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차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로또에 당첨된 이후로도 차를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맘껏 택시 타고 다니면 될 일이지 도로에 깔린 빌런들을 상대하는 거 쉽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좀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상담 선생님 지영씨와 데이트를 할 날도 올 게 분명하고 앞으로 결혼을 하게 되면 차는 기본 옵션으로 깔려야만 했다.
미래에 자식들까지 염두에 둔다면 SUV도 생각해야 될 듯하다.
자식은 한 명?
개인적으로 두 명이 좋다.
힘들 때 서로 의지하면 되니까.
그런데 나는 지금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지.
어휴.
지금 당장은 연애를 위한 차.
그리고 가장 안전하고 내구성 좋은 외제차를 알아봤다.
역시 내구성으로 알아주는 벤츠나 아우디, 볼보 정도가 가장 무난한 선택.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는 역시 벤츠가 인기 많은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당장 신형으로 주문한다면 출고까지 길면 1년 짧으면 6개월이다.
오늘 당장 회사 인근 한성벤츠매장에 들려 바로 계약을 해야만 했다.
그때 얼빠지게 혼자서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정주임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과장님!"
"어?"
"신호수 비품 현장마다 택배 보낼 건데 한번 확인해주시겠어요?"
"어..그래."
현준이가 연신 경광봉과 조끼, 안전모 등을 택배 상자에 담고 있었다.
물품 내역과 송장 주소 등을 확인하고 칭찬한마디 하고 끝.
그리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벤츠 예약 기간을 알아보고 있을 때, 정주임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과장님!"
"응?"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왜?"
"송장을 전부 들고 가시면 어떡해요."
아뿔싸.
택배상자에 붙여야 할 송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미안."
"어휴."
저번 주에 2팀으로 신호수 파견 업무를 짬 처리 시킨 이후로 사무실 분위기가 몇 가지 달라져 있었다.
첫째로 1팀은 업무적으로 여유가 생긴 상황이라 정주임과 오대리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고,
2팀은 아직도 신호수 인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업무적인 부담으로 과부하가 걸리는 경우 1팀과 2팀이 서로 도와주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1팀에 문제가 터지면 2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특히 내가 재입사 하고 난 뒤 일산 터지고 남양주 터져서 미친 듯이 일했을 때 2팀에서 한 명이라도 도와줬나?
절대 없었다.
오히려 무너지길 바라며 바라보고 있었겠지.
물론 황부장 필두로 말이다.
결론은 우리도 쌩까면 된다는 거.
그저 불구경만 하면 될 일이다.
게다가 아직도 인원을 맞추지 못하고 파견을 못 해줬다?
하루 치 인건비를 날려 먹는 거고 원청으로부터 페널티지.
이건 황부장이 그냥 못 넘어간다.
지금쯤 욕이 터져 나와야 할 땐데.
역시 황부장의 고성이 울려댄다.
"야! 김해센터 신호수 오늘 펑크 났다. 이 시발 것들아 일 똑바로들 안 해? 박대리..신경 안 쓰냐?"
"지금 현재 급하게 대체인원 찾고 있는 중입니다."
"어휴 병신 같은 것 진짜. 인원 하루 못 맞추면 네 월급에서 까버려? 어? 손해인 거 몰라? 회사에 이익이라도 못 낼 거면 적어도 손해는 내지 말아야 할 것 아냐!"
"죄송합니다."
박대리가 연신 울상으로 대답했다.
만약 신호수를 2팀으로 짬 처리 시키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주했을 상황이겠지.
흐흐.
황부장의 고성이 끝나자 1팀 단톡방이 울렸다.
정 [박대리 울거 같은데요...]
오 [자업자득이지 뭐.]
고 [불쌍.]
정 [황부장 저새끼는 아침부터 욕질;;]
김 [그러게 말이다.]
최 [신호수 비품들 전부 택배 보냈지?]
정 [현재 확인 중입니다.]
