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21/200)

"반깁스 했고요. 전치 3주 나왔습니다. 그리고 거기 현장은 생수통도 다 떨어져서 물도 마실 수가 없었고 쉬는 시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단 현장관리자 사비로 치료비 전액을 내줬다고 해도 하루를 일하든 한 달을 일했든 현장근로자는 공단에 직접 산재 신청을 할 수가 있었다.

"산재 처리하라 그래. 친구가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산재는 직접 공단에서 신청서 작성하고 신청해야 하는 거야."

"아.."

"그것도 여태 몰랐어?"

"..."

어휴. 마빡을 그냥.

이렇다. 매번.

아무리 현장 관리를 철저히 하고 사고를 예방한다고 결국 반복이다.

"그러면 제가 친구한테 직접 산재 처리하라고 얘기하면 될까요?"

"일단 있어봐. 내가 얘기해볼게."

나는 물류2팀으로 향했다. 우리 팀에서 직접 처리를 해준다면 우리 쪽 귀책으로 잡히는 게 싫었다.

2팀 일이기 때문에 2팀에서 처리해야 할 일.

연신 업무를 보고 있던 물류2팀 송팀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송팀장님..들으셨죠?"

"..알다마다요. 저도 방금 현장에서 전화 받았습니다. 물류1팀 고현준 사원 친구라면서요?

"네. 맞습니다. 이거 처리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하.. 돌겠네."

"머리 아픈 일이 많은가 봐요?"

"이번에 또 근계 미작성 신고가 들어와서요. 노동부 가야 될 참입니다..하아.. 현장 관리가 아주 개판 나기 직전입니다."

송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럴 수밖에.

이제 점심시간이 가까워짐에도 사무실에 사원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2팀에는 송팀장님 밖에 없습니까? 다들 어디 갔어요?"

"현장 나간다고 하더니 들어오질 않네요. 매번 아시잖습니까. 제가 사무실 지박령인거."

"참나. 현장에 뭐 꿀이라도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너무들 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김과장님. 조만간 술 한 잔 하시죠. 저도 어제 사무실 복귀해서 먼저 찾아 뵙고 싶었는데, 분위기가 영 시원찮아서.."

"그러시죠."

물류2팀 송팀장은 그나마 내가 업무적으로 말이 통하는 양반이다.

그런데 이게 참 안타까운 구석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팀장인지 사원인지 매번 사무적 업무를 독박하고 있었고, 주위 사원들은 매번 현장 나간다고 돌아오질 않았으니 말이다.

속된말로 먹힌 거겠지.

황부장은 그런 인간이었다. 언제든 제 밑에 있는 인간 찍어 누르는 거 즐겼으니 물류2팀에서 2인자였던 송팀장이 기를 못 필 수밖에.

어쨌든 송팀장은 물류2팀에서 아까운 존재였다.

* * *

현장 산재 예방을 위한 대책을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했다.

고현준 사원을 시켜 인천 현장을 찾아가서 현장 관리자들을 만나 고충과 의견을 듣고 원청의 안전 관리자와 협의체 회의를 통해 일용직 근로자들이 안전하게 포장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특수 장갑과 안전칼도 구매했다.

특히 EPT가 오가는 동선과 보행자 동선이 겹치는 부분도 원청과 협의하여 보행자 동선까지 만들어 냈다.

그리고 돈 많이 들고 인건비 최대 상승의 난제 지게차 신호수의 과제만 남아 있었다.

이 부분은 도급사 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청과 다른 도급사들의 합의가 필요한 부분.

합의라고 해봐야 근로시간과 시급 조율이다..

맘 같으면 워킹휴먼 주머니에서 과감히 써내겠지만 내가 사장이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한 입장이다.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안전욕구의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9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김도일님의 안전이 1순위 입니다!]

최부장과 단 둘이 점심을 먹으러 회사 근처 백반 집으로 향했다.

최부장의 표정은 꽤 석연치 않은 듯했다.

방금 고사원의 일탈로 황부장과 조금 마찰이 있었던 것 같은데 최부장의 입이 쉽게 열리질 않았다.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가 제일 두려웠다.

항상 말 많던 양반이 말을 내뱉지 않는 다는 건 그만큼 머릿속이 복잡하단 뜻이겠지.

