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4호선이었다.
혜화역 인근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며 그곳에서 오랜 기간 살았다고 얘기했다.
"같이 가요. 밤길인데.."
"아뇨. 괜찮아요. 도일씨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
그럴 수 없지.
지영씨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 내게 손짓 한번 하고는 내렸고, 나도 뒤따라 그녀 뒤에 탈싹 달라붙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밤길은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지영씨와 나는 우산 하나씩 쓰며 언덕을 올랐다.
그녀의 옷깃과 생머리 머리카락에 비가 젖어 흘러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가 멈춰선 곳은 벽으로 둘러싸여 내부를 볼 수 없는 저택 앞이었다.
"다 왔어요. 고마워요. 도일씨."
"기분은 어때요?"
"덕분에 훌훌 털었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제가 집에 들어가서 택시 불러 드릴게요. 금방 도착할 거예요."
그녀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영씨가 집으로 들어간 뒤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택시 한 대가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 예전처럼 쓸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영씨를 집에 데려다주며 짐작한바 옛날에 내가 살던 달동네를 상상했는데, 지영씨는 저택에 살고 있었다.
담장 너머 우뚝 솟은 조경 나무들만 봐도 평범한 집안의 자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걱정 되는 것은
그녀와 상담을 받는 동안 내가 했던 말들이 그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거다.
평범하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그녀에게 환상을 심어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아.
다가구 밀집한 입구에서 택시를 내렸다.
홀로 집으로 향하는 길에 문 닫힌 돼지 복권방 앞을 지나쳤다.
현수막에 크게 쓰인 로또 1등 2회 당첨, 게다가 10회 중복 5회 중복
현수막 길이도 엄청나게 길었다.
이건 마치 시골에서 고시생 장원급제한 수준이다.
개천에서 용 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복권방 평상에서 소주를 나발 불고 있는 김씨 아저씨가 보였다.
저 아저씨.
돼지 복권방이 생긴 이래 계속 로또를 샀던 아저씨였다.
나는 그 아저씨를 지나치려는 찰나 대뜸 소릴 질러댔다.
"에라이!"
"...?"
"내가 못 갚을 거 같아? 다 갚아. 이것들아!"
"뭡니까?"
"너 이 새끼. 크하..네가 인생을 아러?"
"..."
"다 갚는다고 이것드라. 내가! 다 갚는다고!"
그러곤 다시 평상에 퍼질러 잠에 빠져 들었다.
대체 뭐하는 인간이지 싶다.
이제 다음 주면 이사다.
이 지긋지긋한 동네도 이제 굿바이다.
* * *
‘깨톡’
‘깨톡’
‘깨톡’
오랜만에 겪는 진한 숙취 탓에 늦잠을 자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부랴부랴 씻고 뛰어나갔을 텐데 몰려오는 숙취 탓에 침대에 앉아 머리를 감싸 올렸다.
이럴 때 꿀물 한잔 타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후우.
휴대폰을 들어 깨톡 내용을 확인했다.
물류1팀의 깨톡방이었다.
[과장님 인천 현장에서 분실건 발생이요. 앱패드 150만 원짜리. 어떡하죠?]
[곧 가.]
[인천으로 바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 새벽에 발생?]
[네. 패킹하시는 분이 현재 의심 받는 상황입니다.]
[지금 상황은?]
[본사에서 잡아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경찰은 아직 안 온 거지?]
[네. 현장 사원은 절대 본인이 안 가져갔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거 너무 빼박인데....]
[그래. 또 다른 건?]
[일산 현장에서 하차 인원 한 명이 박스가 떨어져 발등 부상당했습니다.]
[고현준이를 일산으로 보내고 내가 인천으로 갈게]
[넵!]
[사무실 잘 부탁할게. 그리고 정주임]
[네 출퇴근 자유로우신 과장님~]
[다음 주에 신입 사원 오기로 했으니까 네가 맡아. 신상 보내 줄 테니까 다음 주 출근 일정 잡아주고 알았냐?]
