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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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감을 가져야만 클럽에서 여자를 끌고 나올 수 있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는 거지.

나는 이걸 어떻게 했냐면 기본적으로 소위 잘나간다는 클럽은 어느 정도 물관리를 했기 때문에 잘생긴 애들이나 예쁜 애들 수두룩했다. 대부분 비슷하게 생기고 거기서 거기다.

거기에서 내가 당당하게 목적을 쟁취하려면 결국 내가 이 수컷 중에 1등이라고 세뇌하듯 자신감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다.

내 친구 중에 한 놈이 면접관 앞에서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클럽에 가서 그렇게 놀더라.

그러면 제 스스로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내 기준에서 자신감이란 무작정 여자 얼굴에 들이밀며 같이 놀자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여유다.

분위기를 즐기는 여유.

단순히 즐기는 거다.

여유를 즐기면 위트도 따라온다.

내가 아무리 잘 생기고 유머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클럽에서 이리저리 들이대는 거 결국 난봉꾼으로 보일 뿐이다.

클럽에서 실수하는 남자들 대부분 그 목적을 너무 다분히 들어내는 경우인데 여자들 질색한다.

지금 내가 VIP룸 앞에서 언더락잔을 들고 내려다보는 이 분위기가 꼭 그렇다고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이 클럽.

별거 없네?

비록 과거처럼 춤과 힙합을 위한 클럽도 아니었고 단상에 서서 춤을 추는 만식이, 만순이들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사회보다 더 치열하고 오직 본능만 가득한 이 더러운 정글.

아주 징글징글하지만 정말 반가웠다.

-툭툭

누군가 내 팔을 쳤다.

그리고 나는 온 몸이 굳어 버렸다.

18시 땡 하면 미친 듯이 퇴근을 했고

주말이면 친구들하고 술 먹는 걸 좋아했던 그녀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여! 기! 서! 뭐! 하! 세! 요!"

"정주임?"

하아...

가벼운 연애감성을 살리고 싶다.

24살 때.

한참 잘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가 주말에 잠수를 타고 연락이 두절됐었다.

무슨 사고라도 터진 게 아닐까 싶어 수소문해서 찾은 결과, 내 친구의 제보를 통해 클럽에서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내가 그녀를 클럽에서 발견했을 때 그 심정.

정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숱하게 많은 수컷 사이에서 무아지경 춤추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며 내가 굳이 저 여자를 붙잡아야 하는 고민 끝에 그저 체념하고 클럽을 빠져나왔다.

지금 내 앞에서 호기심과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정성희 주임을 보며 문득 그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정성희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그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왜! 혼! 자! 왔! 어! 요!”

“그! 냥!”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과! 장! 님! 친! 구! 는! 요!”

“없! 어!”

시끄러운 음악 탓에 도저히 대화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홀로 고독을 느끼려 잡아 놓은 VIP룸으로 정주임을 데리고 들어갔다,

정주임이 토끼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어느 미친놈이.

혼자 클럽을 와서 VIP룸을 잡느냔 말이다.

정주임은 테이블 위에 차려진 과일 안주와 양주 두 병을 보며 다소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과장님 혼자서 룸을..?"

"왜?"

"과장님 되게 센치하시다. 와아. 저는 이런 거 처음 봐요. 드라마에서도 못 본 것 같은데. 아니다. 예전에 노래방 알바 할 때 걸그룹 노래만 주구장창 틀어놓던 아저씨는 봤어요. 딱 그런 분위기 맞죠?"

"사람이 가끔 그럴 경우도 있어. 내가 음악 듣는 걸 좋아해서."

나는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언더락 잔에 얼음을 몇 개 넣고 양주를 한잔 따랐다.

"고독한 미식가? 뭐 그런 거죠? 고독한 클러버?"

"그래. 맞아. 너는 누구랑 왔어?"

"친구들이랑 왔죠."

"친구들 데려와."

"네?"

"너희들이 여기서 놀아. 난 나갈 테니까. 몇 명이야?"

"4명이요."

"술 한 병 더 시켜 놓을게. 난 간다!"

나는 잽싸게 양주를 한 번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정성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시게요."

"집에."

"에이. 저 때문에 홀로 고독 느끼시는 거 방해해서 죄송하잖아요."

"미안해할 거 없어. 어차피 끝물이라 정리하고 가려 했어."

그리고 이제 막 두 잔 마신 양주를 보며 정성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술도 이제 막 드신 것 같은데. 잠시만요."

정성희가 별안간 룸을 나가더니 몇 분 뒤 외투를 챙기곤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더니 뭐가 그렇게 신기한 듯 룸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별거 없네요. 여기 잡으려면 얼마 들어요?"

"얼마 안 해. 50."

사실 룸 잡는 것만 오백 깨졌다.

클럽 MD에게 부탁해서 얻은 룸이었다.

게다가 투 바틀이 테이블에 기본적으로 깔려야 당일 VIP 입장이 가능한 수준이다.

"아. 과장님 돈 되게 많으시구나."

"삶에 패닉이 와서 흥청망청하는 거야."

"과장님 어제는 왜 그냥 가셨어요?"

정성희가 궁금해하는 건 내가 사원들을 회의실에 투입한 이후 나는 미련없이 회사를 빠져나왔었다.

사실 나도 궁금하긴 했었다. 내가 회사를 뛰쳐나간 뒤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나온 거야."

"아..그러셨구나."

"그때 무슨 일 있었어?"