먼저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도 최부장은 연신 입에 밥만 넣어댔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부장님 이번에 신호수 배치 건으로 원청과 회의 있을 예정입니다. 경성 쪽하고는 다음 주 예정 됐고 내일당장 쿠몬하고 회의 있을 예정입니다. 부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가야지. 이번에 지게차 사고로 전국 물류센터 비상 걸렸다. 신호수 없는 물류센터는 그 자리에서 일시적 폐쇄 시켜버린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부장님. 이번에 회의 들어갈 때 오대리하고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오대리..? 걔는 왜?"

"오대리도 이제 할 건 해봐야죠. 매번 사무실에서 앉아만 있으면 아시잖습니까."

"흐흠. 영 시원찮아서."

"믿어보세요. 혼자 보낼 것도 아니고 저랑 같이 가는데요. 큰일 생기겠어요?"

"그래. 가봐."

"넵."

그리고 다시 침묵.

내가 궁금했던 건 최부장과 황부장의 독대에서 대체 무슨 말이 오갔냐는 것이었다.

하.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구나.

"부장님 아까 무슨 얘기 하셨어요? 황부장님이랑 나가셨을 때."

"별 얘기 안 했다."

"부장님 표정을 제가 하루 이틀 봅니까. 분명 무슨 일 터진 게 분명하다니까요.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셔야 저희 팀원들이 조치를 하죠. 황부장이 저희 고사원 경위서 쓰랍니까? 그거야 뭐 백 장 천 장이든 쓰죠."

"그게 아니라."

"그런데 왜요. 무슨 일인데요. 현준이 잘리나요? 그 정도 가지고? 에이. 막말로 뭐 예전처럼 횡령을 한 것도 아닌데.."

솔직히 내가 가장 불안했던 건 황부장이 박찬혁이를 다시 데려올 명분을 만들었다는 것.

언제든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인간이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최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였다.

"미안하다."

"아... 박찬혁이 맞죠? 제가 생각하는 거?"

"맞다. 현준이 친구가 현장에서 관리자하고 크게 싸운 것 같더라고. 아마 그걸로 황부장은 명분을 잡았을 거다. 현장관리라는 명분 말이다. 그게 박찬혁이라는건 선을 넘은 행동은 맞지만 걔네들 인사권까지 내가 간섭할 수는 없으니까....일단 현장위주로 돌아다니기로 했으니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을 거다. 김과장 미안하다. 어떻게 할 거냐?"

최부장이 물은 건 내가 저번에 황부장에게 반 협박 식으로 얘기 했던 퇴사였다.

박찬혁이 들어오면 때려 친다고 했었다.

“부장님..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

“제가 황부장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직간접적으로 견제하는 거. 제가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해지고 고약해졌습니다. 황부장이 물류1팀 현장 욕심내고 있는 거 맞죠?”

“...그래.”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현장 하나 먹으면 거기에 떨어지는 성과금이 만만치 않다.

물류1팀 같은 경우는 그런 금액들을 전부 현장사원들의 안전과 복지로 지출했지만 2팀은 지네들 목구멍으로 다 쳐들어간다.

게다가 현준이의 말에 따르면 쉬는 시간 까지 없다고 하던데 현장 사원들을 채찍질해서 얻은 인센과 조기퇴근으로 인한 인건비 절약은 전부 황부장 목구멍과 체해서 넘기지 못하는 건 이리저리 뿌려대겠지.

뭐 현장마다 계약 조건이 다르긴 하지만 황부장은 없던 계약조항도 만들어서 한 푼이라도 벌어드릴 인간이다.

결론은 황부장이 내가 자진해서 퇴사 하길 바라며 박찬혁을 영입 시켰을 거다.

그런 꼴을 눈뜨고는 못 보지.

"제가 때려 치면 부장님 얼굴에 잔뜩 찌든 인상은 누가 펴줍니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고맙다.”

최근 2년간 최부장은 홀로 고사원과 오대리 정주임을 이끌었다.

내가 사고 난 이후 박찬혁이를 어쩔 수 없이 물류1팀 현장 관리자로 선임한 것은 그만큼 최부장이 사내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을 거다.

