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너희들이 최부장님 붙잡아라."
나는 창문 너머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물러섰고 오대리와 고현준, 정주임이 차례대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음이 잘된 탓에 그들이 무슨 소리를 내고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고현준이 최부장을 향해 말하는 어투와 오대리의 논리와 정주임의 절실함 정도면 최부장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부장의 눈시울이 조금은 붉어지는 반면 황부장은 회의감이 드는지 아무 말 없이 1팀의 사원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장면이 마치 두 인간 부류의 결말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9년 만에 클럽 입성.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네 번째 메인 퀘스트 존경 욕구의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7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어제 박찬혁이에게 먹인 한 방이 사원들로부터 존경을 얻었나 보다.
특히 정주임은 마치 내게 반한 얼굴을 해댔으니 말이다.
거기에 존경까지 더 했으니 정주임과 적당한 선을 지켜야만 했다.
물류1팀의 단톡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매번 시끄러웠던 단톡방이 조용한 거 보니 사원들도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할 어떤 사건이 터졌으리라 짐작했다.
나는 사원들이 회의실에 들어가 최부장을 독대한 이후의 결말을 모른다.
최부장이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확답의 전화가 오지 않았으며 사원들에게 일이 어떻게 풀렸는지 전해 듣지를 못했다.
어쩌면 비극적 결말로 최부장이 퇴사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토요일 주말을 즐기며 회삿일을 잊어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
정답은 월요일에 펼쳐질 것이고 나 또한 회사 밖을 나오면 회사일은 끝이다.
토요일 오전 아홉시는 정말 할 일 없이 잠만 자야 하는 시간인데 내가 지금 눈 뜨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오늘 저녁에 있을 로또 추첨과 더불어 드디어 고대하던 벤츠가 탁송되는 날이었다.
흐흐.
21년식 벤츠 S클래스 중에 최상위 모델이며 8기통 엔진이다.
기름을 더럽게 많이 먹고 세금도 굉장히 많이 붙긴 하지만 영화 매드맥스에서 보여준 그 엄청난 배기량을 보면 단연코 한번 즘은 타보고 싶은 로망이 아닐까 싶다.
처음 이 차를 대면했을 때의 느낌은 예전 벤츠 S클래스하면 떠올리는 중후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굉장히 날렵하면서도 우아했다.
차량 내부는 마치 내가 미래에 온 것 같이 모든 게 디지털화 돼 있었다.
트렌디와 모던함이 골고루 갖춰졌고 S클래스 특유의 중후한 이미지를 탈피한 분위기였다.
혁신적인 기술이 접목된 고해상도 스크린이 달렸고 스마트폰처럼 모든 게 터치 식이었다.
허나 내가 실질적으로 주요 사용하는 옵션은 라디오 에어컨, 후측방 카메라, 크루즈 컨트롤 정도.
게다가 손 놓고 운전하는 자동주행도 내 성격상 아직 못 믿는다.
예전에 택배 현장에 자동으로 택배 박스를 피킹 하는 기계가 입고 됐는데 결국 창고에 박힌 현실을 목격한 뒤로는 자동이란 단어는 아직은 시기상조.
결론은
네 바퀴 잘 달리고 가벼운 핸들링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탁송 기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혹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네?"
별로 달갑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 인생 내 돈으로 산 중고 아닌 첫차이기 때문에 막걸리 정도는 뿌려주며 무사고 기원은 해야만 했다.
탁송기사와 함께..
그래서 부었다.
막걸리 5병을 사다가 네 인생 앞으로 음주는 없다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벤츠에게 술을 막 먹였다.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탁송 기사님과 한다는 게 어이가 없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이걸 어디로 끌고 가야 할까.
* * *
난 적어도 연애를 잘하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돈 없고 가진 거 없어도 기본적으로 큰 키와 얼굴 하나면 승부 끝나는 거니까.
그래서 학창 시절 때 한 달 생활비 25만 원으로도 충분히 연애를 할 수 있었다.
로또와 더불어 연애도 내겐 쉽다.
아마 그건 내가 살아온 과정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봤다.
가난했던 시절 눈칫밥 먹는 게 습관이 됐으니 적어도 사람 감정을 파악하는 연습이 숙달됐었다.
중학생 때는 저녁을 굶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얼굴에 철판 깔고 여자 친구네 집에서 부모님에게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런 생존본능이 탁월했으니 말 다 하지 않았나.
고등학생 시절 때는 비록 흑역사이긴 하지만 공부 잘하는 여자 한 명 붙잡고 열심히 공부만 했다.
비록 헤어져서 연락 끊긴 지 오래됐지만 아마 시집가서 잘살고 있겠지. 엄청 똑똑했으니까.
그리고 대학생 시절.
내 연애의 절정기였다.
아주 초 절정기.
노래 하나로 OT를 전부 휘어잡았으니 1학년 최고 인기스타는 당연히 김도일이가 아닌가?
주위 금수저 친구들 저리가라 수준.
깨톡방은 매일 끊이지 않았고
주말에는 쉴 틈도 없이 여자를 만났다.
그렇다고 내가 바람을 피웠나?
결코. 내가 살아온 연애 과정은 굉장히 깔끔했다.
환승이별?
