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지만 집품은 발이 아프고 패킹은 손놀림이 빨라야 한다.
공통점은 노동 강도가 일반 상하차 일보다 약하기 때문에 여성이 80%를 차지할 정도.
그래서 수년 전 내가 대리였을 때 이 현장에 오면 기 빨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줌마들이 엄청 많은 현장이다.
[이번 주 일정 잡아서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파이팅]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네 번째 메인 퀘스트 존경 욕구의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9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크크 누군지 모를 제3자로부터 존경을 얻어 이제 10%만 채우면 로또 레벨을 6까지 달성할 수가 있었다.
* * *
지영씨를 만나기 위해 약속 시각보다 30분은 일찍 강남역 4번 출구 앞에서 기다렸다.
설렘보다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영씨가 대체 왜 갑자기 약속을 잡았는지 머릿속을 아무리 돌려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데이트 약속을 취소하기 위해서?
아니면 내가 너무 부담스러우니 예의상 대면으로 퇴짜를 놓기 위해?
하아.
그때 멀리서 지영씨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춥죠?"
"아뇨. 이제 날이 많이 풀려서요. 괜찮아요."
그녀와 카페로 향했다.
지영씨는 내 카드까지 뺏어가며 본인이 커피를 계산했다.
라떼 두 개를 시켜 지영씨와 카페 2층으로 올라갔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지영씨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저 웃음이 예전같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일전 얘기 했던 부분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도일씨가 말씀해주신 부분 사실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거든요."
"..."
"그래서 확신이 섰을 때 행동하고 도일씨한테 빨리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네..말씀해주세요."
나는 커피를 마시며 애써 침착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지영씨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덤덤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일..그만두게 됐어요."
"...!"
"도일씨가 속마음을 내뱉으며 직장 생활을 한다고 했을 때, 사실 저도 그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그간 제가 일적으로 너무 부당한 일을 많이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얘기해버렸어요."
아뿔싸.
"아..괜히 저 때문에..."
"아뇨 아뇨. 도일씨 덕분에 제가 일을 관둘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게 감사해서 제가 커피 사드리고 싶었어요. 이렇게 속 시원했던 적 없었거든요."
"일이 너무 힘들고 지치셨나 봐요.."
"아..네."
지영씨가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는 기색이 보였다.
"제가 죄송하네요..도일씨..저보다 더 뛰어나고 좋은 상담사 소개 시켜드릴게요. 저는 아무래도 이런 일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요. 지영씨 덕분에 제가 얼마나 많은 힘이 됐는데요."
"말씀이라도 감사해요.. 그래도 제 주위에 경력되시는 분들 많으세요.. 말씀해주시면 제가 최대한 알아봐 드릴게요."
"..."
지영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커피잔을 내려놨다.
"지영씨.."
"네?"
"이번 주말에 영화 약속 잡은 거..."
"아.."
"내일 보면 안 될까요."
제가 웃고 싶을 때만 웃을래요
사실 퇴사한 날 누군가 옆에서 위로를 해줘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래서 그녀와 함께 포장마차에 왔다.
그녀도 싫은 기색이 딱히 없었다.
[알코올 분해 SKILL]
[동기화 해제를 완료하였습니다.]
언제든 술에 취하지 않는 나의 알코올분해 스킬을 해제시켜버렸다.
취중진담.
머릿속이 너무 맑게 돌아가는 게 싫었다. 이성 좀 잃어도 되고 술김에 내뱉는 속마음 정도 언제든 환영이다.
그녀와 포장마차에 들어가 어묵탕과 오돌뼈,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과거 내가 풋풋한 시절 첫 만남 때는 무조건 영화를 보고 시작했다.
언제든 영화를 이용해 화두를 띄워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었고 액션이냐 멜로냐 코미디냐에 따라 그녀의 취향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가 있었다.
첫 만남 때 영화를 보는 것은 내게 습관, 루틴과 같았다.
그런데 지영씨는 그런 나의 루틴이 무색하게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이건 내담자와 상담자의 대화가 아닌 그저 어느 평범한 남녀 사이의 모습이었다.
"와아. 완전 쓰레기네요? 어떻게 지영씨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그죠? 그죠? 제가 이상한 거 아니죠? 하아. 진짜 제가 얼마나 억울했는데. 제가 그래서 막 뭐라고 그랬더니 팀장님이 저한테 소릴 지르는 거 있죠?"
"소리를 질렀다고요? 어떻게요?"
"네가 그따위로 성질을 부리니까 손님이 없데요. 매일 참고 웃으면서 일했는데. 결국은 그런 소리 듣네요. 그래서 저도 맞받아쳤어요. 팀장이면 팀장답게 굴라고. 직원들 갈취할 생각 말고."
"속 시원했어요?"
"그럼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게 이렇게 속이 시원하고 뻥 뚫리는 지 처음 알았어요. 아니. 살면서 처음이었다니까요."
"팀장이 지영씨 복싱 배운 거 알았으면 몸 사렸어야 했을 텐데요."
"조심해야죠. 원투 스트레이트."
술 한 잔 들어간 지영씨.
생각보다 발랄했다.
"하아. 지영씨는 좋겠어요. 내일 출근도 안 해도 되고."
"도일씨. 사실 제가 살면서 일을 쉬어본 적이 없어요."
"정말요? 어떻게 그래요?"
"그러니까요. 사실 이런 상담일이란 게 고객들 관리도 필수거든요. 그래서 제가 직장을 옮겨도 저 따라서 오는 내담자분들도 계시니까.. 맘 편히 쉬질 못하겠더라고요."
"아.. 그러셨구나. 잘됐네. 이번에 푹 쉬면 되겠네요. 계획 잡아 놓은 건 있어요?"
