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박찬혁이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황부장을 면전에 두고 완전히 무시한 행동들.
박찬혁이는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부장을.. 왜."
"김과장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뒤통수치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합니까.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서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
"..."
박찬혁이 황부장을 쳐낸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한 가지다.
원청 감사.
원청은 하청회사를 감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자체감사, 외부고발, 내부고발.
자체감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서로 믿고 맡기는 경우라서 원청과 하청이 다소 서운해지는 경우가 발생하니까.
그런데 직접적인 내외부 고발은 말이 달라진다.
원청의 내부감사팀이 직접 하청 회사에 달려든다.
그간 박찬혁이가 현장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정보도 있을 것이고 그의 동생 박대리가 사무실에서 황부장이 해먹은 증거를 수집했을 것이다.
박찬혁 이 인간 보통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실수 한 거
왜 속내를 내게 비친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라도 물읍시다. 당신이 황부장을 쳐내든 말든 내 알바는 아닌 데 왜 나한테 이 얘기를 꺼내는 거죠?"
"흐흐. 김 과장님!"
"...?"
"왜 이렇게 근시안적일까."
박찬혁이가 대뜸 내 빈 소주잔에 잔을 채웠다.
"아마 원청감사 뜨게 된다면 황부장이 여태 쳐먹은 것들 까발려지고 대대적인 물갈이 들어갈 거예요. 그런데 원청에서 황부장만 건드릴까?"
",,,?"
"얼마나 깨끗한 양반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때 최부장도 만만치 않게 뒤탈이 많을 것 같은데..."
"...!"
"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이번 일로 최부장도 나가리 되는 거죠."
미친놈
진짜 미친놈 중에 상 미친놈이다.
회사를 통째로 먹겠다는 심상 아닌가.
"천사장은 알고 있나요?"
"천사장? 원청에서 감사 뜬다는 데 천사장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걸 막아요? 아니지. 천사장은 나한테 상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흐흐."
"아.."
"결론은 앞으로 부장들 전부 나가리 되면 1팀은 김과장님이 부장 자리로 올라설 게 맞고. 2팀은 내가 올라가야 하니까. 앞으로 잘해보자는 차원에서 이렇게 술자리를 만들었지...이해되시죠?"
"하아."
이 미친새끼
박찬혁이는 이미 사활을 걸었다.
황부장을 쳐내는 거.
나야 별 상관없고 나갈 사람 알아서 빼주는 거 좋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최부장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박찬혁이의 저 자신만만한 태도.
너무 거슬린다.
나는 최부장을 믿어야 한다.
아니 최부장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 씨발. 믿자.
"본사에서 최부장님을 털었음에도 먼지가 안 나온다면?"
"...?"
"최부장님이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은데?"
"하!"
"맞잖아요?"
"...."
"표정보니까 내가 말한 부분은 계산이 안된 것 같은데요."
"아이고. 현실을 삽시다. 현실을. 최부장하고 황부장 한솥밥 처먹은 지 15년입니다. 15년. 그리고 제가 김과장님한테 왜 이 얘기를 꺼냈겠어요. 어차피 황부장 습관처럼 하는 말 있죠? 연못 하나 두고 치고받는 바닥, 김과장님하곤 내가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이니까. 알죠? 제 마음?"
"미안한데... 저는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아이고 참."
"최부장님은 황부장처럼 양아치 같은 인간이 아니라서 이게 박찬혁씨 뜻대로 일이 풀리려나 모르겠네."
"결과는 내일 나오겠지. 안 그래? 김과장?"
더 볼일 없다.
나는 박찬혁이를 홀로 두고 노가리포차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건물 구석에 서서 담배 한 대를 물며 대화를 곱씹었다.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된다.
만약 최부장도 걸린다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오대리에게 전화를 했다.
오대리도 아마 내 전화를 궁금해할 거다.
박찬혁이하고 술자리를 가진 걸 아니까.
내 전화를 받은 오대리가 대뜸 먼저 하는 말은.
-괜찮으세요?
"내가 박찬혁 같은 인간 때문에 쫄 것 같냐?"
-그게 아니라.. 신경 쓰이는 건 맞죠. 과장님이 어떻게 했는데..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박찬혁이를 괴물로 키웠다."
-...
"근데 오대리. 넌 최부장님 믿냐?"
-갑자기... 왜..
"그냥 믿냐. 안 믿냐. 그것만 말해."
-믿죠. 믿습니다.
"됐다. 나도 믿는다."
-사실 과장님께 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좀 고민되긴 했는데...
