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29/200)

"와..."

"그리고 어깨 좀 펴라. 네 친구 절대 어디 가서 기 안 죽는데 네가 기죽어 있으면 어뜩하냐."

"..."

"식장에 있는 사람들 전부 네 하객이야."

명석이는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명석이의 어깨를 조금 세워주고 싶은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다.

결혼식이 곧 시작될 때 친구들과 나는 식장으로 들어가 자리했다.

원탁 테이블에 하얀 테이블보가 깔렸고 중앙에 놓인 꽃과 테이블 사이사이 보행자들이 다니기 편하도록 만든 의자 배치

역시 이래서 호텔 결혼식을 하나 싶었다.

식은 예정된 수순으로 아주 철저히 진행됐다.

마치 TV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이 계획적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인 각본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일까?

그리고 내가 축가를 부를 때가 됐을 때 나는 명석이와 신애씨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 지.

그래서 나는 신애씨가 만든 결혼식 프로그램에 예정에도 없고 계획적이지도 않은 일을 한가지 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쥐고 하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제 친구 명석이랑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거 없고 남들보다 뛰어난 건 없지만, 만약 처자식이 생기면 리어카를 끌지언정 먹여 살리자고.. 제 친구는 그런 친구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친구 명석이와 앞으로 명석이와 평생 함께할 신부님에게 이 노래를 바치겠습니다."

명석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명석이를 친구로서 존경을 표하고 싶었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던 명석이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조명에 빛나는 롤렉스를 강조한 뒤 눈을 감고 그들 앞에서 축가를 불렀다.

언젠가 매번 친구들 결혼식 때마다 불러줬던 노래 박완규의 ‘사랑하기 전에는.’

그대를 사랑하기 전에는 사랑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런 식의 사랑이란 단어가 구구절절 나오는 노래였다.

눈을 감으며 내 노래에 심취했다.

그리고 슬쩍 눈을 떠서 하객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수많은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띄게 한 사람에게 꽂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곳에 나의 심리상담 선생님이 있었다.

언제든지 노래를 해줄 의향이 있지.

명석이 와이프 신애씨는 내가 축가를 부를 때 눈을 감지 말아달라고 했다.

눈을 똑바로 떠서 자기들을 온전히 바라보며 우수에 찬 눈빛으로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는 그 약속을 어겼다.

그건 내가 평생 노래를 하며 가진 습관인지라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만약 신애씨의 부탁대로 눈을 감지 않고 처음부터 그들을 바라보며 축가를 불러 줬다면,

수많은 하객 중에서 상담 선생님을 찾아낼 수가 있었을까.

그녀에게 다가가서 뭐라도 한 마디 붙여보고 싶었으나 서로의 지인들끼리 뭉쳐 있는 관계로 쉽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녀도 날 분명 알아봤을 거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결혼식이 끝나버렸으니 그 아쉬움을 어찌 말로 설명하랴.

선생님에게 깨톡을 보내 볼까도 했지만..

무슨 말을 하지.

‘결혼식에..선생님 맞죠?’

‘혹시 결혼식 오셨었나요?’

그냥 말자.

인연 억지로 당기는 것도 도리어 상대방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친구들과 강남 인근의 주점에서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술자리를 잠시 빠져나와 아직까지도 문자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내 옆으로 친구 한 놈이 다가와 담배 한 대를 물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요즘 어때? 명품으로 다 휘감은 거 보니까 요즘 잘나가나 보다."

결국 명품에 환장한 친구 몇 놈이 내 정장과 롤렉스가 진품이란 걸 감별해내더라.

짝퉁과는 확실히 다른 구석이 있으니까.

창수는 대학교 동창이었는데 현재 결혼하고 두 살 애가 있다.

"잘나가긴 그냥 별일 없이 산다."

"이게 별일 없이 사는 거냐? 이거 시계 롤렉스 서브마린 맞지? 이천만 원 정도?"

"맞아."

"너 요즘 뭐하냐?"

창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 앞에서 자랑하는 거는 딱 이 수준까지만 하자.

"소신껏 사는 거지 뭐. 내가 사고 싶어서 샀어. 너도 살 능력 있잖아? 참고 사는 거뿐이지."

"그치. 나도 참는 거지. 막말로 내가 시계 하나 못 사겠냐."

"그래. 알아."

창수가 담배를 깊게 마시며 허세를 떨어댔다.

"막말로 아버지 사업만 제대로 물려받으면 롤렉스고 뭐고 씨발 다 내꺼지. 안 그냐?"

창수는 매번 만날 때마다 아버지 얘기로 거들먹거렸다.

아버지 사업체를 물려받는 다는 게 10년이 넘었고 10년째 똑같은 얘기다.

"너 아직도 꽃집 못 물려받았냐?"

"야. 꽃집이 아니라 화훼단지야. 넓기도 엄청 넓은 거 알잖냐."

"그게 꽃집이지."

"지랄하지 말고. 나중에 너 할 일 없으면 이 형이 언제든지 인력으로 써줄게."

