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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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태 근무하면서 ‘감사’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처음 직면했으니까.

"걱정들 마라. 별일 없을 거다. 어차피 감사실에서 2팀 잡으러 온 거고 우리 1팀과는 연관된 일 없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정주임이 손톱을 뜯다 말고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예전에 제가 사소한 실수로 일용직 급여 누락해서 사비로 보내 준적이 있었거든요. 어떡하죠? 저.. 걸리면.."

솔직히 조금 귀엽고 안쓰러웠다.

"정주임. 감사실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정주임 근무 기록까지 뜯어보지도 않아. 그리고 뭐? 급여를 사비로 보냈다고? 네가 왜 사비로 급여를 보내줘?"

"제가 신입 때 실수를 해서 제 돈으로 충당했거든요..알잖아요. 급여팀장 성질머리 더러운 거..그런데 사실은 최부장님이 다시 돈을 주시긴 했어요. 부장님에게 피해 안 가겠죠?"

그때 오대리가 풉하며 정주임의 말에 비웃었고.

"이게 웃겨요?"

"아니. 정주임. 예전에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거든. 최부장님이 현장에 먹을 생수하고 커피 주문해서 보내주라고 했었는데, 발주를 잘못 넣어서 한 트럭 보냈다."

"대박.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오대리님 사비로..?"

"아니. 최부장님이 사비로 채웠지."

"아...그래서 최부장님이 오대리님을 그렇게 신뢰를 하지 않는 건가 싶네요."

"뼈 때리지 마라."

좁아터진 계단 구석진 곳에서 그래도 나름의 긍정적 웃음이 핀다는 게 재밌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감사팀 직원의 필두로 오대리가 사무실 안으로 불려 들어갔고, 뒤이어 정주임, 그리고 고현준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들어간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 또한 호출을 받고 사무실에 들어갔고 따로 마련된 장소에 앉아 감사 팀장 앞에 섰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내 이력을 살피는 감사팀장 이석재는 가재 눈을 해대며 서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

황부장의 횡령과 연관된 인물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황부장이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면 끝날 일이잖아요. 왜 엄한 사원들까지 붙잡아다가 이런 식으로 몰고 가는 거죠? 아무리 본사라고 해도 이거는 좀 지나치죠."

"김과장님도 본사에서 썩 평판이 좋은 게 아니에요. 들어보니까 앞뒤 가릴 것 없이 물어뜯는다는데, 자리 봐가면서 합시다. 네? 앉아요."

감사팀장은 이내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본론을 꺼냈다.

오랜 시간 기업 소속으로 감사실에서 근무했던 양반이라 사내 돌아가는 구조 정도는 한 번에 파악했다.

"김과장님."

"...?"

"어차피 저희 경성하고 당신네 회사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꽤 오래됐으니."

"저희 감사팀이 왜 있겠어요? 가끔은 사람 물갈이도 좀 하고 썩은 고인 물들 쳐내고 환기 좀 시키는 거지. 안 그래요?"

"무슨 말입니까."

"황부장이 그간 해먹은 금액이 만만치가 않아요. 일단 저희가 지금 파악한 금액만 1억 4천 정도니까."

"...!"

"그리고 황부장 금융거래 내역 뜯으면 더 나오겠죠.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나올 것이고. 저희 회사 내부에도 황부장 리베이트 받아먹은 인간들도 있을 것이고..."

"..."

일이 꽤 커지는 수준.

"그런데 이런 계획적인 횡령을 혼자서 했다곤 생각하지 않거든."

"그래서요?"

"최부장도 분명히 연관이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김과장님이 저희 좀 도와주시죠. 물갈이 합시다. 제가 천사장한테는 당신 얘기 잘 해드릴게."

"..."

"이제 솔직해지자고. 이거. 일 크다?"

이석재 팀장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2017년 때 맺은 하도급 계약 건을 들먹이며 도급사 간의 비딩 담합이 있었다는 둥 어떻게든 최부장을 연관시키려는 수작질을 해댔다.

하여튼.

감사실 인간들은 하나같이 어디 형사물을 많이 봤는지 이런 유도심문은 아주 기가 막히게 했다.

하긴 지금 내 앞에 있는 감사팀장은 형사법의 귀속을 받지 않아 거짓말을 해도 피해 볼 게 없으니까.

그런데 이 새끼 이거 사람 너무 얕게 보는데?

"이석재 팀장님?"

"말씀하시죠."

"사람 잘못 골랐어요."

"...!"

"감사실에서 어떻게든 최부장 엮어내고 성과 내고 싶은 거 알겠는데. 하나만 물읍시다. 최부장이 정말 연관 됐다는 거, 당신 인생 걸 수 있어요?"

"...!"

"나는 걸 수가 있거든. 최부장이 연관 됐다고 하면 나 관 둬. 관두면 그만이야. 그런데 막말로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월급쟁이 아니냐고. 응? 제발 같은 처지끼리 이러지 좀 맙시다."

"김과장님!"

"성과는 당신네 회사에서 황부장 리베이트 처먹은 인간들 제쳐서 챙기시고, 저희랑은 계약해지를 하든 뭘 하든 알아서 하세요. 짜증나니까."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어차피 계약해지 할 거 아니에요? 저는 이만 나가봅니다!"

내 말을 듣던 감사팀장 이석재가 그래도 자존심이 엄청 상한지 나를 불렀다.

"과장님!"

"또 왜요."

"조만간 또 봅시다."

또 보든 말든 말장난 해대며 시간을 뺏은 인간 때문에 성질이 나서 문을 쾅 하고 닫아 버렸다.

