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간 궁금했던 점을 쏟아냈다.
"혹시 명석이 와이프..아니 신애씨는 보통 무슨 상담을 하던가요?"
"아..도일씨가 아무리 궁금하다고 하셔도 저는 비밀유지서약을 맺었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아.."
"그래도 궁금해하시니 짧게 말씀드리면 보통 스트레스죠."
"그렇겠죠.. 아무래도 PD시니까.. 성격도 엄청 철두철미하고 완벽주의자 성향이신 것 같았거든요. 제가 노래방에서 오디션 보듯이 테스트를 봤다니까요?"
내 말에 지영씨가 웃어댔다. 그녀도 신애씨 성격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시죠."
"노래할 때 눈감지 마라, 마이크 똑바로 쥐어 달라, 짝다리 짚지 말고 얌전한 자세 등등 솔직히 어휴. 제가 여태 노래했던 무대 중에 제일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굉장히 잘하시던데요? 깜짝 놀랐어요. 도일씨 노래할 때 하객분들 표정이 엄청 놀랬다니까요. 와. 연예인 아냐? 이런 사람도 있었고요."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닌가요.. 그 정도 아닙니다."
"아니에요. 충분히 거만하셔도 되고 자랑하셔도 되는 목소리에요. 그리고 도일씨 정도의 실력이면 가수해도 늦지 않아요."
"아..그러고 싶었으나.. 제가 그쪽 분야에 인맥이나 제반이 있는 것도 아니라 서요. 그리고 먹고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죠. 다들 그렇게 사시는 거죠. 그런데 도일씨한테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네!"
"저번 주에 저한테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셨다고 했는데.. 저희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 나누기로 했잖아요?"
[김도일님의 스트레스 지수가 월등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파악 중입니다!]
[이지영 상담사에게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휴먼매니저가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감지하더니 대화를 시작하라며 채근했다.
어제는 내가 이뤄낸 목표를 달성했다고 문자까지 보내놓고선 내 입에서 그 목표가 로또 1등이라고 나와 버리면 안 되는 일.
다른 목표를 얼른 생각해내야만 했다.
난 대체 저번 주에 무슨 목표를 달성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치 학교 선생님의 수학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어..."
"말씀하시기 불편하시면 괜찮아요..그냥 차분히 생각해보세요."
"친구들하고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한 건 여태 친구들에게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술 한잔하자
괜찮냐?
네 맘 알겠다.
이런 문자 한 통이라도 왔으면 적어도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지영씨는 내가 얘기한 부분을 한참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잘하셨어요. 도일씨가 그간 목표로 삼아오신 일이었으니까. 잘하신 일이죠."
"조금 후회도 됩니다. 친구들하고의 관계를 적당히 유지만 하면 될 것인데 굳이 내가 내 감정을 얘기해서 친구들 사이 가십거리가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뭐 어차피 친구들이 나를 안 보겠다면 상관은 없는데 그 친구들 중에 만약 제게 연락이 오는 친구가 있다면 그걸 거절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조금은 좋은 친구들이 있길 바라는 거죠?"
"네. 명석이는 제가 어렵고 힘들 때 만난 친구라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 제가 바라는 건 그 정도 수준의 관계는 아니에요. 그냥 친구끼리 모였을 때 내 맘이 편했으면 하는 거예요. 적당히 의리 있고 적당히 서로 공감해주고 적당히 이해해주고.. 제가 바라는 건 딱 그 수준입니다."
"아..친구들과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았나요?"
"보통..꼭 거슬리는 친구들 한두 명씩 있지 않나요?"
"그렇죠. 사실 저는 도일씨처럼 그런 용기가 없는걸요."
"네?"
"내 얘기를 항상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나 매번 시기와 질투를 하는 친구, 그런 친구들 저도 있어요. 그래서 가끔은 만나기 싫을 때도 있는데 섣불리 용기가 나질 않았거든요."
"앞으로 제가 살아가는데 친구 몇 놈 없다고 불편한 건 없어요. 그리고 친구 놈들 때문에 제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싫었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서 터뜨려 버렸는데 속 시원하더라고요. 정말로..지영씨도 한번 해보세요."
"그렇게 해볼게요."
내 말을 듣고 해맑게 웃던 지영씨가 이내 안경을 쓰윽 올리며 다소 냉소적인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노트북에 타자를 쳐대기 시작했다.
나는 예전부터 궁금했다.
대체 뭘 그렇게 쓰는 건지.
"혹시 뭐 쓰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처방입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고 차후에 상담이 끝나면 그때 공유해드리도록 할게요."
"아.."
"이번주 목표를 도일씨가 아주 잘 이뤄내셨으니 다음 주에 저희 만날 때는 도일씨 주변의 관계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관계요?"
순간 그녀가 얘기한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보며 따스한 얼굴로 부언해 줬다.
"어렵게 생각 하실 게 없어요. 사회에서 가지는 도일씨 관계나 사적으로 가지는 관계 등등 그중에서 도일씨가 가장 특별하게 생각하는 관계가 뭔지..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든 내색을 하며 지영씨와 이런 관계를 맺는 것도 그녀를 기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이번 주에 영화 한 편 보자고.
그런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
차근차근 밟고 나가고 싶었다.
급할 게 뭐가 있나.
게다가 솔직한 속내를 어딜 가서 얘기할 곳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영씨가 말한 내가 가진 관계를 생각하는 거?
지영씨가 내 걱정을 위해 관계를 한번 재정립해보라는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약해 빠진 놈이 아니다.