"됐다. 꽃꽂이 재능 없다."

"야이 씨바 꽂꽂이 하는 거 아니라니까."

"식물들 물이나 좀 주러 들어가 볼까."

"저 새끼가! 야!"

* * *

참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댄다.

친구들하고 주점에서 룸을 잡은 거는 워낙에 시끄럽게 떠드는 친구들이라 간혹 다른 술자리와 시비가 붙은 적이 많은 탓이었다.

경찰도 오고간 큰 사건도 많아서 친구들이 결혼한 이후로는 총각 때 자주 갔던 룸을 잡고 술을 마셔댔다.

남들하고 시비 붙을 이유도 없고 우리가 마음껏 떠들어대도 눈치 볼 일도 없으니까.

물론 불법유흥주점은 아니다.

그냥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할 수 있는 정도.

잡다한 얘기들이 오갈 때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려댔다.

상담 선생님의 문자였다.

[혹시 도일씨 오늘 축가 부르러 오셨나요?]

역시.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될지 고민이 생겼다.

‘어떻게 아셨어요?’ 라고 얘기를 한다면 내가 그녀를 보지 못 한 거고, ‘저도 선생님 봤어요!’라고 말을 한다면 봐놓고선 못 본 척 한 꼴이니까.

어렵네.

[혹시 선생님도 결혼식 오신 거 맞죠?]

[헉. 저 보셨어요?]

[긴가민가했어요. 축가 부를 때 본 것 같아서요.]

[맞아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신기하네요. 저도 바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혹시나 불편해 하실까봐서...]

[저도 그래서 ㅜㅜ]

[ㅎㅎ 노래는 어땠어요?]

그냥 궁금한 마음에 그녀에게 노래는 어땠냐고 물었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록 답장이 오질 않았다.

바쁜가.

아니면....

밀당?

어휴 병신아.

내담자와 상담사 관계로 하루 만났고 소개팅 사이도 아닌 데 내가 지금 뭔 병신 같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말자.

나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창수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술만 마셔댔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면 다시 이야기 삼매경.

최근 아파트를 되팔아서 시세 차익을 얻었다거나 상가 임대 사업을 시작해서 월 꼬박 수입이 들어온다든지 아니면 최근 주식으로 5% 밖에 못 먹었는데 그게 수천만 원대라던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맥락을 잡고 대화에 끼어들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주제가 난무했다.

그때 이야기를 항상 주도 하는 순호가 대뜸 나에 대한 주제를 잡고 이야기를 해댔다.

"야 아까 도일이 축가 부를 때 멘트 오글거려서 뒤질 뻔했다."

"도일아. 인간적으로 40대 이상 드신 제수씨 앞에서 그게 뭐냐? 리어카? 씨발 솔직히 좀 쪽팔렸다."

하긴 그들은 속된 말로 금수저라고 불리는 집안의 친구들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20살 때부터 벤츠를 끌고 다닌 친구도 있었고 자취를 아파트에서 시작한 친구도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친구들하고 통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대학 동창이라는 허울이 있으니 말이다

"어휴 병신들아. 내가 진짜 리어카를 끈다는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잖아. 맥락을 이해 못 해?"

"크크. 하여튼 너는 명석이 껌딱지라니까. 아니지 명석이가 네 껌딱지인가? 맨날 붙어 다녔으니..그런데 명석이 우는 거 보니까 씨발. 존나 웃겨 뒈질 뻔했다."

"울 수도 있지. 친구끼리."

"친구끼리? 그러고 보니까 너 내 결혼식 때는 노래 한 곡만 부르더니 여기선 두 곡이나 뽑아 주더라?"

"친구가 부탁하잖아. 그리고 솔직히 나도 존나 긴장 되더라. 가사 까먹으면 제수씨한테 뒤질 각오 하고 불렀거든."

"와이프가 PD라고 했나?"

"엉. 인맥 짱짱하던데? 화환 봤냐? 방송국 국장까지 왔더만."

"명석이가 대체 무슨 재주로 그런 여자를 만났을까."

그리고 그들은 명석이가 일부러 신애씨 임신을 시켜서 속도위반을 했다드니 명석이가 돈 만 보고 결혼을 했다느니, 축의금을 오만 원 했다느니 웃음거리와 가십거리로 만들어댔다.

하긴.

"도일이 너는 요즘 뭐해?"

"나? 그냥 일 하면서 살지."

"차림새를 보니까 보통 일은 아닌 것 같고. 친구들한테 속 시원하게 얘기해 봐. 뭐야 대체."

"그렇게 궁금하냐? 주식으로 좀 벌었어. 그게 전부야."

"오. 이 새끼 이거 많이 컸네. 뭐야? 어디 넣었는데?"

"그냥 물 탄 거야. 작전주 모르고 들어갔다가"

"도일이 인생 역전 기념으로 노래 한 곡 들어야지 않겠냐?"

창수의 말에 친구들이 좋아했다. 하긴 친구들은 내 노래를 듣는 걸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이 친구들을 만난 건 내 노래 실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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