일절.
서로 손잡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게 기억도 오래 남았다.
이별에도 맛이 있다면 이건 맛있는 이별에 속했다.
그리고 그게 쿨하니까.
잠수이별?
그건 상대방한테 예의가 아니지.
개인적으로 제일 나쁜 새끼.
사람 속 타는 줄 모르고 잠수 타버리는 거.
내가 아주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나하고 맞지 않는 친구들이 간혹 그렇게 하곤 했었다. 물론 내 경험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연애 스킬이 조금 무뎌져 버렸다.
그게 언제부터냐면 내가 졸업을 하고 28살 이후 기업 인턴 생활하며 지낼 때부터였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연애를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보호막이었다. 사회인은 연애를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얼굴도 중요하지만 능력도 보는 시기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서 지금 내가 로또 추첨 방송 본방을 포기하고 클럽에 온 건
그때의 기억을 다시 한 번 되살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토요일 저녁 클럽을 내가 다녀온 지가 9년이나 됐다.
9년 만에 클럽 입성.
한 번 즐겨보자.
* * *
과거 클럽 하면 역시 빠지지 않는 장소는 힙합 클럽의 시발점 홍대였다.
정확히 15년 전 내가 20살 때 홍대의 NB1과 NB2, 할렘을 주름잡았으니 대한민국 클럽의 중심을 내가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NB1은 간혹 직장인들이 회식하다가 술김에 오는 경우가 많아서 젊은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NB2는 홍대의 중심 클럽이라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고
할렘은 문자 그대로 할렘.
조금은 매니악틱한 분위기였다.
Soulja Boy, 티페인, 50센트, 블랙아이드피스, 닥터드레, 칸예웨스트, 티아이, 스눕독, UNK 등등 그때 추억의 힙합 가수들의 노래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아직도 간혹 듣곤 했다.
크으.
그때의 클럽은 춤이라는 기본이 깔려 있었다.
클럽 손님의 10%는 단상에 올라가 합을 맞춰 춤을 추곤 했다.
단상은 아무나 올라가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춤을 출 줄 알고 합을 맞출 줄 아는 손님들만 올라갔는데 그때 당시 유행했던 춤은 스냅댄스, 그리고 그걸 추는 남자는 만식이 여자는 만순이라고 했다.
요즘은 그게 완전히 와전돼서 만원만 들고 오는 손님으로 칭하거나 혼자서 무아지경 스텝만 밟는 애들로 바뀌었다.
이런 젠장..
안타깝다.
만식이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셔플이 유행했고 미친 듯이 셔플만 춰대는 게 영 재미없었다.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클럽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춤은 사라졌다는 거고 굉장히 노골적으로 바뀌었다는 거다.
그게 좀 아쉬웠다.
특히 클럽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들이 과거의 내가 품었던 클럽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힙합을 좋아하고 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고 술을 마셨던 공간이 완전히 마약소굴 수준으로 나락에 빠져버렸으니 개탄할 수밖에.
그리고 클럽하면 빼놓을 수 없는 형들이 있는데 클럽 입구에서 죽치고 서서 어두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문지기, 즉 가드 형들 이었다.
15년 전 문지기들의 특징은 그때 당시 유행했던 모히칸 스타일, 그리고 강해 보이려 일부러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었다.
덩치도 크고 험악하게 생겼고 마치 건달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알고 보면 정말 순하고 착한 동네 형이다.
미성년자들이나 술 취한 직장인들, 클럽 분위기에 맞지 않는 복장들, 진상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남녀 성비 비율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하게 보이기 위한 변장을 하는 수준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들을 상대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런데 이 인간들에게 잘 보이면 줄을 서지 않고 프리 패스는 할 수 있었다.
클럽의 줄을 뚫기 위해서는 보통 두 가지 코스를 거쳐야 하는 데, 매일 드나드는 얼굴 잘생긴 죽돌이거나 브레스트 포켓에 몇 푼을 찔러 주는 거
그런데 나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남자들 수질관리에 내가 1순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드 형들이 나를 1순위로 클럽에 집어 넣어줬다.
줄은 서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내 덕을 많이 봤었다.
지금 내가 도착한 그나마 가장 잘 나간다는 클럽은 아직 저녁 시간이라 한산하기만 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클럽에서 홀로 정장 입은 한 남자가 어두운 계단 밑 테이블 아래서 고독을 느끼는 거 보고 소름이 돋았고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다.
그게 지금 나니까.
그리고 이게 멋이지.
너희들은 놀아라.
나는 너희들 구경하러 왔다.
이런 마인드였겠지?
2층 VIP 라운지에 앉아 정말 십 년 만에 마시는 호세쿠엘보 테킬라 스트레이트로 한 잔 시원하게 적셨다.
학생 때 만만한 양주가 데킬라, 예거, 아과밤이나 보드카 정도니까 그때의 맛을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나도 클럽에서 춤만 추는 사람은 아니었다.
친구들끼리 뭉쳐서 여자들 헌팅하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삼천 원짜리 데킬라 스트레이트 원 샷 정도면 클럽은 이미 내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클럽에서 여자를 꼬시는 가장 중요한 건 결국은 외모가 1순위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건 0순위는 100%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