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28/200)

뭔가 더 영화 같을 때.

그때 비로소 내가 등장을 한다면 친구들도 더 놀라지 않을까 싶었다.

"저희가 정장 한번 맞춰드릴게요. 그거 맞춰서 입고 오시면 돼요. 혹시..괜찮으실까요?"

"네..뭐 감사하죠. 정장... 감사한 일이죠. 그리고 혹시 더 부탁하실 건?"

"객석에서 앵콜 요청이 들어올 수도 있어요."

"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결혼식에서요..?"

"제가 축가비는 후하게 쳐 드릴 테니까 제가 부탁하는 곡 한번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주 계획적이고 치밀한 결혼식이 아닐 수가 없다.

결혼식에서 앵콜까지 계획한 저 모습을 보니 이번 결혼식에 내가 혹시라도 가사를 까먹거나 사고를 친다면 아주 평생 원망을 들을 것 같았다.

하긴 명석이나 신애씨가 여태 오간 결혼식이 얼마나 많았을까.

신애씨도 결혼에 대한 로망이 생겼을 것이고 부족한 점이나 장점을 파악해서 본인 결혼식에 접목하려 했겠지.

"도일아."

화장실에 있는 나를 명석이가 찾아왔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한테 좀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괜찮냐? 어때? 와이프 성격이 좀 깐깐하지?"

"원래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누구 하나가 주도해서 하는 게 낫다고 하더라. 그게 복이야. 네 복."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 휴."

"그런데 웬 갑자기 정장이야. 내가 그 정도 차림도 못할 것 같았어? 세상에 축가 한번 해준다고 정장까지 맞춰주는 사람이 어딨냐."

"흐흐. 개꿀이지?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부탁했는지 아냐? 그래도 이번 기회에 좋은 정장 하나 맞춰 입으면 좋지. 크크. 너 생각해서 사주는 거야."

"명석아."

"응?"

"나 진짜 괜찮아. 그러니까 제수씨한테 잘 말씀드려."

"..."

"그리고 노래방까지 가야 되나? 너 내 실력 알잖아."

"알긴 아는데. 와이프가 워낙... 철두철미한 사람이라. 똥두 제 손에 찍어봐야 똥인 줄 아는 사람이라니까. 미안해. 이해 좀 해줘."

"친구니까 해주는 거야."

"흐흐."

"그리고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되냐?"

"뭐?"

"제수씨 직업이 뭐야?"

"PD."

"아.."

.

신애씨의 직업은 PD였다.

그냥 PD도 아니고 현장르포전문PD.

‘세상에 저런 일이’ 나 '궁금한 이야기 U' 같은 프로그램을 주로 맡는다고 했다.

그제야 신애씨가 내 노래 실력을 의심했던 성격이 이해됐다.

얼마나 많은 거짓제보와 싸워 왔겠나.

1차는 일식집에서 먹고 이제 2차로 내 노래 검증을 위해 노래방으로 향했다.

명석이가 먼저 첫 곡을 뽑았고 그 이후에 신애씨.

참 둘이 잘 만난 것 같았다.

어떻게 무슨 사연으로 만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서로 쿵짝이 잘 맞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보기 좋다.

보기 좋은데 왜 꼴 보기도 싫은 걸까.

그리고 내 차례가 왔을 때 미리 명석이와 얘기한 축가곡을 선곡했다.

반주가 흘러나오자 나는 예전 기억을 되새기며 노래를 불렀다.

가사에 흠뻑 취하며 음미했다.

나는 노래를 부를 때 눈을 감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내 목소리에 더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가끔 노래방 분위기를 확인하기 위해 실눈을 뜨곤 하는데 그때마다 내 노래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실눈 사이에 보이는 명석이와 신애씨의 리액션이 내 감정을 더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노래가 멈췄다.

노래가 일시정지 된 느낌.

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신애씨를 바라봤다.

"혹시 노래하실 때 눈 뜨고 저희들 바라봐 주시면 안 될까요?"

"아..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이크를 너무 휘어 잡고 있으니까 허세..아니 그..뭐랄까. 좀 정직하게 부른다는 느낌으로 부탁드릴게요."

"아..."

명석이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휴우.

그리고 나는 오디션을 보는 심정으로 다시 이 깐깐한 PD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몇 번의 자세를 고친 끝에 신애씨의 오케이 싸인을 받았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내 옆에 신애씨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아닌

옆구리 시린 그런 소소한 쓸쓸함.

그리고 나는 며칠 전 심리 상담을 받았던 선생님에게 깨톡을 보냈다.

선생님은 내게 한 가지 목표를 설정해두고 일주일을 살아보라고 했다.

그것에 대한 답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번 주에 말씀하신 한 가지 목표 이뤄냈습니다.]

사실 선생님에게 사적으로 문자하는 경우는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일 때를 제외하고 웬만하면 하지 않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냥 하고 싶었다.

