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상담 전에 커피 사갈게요. 혹시 좋아하시는 게..?]
[괜찮습니다 도일씨^^ 그냥 오셔도 돼요.]
[그러면 아메리카노 따듯한 거 사갈게요.]
[감사합니다^^]
월요일은 지영씨와 상담을 받는 이유로 설렜고, 평일을 보내면 토요일에 로또 당첨 방송 때문에 설렜다.
일주일이 설렘으로 가득하다.
지영씨는 저번 주에 나와 상담을 했을 때 관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라고 조언했다.
저번 주는 정말 폭풍처럼 지나가 버린 시간이라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사내 생활은 이제 놀이터처럼 재밌어질 예정이라 업무 부담이 전혀 없었고
내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가족들도 잘살고 있었다.
상담 건물 옆에 위치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캐리어에 담아 상담실로 향했다.
상담실 내부로 들어가면 1인용 소파가 있었고 그 앞에 지영씨의 사무용 책상이 있었다.
지영씨는 항상 저 자리에 앉아서 나를 웃는 얼굴로 바라봤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녀와 1:1로 대면했다.
그녀는 노트북으로 저번 주의 상담일지를 살피며 화두를 띄웠다.
"저번 주는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직장에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퇴사했어요. 그것도 세 명이나."
황부장 박찬혁 박대리가 트리플로 해고당했다.
내 눈 앞 걸리적거리는 인간들이 지들끼리 치고받으며 뒤통수 날리더니 결국 파국이란 결말을 맺었다.
이건 로또보다 더 귀한 행운 아닌가.
"어떻게 그런 행운이"
"그러니까요. 사실 제가 언젠가 쳐내고 싶었던 인간들이라서, 굉장히 큰 행운이죠."
"좀 어때요? 회사 생활은?"
"맘 편하죠. 사실 제가 일을 하면서 크게 스트레스 받는 게 많이 없거든요."
"도일씨 가만 보면 스트레스도 안 받고 굉장히 여유롭게 사시는 것 같은데요."
"방법이 있습니다. 굉장히 어렵지만 한 번 하면 속 시원하죠."
"혹시 저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속마음을 내뱉어 버리는 거죠. 뇌를 거치지 않습니다. 그냥 말해버립니다."
"아하."
그녀는 노트북에 타자를 쳐댔다.
안경을 스윽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면 주위 사원들이 불편해하지 않나요?"
"아뇨.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하는 사원들이 많아서요. 제가 대신해주는 경우니까요."
"그거 정말 힘든 일인데. 도일씨 보면 굉장히 용기 있으시네요..?"
"그런데. 저도 나름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스트레스라고 말씀드리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뭐죠..?"
"제 주위에는 저를 위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요."
"아.."
"사람들이 저만 의지하는 것 같은 기분..혹시 아시나요?"
"알죠. 왜 모르겠어요. 특히 저 같은 경우 가족들이 그런 경우죠."
"저는 전부 다 그래요. 제 주위 사람들 전부 저한테 기대는 것 같아요."
"아.. 그 부담을 떨쳐 버리고 싶으신가 봐요?"
"제가 바라는 건.. 저도 의지하고 옆에 기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죠. 물질적인 것보다 심리적으로요. 이게 굉장히 외롭다고 할까요? 선생님은 남자 친구 있으세요?"
"아니요. 아쉽게도 이 나이 먹도록 연애를 많이 못해 봤네요."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돌려 말한 건 내가 그만큼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무턱대고 영화 한 편 보자고 얘기했다가 퇴짜 맞으면 그때부턴 그녀와 난 어색한 사이가 되고 서로 불편해지겠지.
일단 남친이 없다는 데에 나는 큰 희망을 걸었다.
"선생님."
"네?"
"예전에 복싱을 배운다고 했죠?"
"도일씨 그거 어떻게 기억하셨어요?"
"여러 사람에게 감정 소모를 하고 그 감정을 받아주니까요. 그래서 그걸 복싱으로 날려버리는 것 같았어요."
"어쩌죠. 이거 자리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사실 저도 그래요. 뭔가 앞뒤 꽉 막힌 일이 발생했을 때 뭔가를 한 대 쥐어박으면 스트레스가 풀렸거든요. 심지어 옛날에 저희 집 대문 앞에 샌드백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영씨가 복싱을 한다고 했을 때 나름 지영씨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저희 집 마당에도 샌드백이.."
지영씨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노트북 상담일지에 타자를 쳐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본론을 얘기해야 할 때.
"선생님이 저번 주에 말씀하셨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
"이번 주말에 저랑 영화 한 편 보시겠어요?"
"...!"
* * *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는 없다고 하지만 10번 찍어 보는 것도 힘들고 지치고 괴롭다.
그래서 대체 몇 번을 찍어봐야 넘어가는지 알게 되는 능력이 있다면 로또보다 더 귀한 능력이 아닐까.
그래서 지영씨의 콜을 듣고 내가 이렇게 기쁘고 설렜나 보다.
회사로 향하는 길이 너무 가벼웠다.
내 연애 스킬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기쁨과 내 추파를 받아준 지영씨가 고마웠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는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이라 다들 식사를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 앉아 최부장의 빈자리와 사원들의 빈자리를 둘러봤다.