[네~ 알겠습니다아~]
일이 터져버렸다.
패킹 과정에서 150만 원 고가 상품이 분실 됐다면 쉽게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집품이란 간단히 얘기하면 실시간으로 주문된 고객의 상품을 카트에 담는 일이고, 카트에 담긴 제품을 포장하는 일을 패킹이라고 한다.
워낙 대형센터라 CCTV가 많기 때문에 사각지대가 없다.
만약 물증이 확실히 잡힌다면 내가 갈 필요 없이 경찰이 와서 현행범으로 체포 될 텐데, CCTV를 돌려봐도 애매한 구석이 많은 듯했다.
나는 인천 반장에게 전화했다.
"반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분실 상품 저희 사원이 절도한 게 맞습니까?"
"지금 본사에서도 CCTV로 확인중이긴 한데..하아. 이거 맞는 것 같기도 하고..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참 애매하네요."
"지금 상황은요?"
"본인이 훔쳤다고 깔끔하게 인정하면 정리될 텐데...발뺌하시네요. 앱패드 박스 안에 실 제품은 없어지고 스티로폼 박스만 발견됐답니다."
"반장님. 그거 확실합니까?"
"네?"
"아니 그러니까. 우리 현장 사원이 가져간 걸 봤냐고요."
"저희 조장이 봤다고는 하는데..확실 한건 아닙니다. 일단 계속 압박중입니다."
"반장님."
"네..?"
"정신 차리세요. 현재 정황만 있는 상황인데 무슨 근거로 압박을 합니까? 저 올 때까지 현장 관리자들뿐만 아니라 본사 직원들 전부! 압박 못 하게 하세요. 아셨어요?"
"네.."
"금방 갑니다."
너..설마 아니지?
택시를 타고 인천으로 곧장 향했다.
대형물류센터라 하루에도 수백 명이 오가는 곳이기 때문에 사건 사고가 잦게 발생했다.
게 중에 사원들과 마찰로 인한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따금 상품 절도로 인한 경찰들도 오가곤 하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최부장이 1팀 책임자였을 때 인천 현장을 자주 다닐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반장을 비롯하여 부반장, 조장들이 늦은 새벽까지 근무했음에도 퇴근을 못 하고 있었다.
관리자들이 본사 직원 몇 명과 담배를 태우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들에게 다가가자 총괄 반장 김재훈이가 내게 인사했다.
"어떻게 됐어요?"
"지금 안에 계시는 데 끝까지.. 별말씀 안 하시네요."
"들어가 보죠."
본사 직원 몇몇이 나를 보며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들도 그럴 것이
어차피 누군가의 귀책을 잡고 사건을 빨리 마무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휴게실 내부는 이미 현장 사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라 한산했다.
아줌마 홀로 묵묵히 앉아만 있었고 창문 너머로 반장들과 조반장들이 상황을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내부를 보지 못하도록 블라인드를 쳐버렸다.
그리고 아줌마와 대면했다.
"사원님"
아줌마는 멍하니 앉아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고 내 말에도 대꾸가 없었다. 그녀의 명찰을 봤다. 사원의 이름은 ‘최지숙’
"워킹휴먼 총 책임자입니다. 관리자들이 사원님께 너무 몰아붙인 거 죄송합니다."
"제가 안 가져갔어요."
"맞아요. 저도 알아요."
"제가 가져갔으면 제 가방에 있겠죠. 저를 왜 잡아두는 거죠."
"..."
"저 아니에요.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돼요!"
"..."
그때 바깥에서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본사 직원 한 명이 휴게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줌마! 분명히 아줌마가 앱패드 박스 까는 걸 현장 조장이 봤다잖아요! 이미 봉인테입까지 뜯어진 상태에서. 이거 너무 발뺌하는 거 아닙니까?"
그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김경환.
"김경환씨. 저희 현장 사원분이 안 가져갔다고 하잖습니까. 들어가 계세요."
"하아..아니 과장님! 지금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해결한다고요. 나가주시겠어요?"