"저희들이 얘기하는 거 들으시곤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히더니 별말씀 없으셨어요."

"최부장님도 누군가 붙잡아 주길 바랐겠지."

"아.."

"술 마실래?"

"네!"

돔페리뇽과 예거마이스터 둘 중에 고민했다.

정주임 나이면 예거가 맞겠지.

언더락을 하나 뒤집어 얼음을 넣고 에너지음료를 조금 첨가하여 예거를 따른 뒤 예거밤을 제조했다.

그리고 언더락 받침 위에 잔을 올려 정성희에게 스윽 밀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맛있다고 너무 급하게 먹지 말고."

"네."

"클럽은 자주 오나 봐?"

"혹시라도 오해 하실까 얘기하는데요. 정신줄 놓고 놀지는 않아요. 친구들끼리 스트레스 좀 풀고 하는 거죠."

"뭐 잔뜩 꾸미고 왔으면 말 다 했지. 날 잡고 온 거냐?"

"아니라니까요. 주말인데 그러면 집에만 있어요?"

"나도 오랜만에 오긴 했는데 요즘 클럽 재미가 없다. 나도 옛날에 한창 잘나갈 때 휘젓고 다녔거든."

"정말요?"

"요즘 노는 건 비교도 안 되지. 적어도 그때는 힙이란 게 있었는데 저기 있는 남자애들은 기본이 없어. 무턱대고 여자한테 달려들면 여자들이 받아 주냐? 나 때는 기본적으로 춤도 출 줄은 알아야 했어."

"오. 과장님은 그렇게 자신 있으신가 보네요."

"옛날 일이지. 추억이고. 노래도 무슨 노래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EDM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너 T,I는 아냐?"

"으 꼰대 냄새."

"세대 차이 나는 거지 뭐."

술 한 잔 살짝 마시며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던 정성희가 문득 말을 꺼낸 건 고맙다는 말이었다.

"고마워요. 저 때문에 박찬혁이 한 대 쥐어박았잖아요."

"나도 어차피 한 대 치고 싶었어. 벼르고 있었던 거고."

"나름 저희 호흡이 좋았죠?"

"네가 적당히 눈물도 조금 흘려줘서 박찬혁이도 지레 겁먹어서 나를 고소 못 하겠지. 호흡은 더할 나위 없었다."

"과장님 아니었으면 어쨌든 제가 쥐여 박았을 거예요. 사이코 같은 새끼. 현준이도 예전에 박찬혁이 한 대 쥐어박았다면서요?"

"현준이가 그러냐? 그 새끼 하여튼 입은 살아가지고. 살면서 박찬혁이 같은 인간 안 만나려면 너도 사람 보는 눈을 길러야 돼. 너희들 보면 내가 속이 터진다. 터져."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요? 저도 사회 경험 많아요. 흐흐."

"그러냐? 하긴 클럽에서 상사를 만났는데 태연한 거 보면 사회생활 만렙이다 너는."

그래도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은 기념해야 하지 않겠냐며 정성희와 간단히 잔을 부딪쳤다.

"과장님 뜻대로 될 것 같아요."

"뭐?"

"최부장님은 천사장님한테 계속 다니겠다고 했어요. 대신 박찬혁이랑 박대리 내보내는 조건으로요."

최부장이 칼을 뽑은 것 같았다.

"와아. 진짜? 이야. 잘 됐네. 박찬혁이 밑에서 일했으면 내가 장담하는데 너 한 달도 못 버티고 관뒀을 거다."

"그렇죠. 저나 현준이나 과장님이 계시니까 겨우 버텼을 텐데 과장님 관두면 저도 아마 관뒀겠죠."

"..."

"과장님."

"응?"

"저 하나만 봐도 돼요?"

"뭐?"

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담배요."

"펴라. 회사에서는 안 피더니?"

"아. 제가 담배를 배운지 얼마 안됐고 밤에만 담배를 보거든요."

"참 특이하네."

"일주일 됐어요. 담배."

"갑자기? 대체..왜?"

"그러니까요. 하아. 제가 살면서 담배를 피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저도 저 스스로 엄청 실망이에요."

"피지마 인마. 그걸 왜 피고 앉아있냐. 적당히 호기심 해결했으면 끊어라."

"과장님도 피잖아요?"

"나야 뭐. 펴도 안 죽으니까 피는 거지. 너 그러다 빨리 죽어."

"과장님은 뭐 슈퍼맨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

정성희가 파우치에 담배를 하나 꺼내 들더니 입에 물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라이터를 들고 불을 지폈다.

‘후’ 하며 담배를 내뿜는 모습에 나도 당기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껄끄러웠다.

맞담배는 피우기가 싫었다.

그때 정성희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문을 왈칵 열고 내부를 살폈다.

나의 모습과 정성희가 담배를 피는 모습을 본 친구들은, 오~ 하며 웃어댔고 정성희는 꺼지라며 일갈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런 기시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렸을 때 느꼈던 풋풋한 연애 감성이었다.

그게 너무 낯간지러워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이제 정리해야 할 때.

"너 서른인가?"

"와..대박. 과장님 너무한 거 아니에요?"

"29?"

"실망입니다."

"27이구나."

"어떻게 제 나이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어요?"

사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나이를 모르는 척 말해 버렸다.

정성희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마지막으로 뱉은 담배 연기를 내쫓기 위해 손으로 연기를 휘젓는 거 보니 일주일 전에 배운 솜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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