그런데 2팀의 송팀장에게는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송팀장은 저번 주에 자진해서 신호수 파견 업무를 맡아보겠다고 한 양반이 아닌가.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황부장 밑에서 기죽어 사는 거 안타까웠다.
나는 송팀장에게 뭔가 마실 거라도 사주고 싶었다.
무거운 2팀 분위기를 뚫고 송팀장에게 나아갔다.
황부장이 내가 2팀에 얼씬거리고 있으니 또 그냥 못 넘어가지.
"김과장 무슨 일이야."
"송팀장님 하고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할 말.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2팀 신호수 업무 관련인데. 그렇다면 그냥 가보겠습니다."
"...얘기해봐."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송팀장에게 간단히 음료수라도 마시자는 시늉을 하며 그를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흡연하지 않는 송팀장을 배려하여 인근 카페로 향해 과일주스를 사줬다.
"오랜만에 2팀은 사원들이 바글바글하네요."
"머리는 없고 팔다리만 달린 새끼들입니다. 맘 같으면 황부장처럼 욕 좀 하고 싶은데요. 속 터져 죽겠습니다. 어휴. 다들 대체 뭐하고 쏘다닌 건지. 요즘 1팀 고현준이 일을 참 잘하던데요. 저희가 2명 보내드릴 테니까 바꾸실래요?"
"흐흐. 사양하겠습니다."
"교육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네요. 제가 뭐 하나를 알려주면 또 일이 터져버리고, 또 알려주면 또 다른 일 터지고...김과장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야 뭐. 워낙 애들이 일머리가 좋아서요. 제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움직여 주죠."
"아..."
"사실.. 생각을 좀 바꿔봤습니다."
"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갈구는 거 전 싫어하거든요. 일을 못하면 못한다고 갈궈, 일을 잘해도 건방져서 갈궈, 저도 너무 많이 느껴봐서요."
"아.."
"저는 그게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사들이 내게 질타하는 거 전부 내 경험이고, 억울하게 일을 덤탱이 쓰여도 그것도 경험이라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그런데 그건 경험이 아니더라고요.."
".."
"그저 값진 경험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소주 한잔에 쓸어내렸는데..지금 생각해보면 전부 상처더라고요. 제 밑에 딸린 애들에게 상처 주는 거 싫어졌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꿔보니 언제부턴가 애들이 알아서 움직이더라고요."
"쉽지가 않네요...제가 아무리 사원들 앞에서 솔선수범한다고 하더라도 따라오는 애들이 없으니 원..."
"그건 송팀장님을 무시하는 거죠. 그건 바로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아..제가 봤을 때 모든 건 과장님 인복입니다.. 저는 이거 오래 못 버틸 것 같아요. 한계입니다. 한계. 위에서도 지랄. 밑에서도 지랄. 아주 사방에 지랄들이라.."
"송팀장님. 힘내시죠. 그래도 송팀장님 없으면 우리 회사 안 굴러갑니다."
"말씀이라도 감사하네요."
"그나저나 박대리도 그렇고 다른 사원들 저렇게까지 일하는 거 참 오랜만에 봤네요. 자식들. 정신 좀 차렸나 봅니다."
"김과장님."
"네?"
"사실 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요.."
"...?"
"김과장님과 박대리 사연도 알고 있어서 제가 여태 말씀은 드리지 않았는데..박대리 정도야 제가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혹시 2팀 사원들 중에 문제가 있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교육하겠습니다."
"아.."
"저도 그 박대리 새끼 마음에 안 들어서 김 과장님한테 욕먹을 때마다 속 시원하긴 했지만 이제부터라도..부탁 좀 드릴게요."
"그럼요. 제가 그간 송팀장님 생각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송팀장도 황부장 바로 아래 직급.
그래서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내가 2팀 애들을 잡아다가 갈구고 지시한다면 송팀장 입장에서 조금 난처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송팀장도 나름 2팀의 체계를 잡기 위해 노력을 하는 상황.