"아뇨. 그냥 잠만 자려고요. 아무도 신경 안 쓰고 푸욱 쓰러지고 싶어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셔야죠."
"제가 개인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거 싫어하는 타입이라서요. 여행보다 TV가 더 좋아요."
"와. 정말요? 저는 TV 없으면 못 살아요. 저희 집은 방이 좁은데 제 몸집만한 TV가 있거든요? 그거 보고 있으면 제가 TV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 여행 가고 싶으면 너튜브에서 여행 너튜버 보고"
지영씨와 소주잔을 부딪쳐 한 잔 마셨다. 이 취기, 정말 오랜만이다.
스멀스멀 알코올 향이 콧속에 맴돌았다.
"도일씨."
"네?"
"도일씨는 제가 가만히 보면.. 참 특별해요."
"제가요?"
"제가 많은 사람과 상담을 하면서..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거든요. 뭐라고 할까요. 분명히 내가 리드를 해서 도일씨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이겨내게 해야 하는데...제가 치유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도일씨.. 정체가 뭐예요?"
지영씨가 조금 술기운이 오른 듯했다. 정체가 뭐냐고 묻는 말에 로또1등이 제일 쉬운 남자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영씨 만나고 깨달았어요. 사람 마음 참 쉽게 변한다."
"네..?"
"미래도 없고 앞도 안 보이고, 깜깜하고, 그런 인생 살다가도, 한 번에 숨통이 트여버리니까. 지영씨를 만난 이후로 그런 기억들 전부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같고... 전부 지영씨 덕분이에요."
"저 그런 능력자 아닙니다. 제 감정도 못 감추는 아주 나약한 상담사예요."
"아니요. 제가 상담실에 들어갈 때마다, 제 눈에 뭐가 보였는지 아세요?"
"...?"
"지영씨 표정이요. 그 표정, 매일 웃고 있었어요. 제가 지영씨를 결혼식장에 마주한 날에도, 상담실에 처음 들어간 날에도, 항상 절보고 웃어줬어요."
"아.."
"내가 직장에 가든, 집에 들어가든, 어딜 가든..나를 웃으며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 위로가 됐어요."
별안간 지영씨는 소주 한 잔을 마신 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도일씨 그거 제 직업병이예요. 웃고 감정에 공감해주고, 같이 슬퍼해주고, 긍정의 힘 실어주고.. 그래서 매번 웃게 됐어요."
"아.."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어요. 제가 살면서 상사한테 큰소리 낸 적도 처음이고, 내 감정 솔직히 말한 것도 처음이고, 다 처음이에요. 이 나이 먹도록. 우습죠?"
"..."
"이제 제가 웃고 싶을 때만 웃을래요."
"그럼요."
본인이 웃고 싶을 때 웃는 거지 뭐.
이제 테이블 위에 쌓인 소주는 3병.
내 주량을 서서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이모 소주 한 병 주세요."
소주 한 병을 더 시킨 뒤 나는 뚜껑을 따고 지영씨의 잔에 따라줬다.
"주량이 어떻게 돼요? 무리하시는 거 아니죠?"
"흐흐. 저 강해요. 도일씨가 걱정인데요. 이미 볼이 빨개지셔서."
"제가요?"
나는 휴대폰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혹시나 하고 봤는데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도일씨 집에 가셔야겠어요. 에이. 오늘은 저 혼자 퇴사 기념으로 마셔야죠."
"잔 비었어요."
지영씨가 내게 술을 따라줬다.
그녀는 분위기 좋은 포차를 신기한 듯 둘러봤다.
그때
포장마차 이모가 오랜만에 젊은 사람들이 와서 소주를 마시는 게 신기한 듯 계란말이를 턱 내놨다.
"술을 더 먹으란 건 아니고..그냥 예뻐서 드리는 거야. 천천히 자셔."
"감사합니다. 어머님."
지영씨는 아주 신이 났다.
퇴사 기념 파티하는 것 같다고 좋아했다.
"여기 좋죠? 제가 여길 다니면서 언젠가 꼭 한번 와봐야지 했거든요."
"그러니까요. 이제 이런 곳도 서서히 사라져 간다는 게 아쉬울 뿐이죠."
"비나 왔으면 좋겠다. 그죠? 비 올 때 포차가 예쁜데.."
"어?"
때마침 비가 오기 시작했다.
지영씨는 토끼눈을 뜨며 나를 바라봤고, 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영씨가 얘기하니까 진짜 비가 오네요."
"그러게요."
"멈추게 할 순 있어요? 저 우산 없는데."
"멈춰라 얍!"
지영씨.. 취했다.
나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잠시 포차 밖을 나갔다.
지영씨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담배를 입에 한 대 물고 후우 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 탓에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못하고 뛰어다녔다.
이제 곧 막차가 끊길 시간인데 건물 빌딩 사이로 호텔들이 보였다.
20분 뒤면...
지하철은 끊긴다.
그걸 알면서도..나는 술을 계속 마셔댔다.
지영씨도 막차가 끊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때 지영씨가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너무 놀란 탓에 담배를 급하게 꺼버렸다.
지영씨는 일부러 못 본 척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 우수수 떨어지는 비, 빌딩 숲 사이로 떨어지는 비를 아무 말 없이 감상했다.
"아. 좋다. 매일 보던 건물인데 오늘따라 그림 같네요."
"그러게요."
"지영씨."
"네?"
술 한 잔 더 하자고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네온사인에 비친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내 이성을 붙잡았다.
"막차 끊겨요."
정말 운 좋게도 지영씨와 집으로 향하는 방향이 비슷했다.
그녀도 4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