* * *

물류1팀의 팀원들을 사내 건물에 위치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주임은 이번 사달이 황부장과 연관된 것을 이제야 알게 된 듯 긴장이 풀어져 보였다.

"황부장은 제가 그럴 것 같았어요. 매번 서류 뭉치 챙기고 퇴근하는 것도 자주 봤고. 그게 저는 서류 조작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저는 감사 팀장에게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 했어요. 혹시 오대리님은 무슨 말을 했어요?"

"나? 딱히. 팀장이라는 양반이 그냥 겁만 주던데? 그런데 김과장님. 황부장이 그렇게나 많이 횡령했어요? 이거 뉴스에 나올만한 수준 아닌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최부장님도 관두는지 마는지 하고 있으니까."

"네? 아니 왜요? 최부장님은 아무 연관 없잖아요."

"동업자 정신이겠지. 그게 무슨 정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마침 카페에 박찬혁과 박대리 송팀장이 들어왔다.

박찬혁은 연신 싱글벙글 이었고 나의 눈을 마주치자 어제 마주했던 소름끼치는 미소를 내비쳤다.

저 개새끼.

그리고 박찬혁이가 천천히 내게 다가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사원들과 나를 번갈아 봤다.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지금 내 면전 앞에 있는 박찬혁를 한 대 쥐어박고 깽값을 물어줄 작정으로 다소 흥분된 상태지만.

박찬혁이는 이상하게도 아슬아슬한 선을 지켜냈다.

나는 그 선을 넘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선

제발 넘어라.

"박찬혁씨 지금 저희끼리 얘기하고 있는 거 안보이세요? 적당한 거리 지키시고 빠져주시죠."

"하! 이거 참 너무하시네. 곧 부장될 사람한테 너무 한 처사 아닙니까?"

"꼴에 부장은..."

부장.

그게 그렇게 달고 싶더냐.

궁금했다. 부장 달아서 뭐 할 건지.

"그래서 부장 달아서 뭐 하시게?"

"음...우리 고사원이랑 현장 좀 돌아다니고 싶은데. 예전 추억도 곱씹으면서."

예전에 고사원이 박찬혁이의 손목을 잡아 비튼 적이 있었다.

고사원의 힘이 원체 쌔니 박찬혁이는 고성을 질러댔었다.

아마 박찬혁이도 그때를 잊지 못할 거다. 아주 절절했으니까.

"오대리는 저기 지방에 있는 좋은 센터 자리에 관리자로 넣어줘야지? 그리고 정주임이랑은 휴게실에서 단둘이 오붓하게 면담도 해보고 싶고. 이제부터는 1팀 2팀 등 돌리지 말고 서로 소통 하자고."

그리고 나는 정주임의 표정을 바라봤다.

정주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화를 식히는 것 같았다.

이 새끼.

선 넘었다.

나는 주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투샷 아메리카노를 박찬혁이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일순간.

오대리 정주임 고사원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고.

"아이고 손이 미끄러졌네. 이걸 어쩌나. 박찬혁씨 괜찮아요?"

"아이 씨발!"

박찬혁이가 제 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욕을 해대고 있을 때

고사원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본인이 먹던 초코 셰이크를 박찬현의 얼굴에 쏟았다.

"아 죄송합니다. 박찬혁씨.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오대리는 테이블에 있던 케이크를 집어 던졌고

"그냥 던졌습니다."

정주임은 그 모습을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개새끼."

만신창이가 돼버린 박찬혁이가 분을 삭이지 못하며 고소 할 거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해라. 고소.

나는 박찬혁이의 얼굴을 아주 속 시원하게 갈겨버렸다.

-퍽!

깽값이 아깝지 않도록.

뒤로 나자빠지며 엄살을 부려대는 박찬현이에게 다가가 구둣발로 무릎을 살짝 지르밟아 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이 박찬혁이. 너 방금 정주임한테 하는 언행들 그거 추행이야. 더러운 새끼야.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말을 지껄이나? 엉? 정주임 괜찮아?"

최대한 과장하며 정주임을 살폈고.

정주임은 슬픈 얼굴을 하며 내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름 팀워크가 좋았다.

"이 개새끼가."

"부장 달고 싶냐? 그런데 어쩌나. 최부장님은 털어도 먼지 안 나올 것 같거든. 그러게 씨발놈아 남 인생 조지려거든 본인 인생도 걸었어야지."

이제 나도 끝장을 봐야했다.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박찬혁이를 제쳐두고 사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따라와."

* * *

사원들을 이끌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내의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천사장과 최부장, 황부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부장의 표정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거로 봐서는 본사 측에서 형사 고발을 할 게 분명하고 이제 남은 건 최부장의 근신 문제였다.

최부장은 스스로 이걸 묵인한 죄도 있다며 워킹휴먼을 떠나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나이는 40대 후반에 그나마 가장 잘하는 일이 인력 관리 일이다.

워킹휴먼을 나가서 치킨을 튀기든 기술을 배우든 뭐가 됐든

최부장은 인생 막장에 다다랐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절박함으로 찾아간 곳에서 설움을 받는 심정을 인생의 밑바닥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달랐다.

그 설움 충분히 받을 수 있었고 딛고 일어나는 인간들 숱하게 봤다.

사람이 진짜로 무너지는 건 내가 평생 몸 바친 회사에서 믿었던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거고 아무 빛도 보지 못하고 제 발로 걸어 나갈 때다.

그게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내 앞에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는 사원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매달려야 할 것 같은데."

"..."

"최부장 관두면 나도 관둔다. 그리고 너희들은 저 박찬혁이라는 인간 밑에서 일하게 될 거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안 그러냐?"

정주임이 아주 절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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