그리고 내가 들어온 이후부터 기가 살아난 것이고.

황부장이 물류1팀을 먹는다?

물류1팀 현장 관리자들 비롯하여 일용계약직 사원들 전부 관두는 수준으로 노동 강도가 엄청 힘들어 질게 분명하다.

절박하고 한 푼이라도 아쉬운 투잡러 들이나 생계가 절박한 사원들은 어떻게든 참아내고 꾸역꾸역 해나가겠지.

그간 최부장과 내가 쌓아온 일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것이고

씨발

밥이 목구녕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후딱 해치워 버렸다.

지금 당장 골머리를 앓아봐야 뭐 달라질 게 있나.

퇴근이나 하고 싶다.

주 4일에 퇴근은 자유롭게 하는 조건으로 들어왔건만 이놈의 책임감은 매번 나를 괴롭혔다.

그냥 뒤돌아서서 퇴근한다고 얘기하고 집에 갈까도 싶었다.

머릿속을 잠시 비우고 싶었다.

박찬혁이 입사 때문에 내가 때 쓰는 걸로 보이거나 최부장이 나를 나약하게 보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데 그게 중요할까.

내가 너무 강하게만 보이려고 애쓰지 않았나 싶었다.

그냥 한번 즘 좀 나약해 보이고 지쳐 보이는 모습 좀 보여주면 어떠냐.

"퇴근하고 싶습니다."

"내일 보자고."

짧은 고민이 무색하게도 그냥 내일 보면 될 일.

그리고 나는 점심 먹고 퇴근이라는 회사원의 로망을 달성했다.

회사가 아무리 지랄 맞은 사건이 많다고 해도 분명 어딘가에 숨통이 있다.

그게 나는 자유로운 퇴근이고.

로또 당첨번호는 「11」「23」「35」「39」「40」「41」

점심 먹고 퇴근이라는 꿈같은 일을 하고 나니 막상 이 여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할애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책상 앞에 앉았다.

휑한 방안에서 식탁과 더불어 사용했던 책상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 지겨운 적막.

그리고 나는 편의점과 복방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로또 OMR카드를 잔뜩 꺼내어 책상에 깔아놓았다.

담배 한 갑을 살 때마다 거의 한주먹씩 가져왔으니 편의점 알바생이나 복방 사장님에게 핀잔을 들은 적도 있지만

뭐, 내 욕심 내가 차리겠다는데 누가 밀리랴.

곧 며칠 뒤면 토요일이었다.

눈앞에 눈먼 돈을 놓쳐선 안 되지.

5등 로또 번호를 알고 있었고 이번에는 정말 1등을 노려볼 작정으로 경우의 수를 모두 수동으로 써내리라 다짐했다.

네임팬의 뚜껑을 따고 한 점 한 점 찍어 내려가며 내 미래를 상상했다.

이제는 정말 코앞에 닥친 로또 1등이라는 목표를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김도일님의 스트레스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현재 스트레스 지수 70%!]

그런데 왜.

내 스트레스 지수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안전의 메인퀘스트를 깨버리면 당장 로또 1등은 충분히 당첨될 수 있었는데 지금 내가 헛짓거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안전.

참 애매하고 알다가도 모를 단어였다.

[김도일님의 안전이 1순위입니다.]

매번 휴먼매니저는 내가 1순위란다.

내가 아무리 현장의 안전을 위해 뛰어 다녀도 상승률이 대폭 오르지 않았던 건 내가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 월셋방 투룸에 살고 있었고 5등의 당첨 번호도 알 수 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내 안전을 더 올리는 거지.

[안전 욕구란 공포,위협,고통으로부터 안전해지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공포와 위협 고통.

내가 공포를 굉장히 심하게 느꼈을 때는 과거 무서운 영화를 봤을 때도 아니고 놀이기구를 타거나 친구들하고 폐가 탐험을 했던 때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번 싸움으로 집안을 풍비박산 냈을 때.

사채업자들이 찾아와 집안에 있는 재산을 긁어가는 것도 모자라 수학여행 회비마저 뺏어갔을 때

그게 내 인생 최고의 공포였다.

유일하게 서로 의지했던 동생하고 그 공포를 이겨냈다.

그게 지금도 가끔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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