"...?"
-최부장님이 과장님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죠? 예전에 과장님 재입사한다고 했을 때 황부장이 그랬어요. 사고 나서 회사에 피해만 준 인간을 왜 다시 재입사 시키냐고...
"..."
-그때 최부장님이 황부장님하고 얼마나 설전을 벌여대던지 과장님 재입사 안 시키면 일 관두고 때려 친다고 얘기했다니까요.
"그래..?"
-과장님이 박찬혁이한테 무슨 말씀을 듣고 저한테 최부장님 이야기를 꺼내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저는 부장님도 믿고 과장님도 믿습니다. 지금 보세요. 저희 팀 현장 이슈도 일절 없고 조용히 흘러가잖아요? 흐흐.
"됐다. 내일 보자.."
-근데 과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박찬혁이랑 술 마시면서 무슨 얘기 하셨어요?
"사는 얘기 했다."
-과장님 힘내십쇼.
"끊어."
그리고 이 내용을 최부장에게 전달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미리 대비는 해놔야.. 최부장이 안전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나는 최부장에게 급히 전화했다.
"부장님..!"
-뭐냐. 늦은 밤에.
"내일 회사에 감사 뜰 겁니다."
-뭐?
"박찬혁이 미친 새끼가 황부장 찔렀습니다."
-...
"부장님.."
-...
"저희는 괜찮겠죠?"
-끊어라. 지금 현장이다.
최부장은 내게 별다른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내일은 워킹휴먼에 피바람이 불겠다.
저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박찬혁이가 실수한 것은 딱 세 가지다.
내가 얼마나 여유로운 인간인지 몰랐다는 것과 내가 지네들처럼 직급에 눈먼 인간으로 판단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믿고 따르는 사람은 현재로선 최부장이라는 거다.
어차피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최부장이란 인간을 한 번 믿어보는 거다.
원청 감사에서 최부장을 털었음에도 깨끗하다?
분명 힘든 일이겠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황부장은 어차피 아웃이고 박찬혁이도 제쳐버릴 수가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예정된 출근 시각보다 한 시간은 일찍 도착했다.
최부장을 미리 만나기 위해서였다.
최부장은 내 얼굴을 보더니 별안간 아무 말 없이 커피 한잔을 탄 뒤 내게 건넸다.
최부장은 내게 커피를 타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최부장에게 알 수 없는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최부장과 커피 한 잔씩 들고 흡연실로 향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별말 없이 서 있는 그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최부장님 잠은 좀 주무셨어요?"
"별로. 어제 네한테 그 얘기 듣고 잠이 오냐. 현장에서 날밤 깠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황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둘 사이에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황부장은 박찬혁이가 자신을 찔렀다는 정보를 아직 듣지 못했을 거라고 봤다.
만약 정보를 들었다면 황부장의 저 한 손에 들린 커피를 마실 시간이 없겠지.
최부장은 황부장에게 간단히 묵례 정도로 인사를 한 뒤 승강기를 빠져나왔다.
최부장이 표정이 왠지 씁쓸해 보였다.
"황부장은.. 원청 감사가 오는 걸 모르는 것 같은데요. 말씀 안 하셨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
최부장은 별안간 내 말에 기분이 조금 나쁜 듯 말을 돌려버렸다.
왜 이러지. 대체.
흡연실에 도착하자마자 최부장은 연신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일전의 박찬혁이에 대해 말했다.
"검은 머리 짐승들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박찬혁이 말씀이십니까?"
"그 새끼는 인간도 아냐. 그래도 황부장이 제 새끼라고 이것저것 떠 먹여준 게 있는데 배신을 쳐버리나."
"그런데 부장님.."
내가 걱정하는 건 최부장도 감사의 대상이다.
"저희 괜찮은 거 맞죠?"
"김과장은 대체 뭐가 걱정이야?"
"네?"
"내가 감사 대상이든 아니든 김과장은 손해 없잖아? 왜? 내가 잘릴까봐 그러는 거야?"
"부장님.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김과장.. 내가 절박하게 밤을 새워서 일해 왔던 게 중요한 게 아냐. 어차피 나도 나가야 하는 게 맞다."
"....!"
"황부장의 그릇된 행동을 내가 몰랐을 것 같아? 그걸 알고도 묵인했던 내 잘못도 있다. 내가 이걸 아무리 타개하려 해도 감사팀장 앞에서 무슨 변명을 해? 어? 그저 몰랐습니다가 말이 되는 수준이 아냐. 황부장은 나랑 15년을 같이 일했어. 현장에서 피땀 흘려서 일했던 날도 있었고 게다가 파티션 하나 두고 일하는 사이 아니냐? 그런데. 내가 책임이 없다고?"