[축하드려요. 그래서 기분은 요즘 어떠세요?]

그리고 다행히.

내 깨톡에 아주 친절히 답장을 해줬다.

[그냥. 기분이 오락가락 하긴 하네요..한 가지 목표만으로는 부족한가 봅니다. 그래서 조금 우울하기도 하고요...]

[ㅎㅎ 원래 사람이란 게 그렇죠. 만나 뵙게 되면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나눠봐요^^]

[네!]

사실 행복하고 즐겁다. 라고 쓰려다 문득 내가 행복하고 즐거우면 굳이 상담센터에서 치료를 받을 게 있을까 싶었다.

‘연애하고 싶다.’

141억을 가진 자산가도 쉽게 할 수 없는 게 연애와 결혼이다.

명석이와 신애씨 처럼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거는 돈으로는 이뤄내기 힘들 것 같았다.

노파심일수도 있지만 내가 연애를 하게 되거나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 141억을 바라보지 않을까 싶다.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올해는 연애 좀 해보자고.

* * *

명석이의 결혼식이 있는 날.

강남역 부근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청담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고급지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불미스런 안전사고에 대비하여 인이어를 꼽고 돌아다니는 경호원들도 곳곳에 보였다.

대체 누가 뭔 결혼식을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기업가 자제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허나 명석이의 결혼식이 기업가 자제들의 결혼식에 비해 꿀리는 건 결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대단했다.

특히 신애씨

인맥 하나는 아주 기가 막혔다. 방송국에서 보낸 화환과 그간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취재를 했으니 기업을 맞먹을 정도의 화환이 복도에 빼곡히 깔려있었다.

내 노래를 검증하겠다는 신애씨의 마음이 이해됐다.

신애씨 사회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날이지 않는가.

그리고 단연코 눈에 확 띄는 결혼식 화환은 역시 나와 친구들이 보내준 것.

그리고 화환에 적힌 짧은 글귀.

‘네 인생에 2차는 없다.’

친구들과 깨톡방에서 의논 끝에 내린 글귀였다.

네 인생에 앞으로 술자리 2차는 없으니 가정에 충실 하라는 뜻.

내가 생각해낸 글귀였는데 지금 봐도 참 잘 썼다.

중의적으로 두 번째 결혼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축의금을 얼마나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오래전 친구끼리는 기본 30만 원씩 잡자고 재일이가 얘기했었고 그녀석이 제일 먼저 결혼해서 가장 많은 축의금을 거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 세 번째가 될수록 축의금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끝자락에 결혼하는 명석이는 아마 친구들에게 낸 축의금은 못 건질 거다.

이게 매번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얘기하는 하소연이더라.

제일 먼저 결혼한 재일이가 승리자라고.

크크.

어찌됐든 명석이는 나의 15년 지기 친구라 축의금 정도는 두둑하게 내주고 싶었다.

300만 원.

그 정도면 명석이 앞에서 고개 좀 빳빳이 들고 다닐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명석이는 연신 하객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해서 쉽게 다가가진 못했는데 실제로 하객들의 70%가 신애씨의 지인이기 때문에 명석이는 이내 어색하게 서 있기도 했다.

나와 친구들은 구석에 모여 그간의 일상을 얘기하느라 명석이는 신경 쓰지도 않고 있었다.

"도일이 패션 죽이는데? 손목에는 뭐야. 이거. 와.. 롤렉스 아냐?"

"어. 짭이야."

"에이. 이거 진짜 같은데?"

"아냐. 인터넷에서 오만 원 주고 샀어. 진짜 같지?"

"크크. 역시 너답다. 정장도 죽인다."

창수는 내 정장 뒤에 브랜드 텍을 확인했다.

"에르메스?"

"어. 이건 동묘에서 샀어."

친구들 앞에서 거만함과 허세를 떨까도 싶었지만 홀로 어색히 서 있는 명석이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역시

재일이도 오질 않았다.

뭐 북미 여행 중이라 어쩔 수 없는 건 알겠지만 명석이는 재일이에게 좋은 친구였다.

힘든 일 있으면 같이 있어주고

금전적으로 힘들면 명석이는 기어이 도와줬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다 명석이는.

나는 친구들에게 대충 둘러대고 무리에서 빠져나와 명석이에게 향했다.

명석이는 홀로 멍하니 서서 드문드문 등장하는 지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명석이 회사 직원들의 모습들이 보이긴 했지만 역시 방송국 파워와는 비교 불가의 수준.

너무 대비된다.

나는 어색히 서있는 명석이에게 다가갔다.

"명석아."

"왔냐?"

명석이는 나를 왈칵 안아줬다.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서 얇게 접은 봉투를 꺼내 명석이의 주머니에 찔러줬다.

"삼백 넣었다. 신혼여행가서 잘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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