김경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문을 열고 나갔다.
"억울한 거 있으면 얘기해보세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사원님이 앱패드 박스를 까는 거 봤다는데요."
"저도 이걸로 밥벌이 해 먹은 지 6개월 됐어요. 게다가 앱패드 정도는 제가 자주 포장해봐서 안다고요. 그런데 제가 앱패드를 박스 포장하려고 들어보니까 너무 가벼운 거예요. 그래서..그래서 한번 열어봤더니 안에 내용물은 없고 스티리폼만 있는 거예요. 그때 그냥 얘기했으면 됐는데 포장해야 될 제품들이 너무 밀려 있어서..얘기를 안 하고 그냥 포장해서 보내버렸어요."
"아.. 그걸 저희 조장이 확인했더니 실물이 사라진 걸 알게 됐네요?"
"네.."
아줌마의 말을 본사에 명확히 항변하기 위해서는 쿠몬의 독특한 물류시스템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서 쿠몬과 계약당시 최부장과 나는 직접 출입고 상하차 전부 다 해봤다. 심지어 영세한 터미널까지 가서 분류하는 과정까지 지켜봤다.
그런데.
솔직히 답은 없다.
이게 어디서부터 봉인씰이 뜯겨서 누군가 훔쳐갔고 그게 어떻게 물류센터에 입고가 돼서 출고가 되고 배송까지 됐고, 고객이 빈 박스를 받았는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한 수준.
하지만 분명한 건 비록 도급업체 직원이지만 아줌마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는 거다.
나는 본사 직원 김경환과 함께 흡연실로 향했다.
"아줌마 말을 믿는 거 아니죠?"
"믿어요. 저희 직원이잖습니까. 현장 CCTV전부 돌려 봤나요? 입고 과정 확인하셨고요?"
"...지금 그럴 시간이..저도 지금 퇴근"
"아니 그러니까. 왜 저희 현장 조장말만 듣고 이렇게 몰아붙이냐고요. CCTV전부 돌리고 확실한 증거가 잡힌 것도 아니면서. 일단 제가 조장하고 얘기해 볼 테니까. 경환씨? 경환씨는 본사 직원들하고 CCTV 전부 돌려봐요. 입고 과정부터 집품 과정까지 전부."
"과장님. 지금 저한테 지시하는 겁니까?"
"지시가 아니라 항변하는 겁니다. 증거 잡히면 그때 경찰 불러요."
"..."
그리고 나는 최지숙 사원이 앱패드의 박스를 뜯는 걸 목격했다는 현장 조장에게 향했다.
"조장 단지 몇 달 됐어요?"
"3개월 됐어요. 분명히 제가 보긴 했습니다."
"알아요. 봤겠죠. 그래서 이렇게 사달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최지숙 사원님은 본인이 안 가져갔다고 하는데요."
"다들 그러죠. 제가 현장 사원일 때도 절도건 발생했을 때 대부분 발뺌했어요."
"조장님? 150만원 물건이에요. 이거 확실히 말씀 못 하면 저 아줌마 인생 빨간 줄 그이는 거 알아요?"
"하아.."
"확실히 얘기해요."
내 말을 듣던 조장이 고개를 한번 떨구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며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봤어요. 분명히. 제가 본 걸 봤다고 하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되는 겁니까."
"그런데 왜 아줌마한테 물건이 없는 거죠?"
"제 경험상 분명히 어딘가에 숨겨 놨을 거예요. 그리고 상황이 얌전해지면 그때 몰래 가져가지 않겠어요? 이런 일. 솔직히 한두 번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도 확신하는 거고 틀린 적이 없었어요."
"아. 숨겨 놨다?"
"그렇죠."
"그렇게 잘 아는 조장께서 왜 그걸 알고서도 가만히 있습니까?"
"네?"
나는 관리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근무시간 파악해서 지숙 사원님 이동 동선 CCTV로 전부 파악하세요. 만약에 사원님이 일하는 동선에서 앱패드가 나오지 않는다면 저희 책임이 없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