"그럼 왜 여태 일만 했습니까. 그냥 황부장처럼 살지 그랬어요. 업체 뒷돈도 받아먹고 서류 조작해서 인원 뻥튀기로 일당 해먹고 사원들에게 들어갈 주휴수당 베껴가지고 주머니 좀 채워주고. 차라리 그렇게 살지 그랬어요? 네?"
"..."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관둘 거였으면 저라면 엄청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너무 태평하신 거 아닙니까? 돈은 많이 모아 놓으셨어요?"
내 말에 무슨 반박할 여지가 있겠나.
사실인데.
최부장은 그간 이곳에서 근무하며 꾸려왔던 일들이 이번 감사로 인해 전부 무색해진다.
게다가 내가 해왔던 일도 마찬가지.
최부장은 깊은숨을 몰아 내쉬며 담배를 피우는 둥 마는 둥 했다.
"왜 그렇게 사세요?"
"네 말이 맞다. 내가 그간 헛되게 살아 온 거지. 씨발. 그냥 화끈하게 한번 해쳐먹을 걸 그랬다. 안 그냐 김과장?"
"부장님!"
"그런데 왜 이러고 살았냐고? 사람이 살다보면 일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때가 있는 거다. 나는 그때가 온 거고."
"하아..."
"..."
"게다가 그간 내 손에 달린 책임감이 상당했잖아? 단순히 우리 회사 이익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 내 밑에 딸린 일용직들이 얼마나 많냐..그래서 그렇게 미치게 일만 했나 보다."
"남이잖아요."
"뭐..?"
"그 분들이 부장님을 알기나 하는 줄 아세요? 아무도 모르고 신경도 안 쓴다고요. 예전에 박대리가 그럽디다. 어차피 뒤돌아서면 남인데 뭐 하러 그렇게 신경 쓰냐고요. 솔직히 그게 맞는 말이잖아요."
"..."
"저희가 매번 현장 사원들 신경 써준다고 원청이랑 싸우고 지랄하고 시급 한 푼이라도 올리려 협상하는 거. 아무도 몰라준다고요. 저번에도 정주임이 일용직사원 한 분한테 전화 받았어요. 중간에서 얼마나 빼 먹냐고."
"..."
"부장님이야 매번 신경 쓴다고 하는 일들. 옆에서 보면 아주 속 터져 죽습니다."
"그러냐?"
"..."
"네 말이 맞다. 내가 뭔 재주로 그 수백 명에 달하는 인간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겠냐. 그런데 김과장.."
"하아.."
"내가 처음에 이일을 시작했을 때. 너는 모르겠지만 나도 똑같이 일용직들처럼 밑바닥에서 상하차하면서 까대기 치고 그랬다. 지금은 남들이 뭐라고 되는 것마냥 나를 바라보지만, 그때 당시 나는 완전히 인생 막장이었다고. 사업 말아 먹고 기어이 한 푼이라도 벌어먹겠다고 모여드는 곳이 우리 같은 현장 아니냐?"
"..."
"넌 모를 거다. 인생 막장에 다다랐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절박함으로 찾아간 곳에서 설움을 받는 심정을. 그건 인간으로서 완전히 나락에 빠져버리는 기분이야. 인생이 끝나버리는 순간이라고. 내가 그걸 너무 잘 알아. 내가 느꼈으니까."
"..."
"너도 마찬가지야.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고 통원치료 받는 게 2년이 넘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이고 뭐 벌어 놓은 것도 없는 녀석이 나한테 전화를 주네? 그때, 네 심정을 내가 너무 잘 아니까 받아줬던 거야."
"..."
"이 회사에서 내가 가지는 책임감을 너한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바라지도 않아. 다만. 그것만 알아두라는 거야. 네가 사고가 나서 막막했을 때의 심정 그리고 뭐라도 해야만 했었던 그 심정 말이다. 그 심정을 가진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 우리 현장이라고."
"하아.."
최부장님의 말에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너무 맞는 말이기도 했고 최부장의 속마음을 처음으로 마주했던 순간이니까.
그리고 최부장은 헛기침을 해대며 내게 말했다.
"김과장이 내 자리로 올라오면 내가 걱정할 건 없겠다."
"부장님.."
"욕심내면서 살아라. 멍청하게 살지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