저번 주 감사 사건으로 미처 하지 못한 밀린 업무가 많았는지 서류더미들이 쌓여 있었다.
고현준이는 인천 현장을 살피기 위해 외근 업무를 나갔고 오대리의 책상에는 저번 주에 마무리 못한 현장별 업무 결과 보고서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정주임은 역시 사방에 알록달록한 포스트잇 떡칠이다.
구인 담당이라 포스트잇에는 인력자의 성함과 특징들을 간략히 써놓은 게 보였다.
그리고 최부장의 저 빈자리.
매번 저 낡고 헤진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할 일이 없으면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잠을 잤다.
언젠가 최부장의 낡아빠진 의자를 보고 있자면 한 번쯤 바꿔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죽은 완전히 다 벗겨져서 누런 스펀지가 이리저리 튀어나온 의자.
중고시장에 내놔도 아무도 안 사갈 폐급의자.
나는 의자를 뒤로 젖혀 책상에 발을 올린 채 머리를 깍지 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예전에 최부장이 얘기했던 부분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절박함.
절박함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 최부장은 본인의 살과 뼈를 깎아가며 일했다.
최부장의 방식을 저버려서는 안 되는 일.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내 자리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저번 주 구인구직사이트에 공고했던 경력/신입 사원을 채용하기 위한 이력서를 검토해야만 했다.
물류2팀도 인원이 한 번에 3명이 빠져버린 상황이라서 구인이 시급했다.
경력직 이력서 8개
신입 이력서 4개
총 12개의 이력서를 출력하여 하나하나 살폈다.
그리고 문득.
나의 입사지원 이력서가 궁금했다.
자리에 일어나 사원들의 근로계약서를 모두 모아놓은 서류함으로 향했고 과거 5년 전 작성했던 나의 이력서를 찾았다.
참.
별것 없다.
물론 내가 숱하게 경험해온 알바 경력 따위는 써놓지 않았지만 인 서울 중상위 대학에 나와서 졸업 후 대기업에서 인턴 생활 1년 했다.
계약직 전환을 하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을 때가 29살.
인턴 1년의 설움을 이겨내고 계약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을 걸었건만 아주 당당히 계약 해지됐다.
딸리는 스펙 탓을 하며 남들 다가는 어학연수 좀 다녀올 겸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물류센터를 전전하다 이런 일을 알게 됐고 살포시 이력서를 넣었었다.
그게 불과 5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내 이력서와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비교했다.
나보다 월등하다.
이건 팩트다.
대외활동부터 자격증, 경력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대단한 친구들도 있었다.
이정도 스펙을 가진 친구들이 대기업을 지원하지 않고 워킹휴먼에 지원한다는 게 삶이 더 팍팍해졌다는 방증이겠지.
사실 우리 회사는 학벌과 경력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사람 관리 잘하고 구직자 얘기 잘 들어주고 사무업무 기본 자격증만 있으면 충분히 어렵지 않게 근무 가능한 수준이다.
가장 중요한건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었다.
마치 콜센터 담당 직원처럼 구직자가 어떤 일을 원하고 어디서 일을 하길 원하는 지 잘 들어주고 관리해주는 게 주된 업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구직자들의 목소리를 다 들어주다간 본인이 지쳐서 기 빠진다.
간혹 구직자들 중에 빌런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잘 못 걸렸다가는 머리채 잡히고 싸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빌런들 상대하는 게 만만치가 않다.
예전에 내가 겪은 일 중에 하나가 실제로 살인 협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술 취한 목소리로 일자리 안주면 죽여 버린다고 했었다.
그래서 적당히 싸가지와 성질이 있어야 본인이 이런 일을 하며 오래 버틸 수가 있다.
지원자들이 정성스럽게 작성한 이력서가 무색해지지 않도록 그들의 자기소개서와 경력사항들을 잘 살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이력 한 장.
26살의 여자였는데 경력 란에 쓰인 짧은 단어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팔씨름 대회 수상?
팔씨름..?
나는 최대한 빨리 면접 일정을 잡아야만 했다.
그때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사원들이 줄줄이 사무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주임과 눈이 마주쳤다.
주말에 클럽에서 마주친 뒤로 조금 어색한 기운이 감돌 것 같았지만 정주임은 내게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게 캔 커피 하나를 건넸다.
"뭐야?"
"드세요."
그리고 캔 커피에 붙여진 작은 포스트잇.
-케이크 잘 먹었어요.
하아.
나는 정주임을 끌고 흡연실로 향했다.
정주임은 음흉한 미소를 내지으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역시 정주임이 밤에만 핀다는 담배는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뭐가 어떻게 돼."
"그 여자요.. 라운지 바에서 한 참 얘기하더니, 좋은 밤 보내셨어요?"
"...술만 먹고 헤어졌지.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몰라. 그냥 대화만 했어."
"아. 그러셨구나. 대화만 하셨구나."
"성인끼리 이러지 맙시다. 응? 사람이 고삐 풀리면 가끔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그럼요. 그럴 수 있죠. 저도 과장님 덕분에 아주 잘 놀았답니다."
"그래. 잘 했네. 그럼 된 거야."
"과장님."
"응?"
정주임이 뭔가를 굉장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