그의 고충 정도야 너무 잘 알지.
송팀장은 내 사과를 듣고도 연신 웃으며 혹여나 언짢을 수 있는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황부장 밑에서 오래 일했죠? 이제 4년쯤 되셨나요?"
"그렇죠. 김과장님이 대리로 계셨을 때부터니까. 그 정도 됐죠."
"송팀장님 같은 분이 황부장 밑에 있다는 게 참.."
"뭐 저야. 어쩔 수 있나요.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그런데.. 김과장님 혹시 소식 들으셨나요?"
"네?"
"박찬혁이 사무실에 들어 올 수도 있다고 했어요. 이걸 과장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박찬혁이..."
"아무래도 현재 2팀이 신호수 업무도 그렇고 다른 지방 현장도 거의 작살나기 직전이라 서요..황부장이 따로 지원 요청한 것 같아요."
씁쓸했지만 언젠가 마주칠 인물.
"괜찮아요. 뭐. 언젠가 한 번 얼굴은 보고 싶었는데.. 언제 온답니까?"
"오전에 구미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아마 점심쯤 지나서 도착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이면 제가 따로 얘기할게요. 거슬리는 짓 하지 말라고."
"송팀장님."
"네?"
"괜찮아요. 회사 생활에 이런 변수 정도는 재밌잖아요?"
"아.."
언제든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 변수를 막고 또 막고 그리고 또 터지고 또 막고. 그 반복되는 변수로 하루를 마감할 때 사람은 녹초가 된다.
그런데.
이제 그 변수가 무섭지가 않았다.
특히 사람.
내가 미치도록 증오하는 인간과 언젠가 마주하게 될 날이 올 것이고, 사내 생활을 하면서 언젠가 싸대기 한 대 날리고 싶은 인간과 옆에서 일하는 경우도 생긴다.
숨소리마저 듣기 싫은 상사도 있기 마련이고.
사람은 색깔이 다양해 이런 변화 속에 어떤 변수가 터질지 예상하기가 어렵다.
박찬혁이가 이를 악물고 복수를 위해 사무실에 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사무실에 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박찬혁이의 등장은 어찌 됐든 내가 예상 했던 일.
사내에서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곤 했지만, 그 적을 알고도 가만히 있는 건 멍청한 짓 아닌가.
게다가 내가 직접적으로 박대리에게 너희 형 얼굴 한번 보자고 얘기했던 부분이다.
그냥 한번 그 적을 궁금해 보자.
대체 왜 좁아터진 워킹휴먼에서 그렇게 버텨대는지.
그리고 나와 싸워 놓고선 무슨 정신으로 다시 사무실에 들어오는지.
나는 홀로 흡연실에 앉아 담배꽁초를 떨쳐 버리듯 박찬혁을 머릿속에 떨어내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제 곧 점심시간.
"오늘 점심은 뭐 드실 겁니까?"
현준이가 내게 말했다. 최부장은 외근 업무를 나가 있는 상태라 점심은 내가 결정을 해야 할 일.
여태 막내 현준이가 계속 점심 식사메뉴를 정하고 식당을 잡았는데 그게 스트레스라며 오대리에게 하소연을 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앞으로 점심은 최부장과 내가 결정하기로 했었다.
"너희끼리 먹어라. 카드 받아. 인당 만 원씩은 넘겨라. 아껴 쓰지 말고."
"...?"
나는 현준이에게 카드를 건네주며 말했다.
사원들과 밥을 먹는 것보다 점심시간을 이용한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정말 급하고도 중요한 일.
그때
"저희 앞으로 식대까지 지급되는 건가요?"
"...?"
오대리가 내 얼굴을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순간적인 나의 행동으로 봐서는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점심 플렉스.
"앞으로 그 카드가 우리 물류1팀 점심 카드니까. 누가 관리할래?"
"아...제가 하겠습니다."
정주임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네 번째 메인 퀘스트 존경 욕구의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