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짧은 단답으로 대답했고 명석이는 역시 결혼 준비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와이프가 노래 좀 먼저 들어보고 싶다는데. 언제 시간 한번 되냐. 같이 밥한 끼 먹게.]
[지금 내 노래 실력 의심?]
[ㄴㄴ 그냥 들어보고 싶대. 어차피 결혼식 전에 한번 얼굴 보고 해야 되잖아. 겸사겸사]
[ㅇㅇ 일단 나 지금 바쁨 ㅅㄱ]
친구들의 깨톡방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내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단 한 번도 친구들 깨톡방에서 내 자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자랑을 할 게 있었나?
내 이야기가 엄청나게 빗발쳤을 때는 내가 사고가 났을 때였다.
이번에는 나도 깨톡방에 무엇이든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깨톡방을 다시 켜서 한 글자씩 써내려 간 짧은 글.
[존나 행복하다.]
아마 친구들도 내가 쓴 글을 보고 의아해 할 거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깨톡방을 확인 했지만 숫자1이 거의 다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내 글에 답글을 달아주는 친구는 없었다.
읽씹?
그때 누군가 글을 올렸다.
[도일아 조증왔냐. 갑자기 무섭다.]
[도일아..내가 적십자에 매달 후원하는 거 있는데 너한테 좀 도움이 됐으면 싶다. 괜찮냐?]
[ㅋㅋㅋ 병신 행복하긴]
[네가 행복하면 안돼 ㅜㅜ 나는 뭐냐고..]
씨바새끼들.
됐다. 친구들한테 내가 뭘 바라겠냐.
그때 때마침 로또 추첨 방송이 시작됐다.
나는 TV를 음소거 시켜버렸다.
내 시선은 오롯이 저 1부터 45까지의 공이 들어 있는 투명한 통에만 향해 있었다.
통 속에서 알록달록한 동그란 공들이 마구 나부끼더니 숫자 하나가 통에서 올라왔다.
「11」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로또 용지에 11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23」「35」「39」「40」「41」
이 적막한 방안에서 뭔가 소리를 지르거나 5등이 당첨됐을 때 엄마랑 방방 뛰었던 것처럼 엄청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지는 않았다.
덤덤하게 로또 용지와 TV를 번갈아 보며 재차 확인하며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깨톡방을 열었다.
[그런데 나는 진심이다. 이런 행복은 처음 느껴보거든. 그리고 재일아 그레이하운드 타지 말고 비행기를 타지 그랬냐. 으..그 긴 시간을 버스 안에서 ㄷㄷ엉덩이 좀 쑤신다.]
그리고 나의 직설적인 말투에 명석이가 답장을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씨발 존나 웃기네. 도일이가 행복하면 우리다 행복한거다. 다들 파이팅하자.]
그래 다들 행복해야지.
* * *
수동으로 10회 연속 1등에 당첨된 사람이 있다며 연신 인터넷이 떠들썩했다.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심지어 인터넷 기사가 도배 됐고, 포털 사이트 사회면 까지 등장했다.
-로또 10회 연속 당첨자 배출! 도봉구 돼지복권방!
-당첨금 추산 약 180억! 10회 연속 당첨자는 누구?
-로또 1등 10번 당첨된 ‘신의 손’ 등장
-대한민국 최고 명당으로 거듭난 도봉구 돼지 복권방!
-로또 1등 중복 10회. 가능한 일인가?
당첨금을 받기도 전인데 벌써 당첨금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터넷 댓글들도 살폈다.
-paxxx 씨발새끼 존나 부럽다. 누구냐.
-니엄xx 와. 출근하기 싫다 ㅠㅠ 일하면 뭐하냐 로또 한방이면 끝인데
ㄴ ㅇㅇㅇ
ㄴ 어차피 요즘 세상은 인생 한방임
ㄴ 당첨자가 일용직 잡부라는 얘기가 있음
ㄴ ㅋㅋㅋ 인생 완전 폈네.
ㄴ 잡부 아닐 텐데.
대단하다. 부럽다. 씨발. 내일 출근. 등등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크크.
이제 남은 건 당첨금 수령하는 것.
어떻게 해야 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 받아 낼 수가 있을까.
반응들을 보아하니 내 신상을 엄청나게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다음 주 월요일 농협 본사 앞에서 기어이 정체를 밝히고야 말겠다는 댓글까지 본 이상 이걸 쉽게 넘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여튼 궁금한 것도 많아요.
인터넷 검색으로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깨달은 것은 뭐 별거 있나. 그냥 가면 될 일
정체 숨기겠다고 이것저것 변장하고 가면 단번에 10회 중복 당첨자라고 알려질 게 뻔하다.
그냥 맘 편하게 덤덤히 돈만 받아오면 될 일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제 하룻밤만 더 자면 내일 아침에는 로또 당첨금을 지급 받고..출근을 해야겠지.
그런데 출근을 해야 할까.
회사에서 죽어라 버텨가며 월급쟁이의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다.
나는 최부장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이제 최부장과의 관계도 오래 가질 못할 것 같아 아쉬웠다.
진짜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지내왔는데 말이다.
하아.
