싫더라. 너한테 상처 주기 싫고, 나도 상처 받기 싫다. 무슨 말인지 알아?"

"..."

"성희 네가 관두면 우리 팀 안 돌아간다. 난 이 회사가 언제부턴가 직장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거든. 너 빠지면 우리 팀 작살 날거고 우리 팀, 완전히 무너진다. 그걸 알고도 관두고 싶으면 관둬라."

"하.."

"이렇게 한번 붙잡았으면 너도 내 손 잡아. 딴생각하지 말고."

* * *

성희를 택시 태워서 집으로 보내고 나는 홀로 거리를 걸었다.

사내 생활하면서 누구 좋아해 본 경험 나도 있었다.

인턴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정직원 여자애였다.

그때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에게 사심을 가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내게 잘해주고 인턴의 설움을 같이 공감해주는 게 고마웠다.

고마워서 고백도 했다.

그랬더니 내 앞에서 울었다.

그리고 알게 된 건 본인이 나의 인턴 생활 인사 담당자라며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 예의 있게 말한 탓에 그때의 쪽팔림은 아직도 이불 킥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일뿐만 아니라 숱하게 많았다.

그래서 난 아직도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줄 때 그 감정에 상처를 받기도, 주기가 싫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건 내 잘못이다.

특히 매력 있고 부하 직원 잘 챙기고 리더쉽있고 게다가 잘생겼으면 좋아할 만하지 않을까.

로또 1등이라는 이능으로 매력을 후리고 다녔으니 이건 백프로 내 책임.

그리고 성희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임자가 있었다.

크흠.

* * *

택시를 타고 영동대교를 지날 때 내가 앞으로 살게 될 아파트를 지나쳤다.

밤마다 이런 한강의 야경을 보며 와인 한잔을 할 생각에 내 몸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이제 로또 번호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런데 당최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어차피 휴먼매니저가 알려주는 로또 1등의 번호만 있어도 내가 당첨되고 중복으로 해먹을 수 있는데 말이다.

아니면 로또를 강제 이월 시켜서 독식 할 수 있는 시스템인가?

그런데 요즘 로또는 확률적으로 매주 로또 당첨자가 10명씩은 나와 줘야만 하는 구조다.

이월을 시키기 위해 번호를 복잡 단순하게 정한다고 한들, 요즘 로또 구매율을 보자면 이월해서 독식하는 건 어렵다.

내가 일부러 1부터 6까지 쓴다고 해도 1등이 나올 것이고, 45부터 역순으로 쓴다고 해도 1등은 나올것 같다.

결정적으로 매주 천억 원 이상이 팔려나가는 판국에 1부터 45까지 총 810만 개의 조합에서 이월이 가능한 숫자를 찾는 건 기적이 아닐까.

그래서

그 기적을 이뤄보는거다.

* * *

택시가 쌍문동에 가까워질 때쯤 메인퀘스트 창이 발현됐다.

[김도일님의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를 발현하겠습니다.]

[인류 재생 프로그램의 다섯 번째 미션]

[자아실현의 욕구]

「완료 보상 1000UNI」

「제한 시간 무제한」

[기본 욕구 마지막 퀘스트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퀘스트였다.

게다가 마지막 퀘스트라는 게 뭘 뜻하는 거지?

[이번 퀘스트를 마지막으로 인간의 기본 욕구 퀘스트는 종료됩니다.]

음.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다소 난해한 퀘스트다..

이번 퀘스트만 깨면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기본 욕구 퀘스트는 완료하는 상황.

자아실현을 완료하게 되면 앞으로 어떤 퀘스트가 주어질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아실현의 의미가 뭐지?'

[자아실현이란 김도일님의 잠재된 능력과 자질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욕구입니다.]

'애매한데... 대체 어떻게 해야 퀘스트를 깰 수가 있는거지?'

[현재 시스템 점검 중입니다.]

'대답 안 해?'

[시스템 점검 중입니다.]

현재 내가 완료한 퀘스트를 되짚어 보면 생리적 욕구, 소속 및 애정욕구, 안전 욕구, 존경의 욕구, 그리고 이제 자아실현의 욕구였다.

생리적 욕구를 통해 내가 집을 얻고 일상생활을 갖춰 나갔다.

소속 및 애정욕구를 통해 내가 직장을 가지며 사회생활을 해나갔고

안전 욕구를 통해 내 스스로 안전해지기 위한 방법을 터득했고, 직장의 산재 예방에 힘썼다.

그리고 존경의 욕구를 실현하여 직장과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지영씨를 만났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며 로또를 레벨업 시킬 수가 있었다.

난 대체 뭘 더해야 하는 거지?

때마침 택시는 다가구 주택가 인근에 도착했다.

계산하고 내린 뒤 아무 생각 없이 언덕을 올려다봤다.

참. 높고. 길었다.

그래서 매번 택시 기사한테 언덕 꼭대기까지 부탁한다고 얘기하려다가도 꼭대기는 차를 돌릴 수가 없다.

미안한 마음에 매번 주택가 입구에서 내렸다.

동네 초입에 있는 돼지복권방 가게 앞에서 또다시 소주를 나발 불고 있는 김씨 아저씨가 보였다.

저 아저씨.

매일 저러고 있다. 지겹지도 않을까.

과거 돼지 복권방 사장에게 들었던바 사업에 실패하여 엄청난 빚에 쪼들리며 산다고 들었다.

빚도 빚 나름이다.

회생 절차 밟아서 다달이 일정 금액을 상환하거나 파산 선고해서 빈털터리라는 걸 입증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저 아저씨는 도의를 내세우며 갚겠다고 했고 회생 절차 당시 일부 금액을 누락했다.

그리고 간혹 그 말을 떳떳하게 얘기를 하곤 했다.

빚쟁이가 채권자를 위해?

그 빚이 내가 듣기론 몇 억이라고 들었는데 말이다.

그 빚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매일 술만 퍼마시고 로또에 인생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돼지 복권방에서 연이어 터지는 중복 당첨자 탓에 김씨 아저씨의 인생이 더 비참해질 수밖에.

술에 찌든 저 모습을 보니 내게 이능이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를 무시하고 언덕을 오르고 있을 때 멀리서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어두운 밤길이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저학년의 여자 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꼭 모녀 사이 같았다.

모녀는 손을 잡고 밤길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평상에 쓰러져 잠든 김씨 아저씨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흥미가 돋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일어나요."

아줌마는 아저씨를 이리저리 흔들어댔지만 이미 인사불성인 김씨아저씨는 제 몸을 쉬이 가누지 못했다.

아줌마는 하는 수 없이 아저씨를 부축하여 끌고 가려 하지만 저 가녀린 몸뚱이로 성인 남성을 끌고 가는 게 쉽나.

어린 여자아이까지 달라붙어 보는데 이내 아저씨는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아저씨는 바닥을 뒹굴며 풀린 눈과 꼬인 혀로 자신의 아내를 보며 웃어댔다.

"미안해."

하아.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줌마에게 다가갔고, 김씨 아저씨를 부축하여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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