난 스트레스도 없고 친구들과의 관계 따위는 사실 아무렇지도 않다.
회사에서도 만족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내 통장에는 141억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영씨가 건네준 과제를 충실히 한번 생각해볼 거다.
그래야 다음 주에 만났을 때 진지하게 한번 얘기를 나눠 볼 테니까.
비록 지영씨와 만나는 이 공간이 카페는 아니지만..
다음 주에는 지영씨와 나 사이에 커피 한잔을 두고 얘기하고 싶었다.
* * *
관계를 맺는 건 쉬워도 끊는 게 참 어렵더라. 사람들이 줄곧 말했던 이야기들이다.
반대로 맺는 게 어렵고 끊는 게 쉬운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둘 중에 어떤 부류에 속할까.
둘 다 아니겠지.
내가 만약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관계를 맺는 일도 어려웠을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관계를 끊는 것은 더 어려웠을 거다.
그럼에도 내가 맺은 관계 중에서 이유 불문 항상 맺고 있는 관계
혈연.
내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이후에도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은 건, 엄마도 로또 2등 당첨금액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내가 이걸 알게 된 건 며칠 전 돼지로또 복권방 사장님이 로또 2등 당첨 여부에 관해 물었기 때문이었고,
분명히 엄마에게 그 2등 당첨 로또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내심 엄마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수일이 지나도 전화가 오질 않았다.
이게 내가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물론 내가 엄마의 그 욕심에 화가 나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나 또한 1등에 당첨됐지만 나 혼자 꽁꽁 싸매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2등 당첨금액이 있다면 그걸로 뭐라도 좋은 거 사먹고 좋은 옷 사 입었으면 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엄마가 돈이 떨어질 때쯤 매달 꾸준히 생활비를 넣어드릴 생각이었다.
아파트에서 같이 살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엄마가 살고 있는 동네에 좋은 집 하나 얻어주고 살게 해주면 했지 같이 살기는 싫었다.
내가 엄마와 같이 살면 부딪치는 일도 많았고 엄마도 엄마 나름의 삶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간섭하는 부분이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만 했다.
이제 곧 다음 주면 환갑.
동생도 상경하여 올라온다고 했으니 조만간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환갑 기념으로 외식 계획을 잡았었다.
"엄마!"
내 목소리를 들은 엄마는 연신 반가워했다. 아무래도 요즘 사는 게 즐거운가 보다.
-도일아! 이번 주에 동생 올라오는 거 알지?
"같이 밥 한 끼 먹어야지. 엄마는 요즘 어때? 일은 계속하고?"
-쉰다. 이번에 식당들이 많이 폐업해서 일할 곳도 마땅치도 않고..
"잘됐네. 하지 마. 내가 준 로또는 잘 쓰고 있지?"
-그래. 덕분에 장 볼 때나 잘 쓰고 다니지.
"그래 잘 쓰고 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엄마 아들 잘나가니까."
-도일아.
"응?"
-네가 준 로또에 2등 당첨 금액이 있더라. 그거 네 결혼 할 때까지 안 쓰고 있을 거니까. 걱정 말고. 내가 너한테 안 주는 거는 네가 펑펑 써버릴까 걱정돼서 그런 거야.
"아..."
-왜? 엄마 못 믿겠어?
"아니.. 엄마. 그게 아니라. 그냥 써. 괜찮아."
-개뿔.
하아.
나는 엄마와 통화를 끊고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이게 내 수준이다.
그저 돈 앞에서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고 앞 뒤 구분 없이 생각하는 거.
나는 그저 엄마가 그 돈을 꽁꽁 숨겨 놓은 줄만 알았다.
시발.
스스로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쪽팔리고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아이고 깜짝아!
"그거 돈 다 써! 그거 돈 다 안 쓰면 난 앞으로 절대 결혼도 안 할 거고 연애도 안 할 거야. 이번 주 안에 은행가서 2등 돈 받아다가 다 쓰라고!"
-애가 미쳤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나 돈 많이 번다고!"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간 엄마에게 서운하고 찜찜했던 마음이 한 번에 가셨다.
나는 나이 30 중반 먹어서도 부모 되는 마음도 잘 모르고 내 새끼 앞에서 희생하는 법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내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자식이 있지 않은 것도
현재로선 참 다행이다.
오랜만에 출근길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제 곧 11시.
현재까지 로또 LV6 달성을 위한 존경의 욕구 메인퀘스트의 진행은 지지부진한 상황.
됐다.
살다 보면 어찌 됐든 완료하겠지.
그래도 이번 주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이다.
음봉은 부숴야 제맛이다.
사실 회사에서 이렇게 주식투자를 하는 게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가끔은 이런 일탈도 하는 게 회사 재미 아니겠나.
우량주에 담아 놓은 주식이 하루 사이에 총 2%나 올랐다.
개장과 함께 2억을 먹었다.
주식 봉 차트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양봉과 음봉의 조화가 한일 축구처럼 붉은악마와 사무라이블루의 대결을 보는 것 같았다.
파란색 음봉이 치솟을 때면 속에서 열불이 터지곤 하고 우리 팀 빨간색 양봉이 또 솟아오르면 축제고 설렌다.
양봉과 음봉은 절대로 섞일 수가 없다.
크크.
하루아침에 불과 몇 분 사이에 2억을 벌었는데 일에 집중이 될 리가 있나.
내 머릿속은 이미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혼집으로 33평 아파트 정도면 충분하긴 하지만 내 재산으로 33평은 검소하다.
뭔가 더 사치를 부릴 만한 게 없을까 생각해보면 역시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