씨발
그런데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겠다.
때 마침 물류1팀 깨톡방에 누군가 글을 올렸다. 정주임이었다.
정 [내일 저 좀 늦을 것 같아요. 머리가 너무 아픈데요. ㅜㅜ 병원좀 다녀 올게요.]
김 [연차 써라]
정 [정말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ㅜㅜ]
오 [술을 얼마나 먹었길래 ㅉㅉ...]
정 [안 먹었거든요 ^^과장님이 쓰라고 했습니다.]
최 [다들 몸조리 잘하고 내일 보자고. 정주임은 처방전 끊어와. 병가 처리 해줄게.]
정 [와...감사합니다 부장님.]
김 [또 아픈 사람?]
고 [제가....좀....]
김 [부장님 저는 내일 점심즘 출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최 [그려.]
사회는 냉혹한 세계라고 했다. 그런 냉혹한 세계에서 최부장과 내 부하 직원들이 교류를 만들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지금 당장 이걸 관두고 내 회사를 차리거나 회사를 꾸린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사회에서 이러한 관계는 맺지 못할 것 같았다.
회사에서 동료애가 생긴다?
그건 전쟁터에서 적군과 동료애가 생기는 것과 이치가 맞지 않는 굉장히 이상적인 말이 아닐까.
최부장은 말도 안 되는 입사조건으로 나를 재입사 시켰다.
고현준은 간혹 사고를 치지만 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친구다.
내가 된장을 똥이라고 해도 믿을 친구다.
그걸 몰랐으면 나는 그를 진지하게 해고 여부에 대해 고민했을 거다.
오대리도 마찬가지고.
자존심도 쌔고 공사 구분이 명확한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내게 자신의 치부일 수도 있는 속마음을 말했고 내 밑에서 앞으로 잘 배워보고 싶단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나는 이 친구들이 나를 따르고 믿는 것만큼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그게 사실이다.
남들과는 다른 이능이 있다는 것뿐이며 그래서 잃을 게 없는 인간마냥 행동하는 거.
딱 거기까지다.
지금 당장 황부장의 물류1팀에 대한 압박과 박대리의 잔머리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난 아직도 막막하다.
그런 답을 난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술술 풀릴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지금 당장 회사를 나와서 독립을 해서 살아간들 앞으로 정말 많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고 그런 위험 앞에서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로또 당첨금을 수령 받기 위해 농협 본점으로 향했다.
간단했다
신분증 확인하고 싸인하고 투자 상품 소개 받는 거 거절하고 은행 측에서 만들어준 계좌에 돈 입금 받고 끝.
인터넷에서 내 정체를 밝히려는 자들이 그렇게 많았건만 월요일 아침 9시에 농협 본점에 나와서 내 정체를 확인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오지랖 넓은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은행 측 인터뷰 요청도 모조리 거절했다.
이번 1006회차 1등 당첨 금액은 21억이었다. 거기에 33% 세금 공제하면 수동으로 10번 당첨된 내가 받은 금액은 총 141억
내가 지금 당장 상상 속에서 꿈꾸는 일들을 바로 현실화 시켜 버릴 수 있을 만한 금액이었다.
세 잘나가는 곳에 건물을 매입해서 고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고 안정적인 우량주에 투자하여 적당히 먹는다고 해도 억대가 될 수도 있었다.
채권이나 펀드에 무리하게 투자를 해도 전혀 부담이 없다. 또 당첨되면 되니까.
게다가 기업 대주주가 돼서 회사를 내 손아귀에 넣을 수도 있었고 스타트업이나 창업회사에 투자하여 투자회사 CEO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갖은 상상들 속에서 내가 지금 당장 해야 될 일은 돈을 더 불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저 즐기면 될 일.
141억.
하루에 백만 원씩 사십년을 써야 고갈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누군가는 100억이 있으면 200억을 만들고 싶겠지만.
내게 141억은 은퇴를 하고 놀며 먹고 살아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금액이다.
게다가
이제 내 인생에서 로또 1등이 제일 쉽다.
이 회사를 다 장악했을 때다.
휴먼매니저에서 네 번째 메인 퀘스트를 발현 시켰다.
[김도일님의 네 번 째 메인 퀘스트를 발현하겠습니다.]
[인류 재생 프로그램의 네 번째 미션]
[존경의 욕구]
「완료 보상 1000UNI」
「제한 시간 무제한」
그런데 내가 남들한테 존경을 받아봐야 뭐 쓸데가 있나?
그냥 나 혼자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
이런 생각도 든다.
왜 굳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거지.
[정답입니다. 김도일님이 1순위입니다.]
역시 가끔은 휴먼매니저의 메인퀘스트를 좀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직장이라는 한계선을 설정해두고 내가 존경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거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지금 당장 오대리가 나를 존경?
고사원이?
정주임이?
그들이 나를 따르고 좋아하고 의지하는 건 맞지만 존경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게다가 워킹휴먼에 그들만 있나.
황부장 무리들도 있었다.
내가 이걸 쉽게 달성하고자 적의에 가득한 인간들마저 내 편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언제든 물류1팀을 잡아먹기 위해 벼르고 있는 인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