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20/200)

"어휴..병신."

그래.. 15년 지기 친구 부탁 하나 못 들어주겠냐. 거 노래 한번 시원하게 뽑아 줄 수 있다.

그게 어렵겠나.

"나도 부탁이 있다. 내가 노래 할 때 너 울지 마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

"울기는. 씨발."

"그럼 할게. 청접장은 줘야지?"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명석이가 조금 취한 듯 보였고 제수씨 전화를 받고 일찍 귀가해달라는 명령 탓에 명석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혼 전에 이미 살림이고 뭐고 다 차려놓은 상태인 것 같았다.

이제 명석이도 누군가 집에서 기다려주는 처지가 됐구나.

나 홀로 집으로 향하는 길이 적적하기만 했다. 유일한 총각이었던 명석이마저 떠난다.

깨톡방의 친구들 중에 나만 총각이다.

연애를 해야 할까, 아니면 선이라도 봐야 하는 걸까.

그런 다급함이 밀려왔지만 이내 로또라는 보험을 생각하자니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결론이다.

언젠가 친구들 깨톡방을 폭파 시킬 작정으로 플렉스가 뭔지 보여주지.

이제 앞으로 안전과 관련된 퀘스트만 완료한다면 네 자리 수 까지 확인이 가능했으니 1등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수동으로 10번을 쓰든 수십 장을 쓰든 어찌됐든 백억 이상은 받을 수가 있겠지.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큰돈은 만화에서나 보고 뉴스에서나 봤지 실제로 만져보지도 못했던 금액이라 실감도 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이 후기를 보자면 이것저것 자산을 쪼개서 돈을 더 불려내기 위해 투자를 하거나 온전히 내 주머니에 꽁꽁 감추며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단 내가 로또1등에 당첨이 된다면 아파트 한 채 정도는 가볍게 살 수가 있겠지. 그리고 엄마도 그렇고 동생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가 있겠지.

그런데 단순히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한들 나는 일반적으로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과는 맥락이 달랐다.

언제든 로또에 당첨이 될 수도 있었고 필요한 만큼 금액을 벌어들일 수가 있었다.

[쓸쓸하십니까?]

오랜만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휴먼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먼매니저는 김도일님의 삶을 전적으로 매니지먼트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떤 삶을 사시든 휴먼매니저는 김도일님의 선택을 따릅니다.]

휴먼매니저의 뜻대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휴먼매니저는 그저 내 판단과 결정을 매니지먼트 해주는 정도였지 실질적으로 내 인생을 책임지고 길을 터주는 나침반의 역할은 순전히 나의 결정이었다.

휴먼매니저의 후광으로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갔으니 말이다.

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 왠지 쓸쓸했다.

회사에 가면 나를 따라주는 오대리 고사원이 있고 묵묵히 제 할 일하는 정주임이 있었다.

그리고 나만 보면 좋아 죽는 최부장까지.

대기업 수준의 회사는 아니지만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건 그들과 함께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일이었다.

회사에 매진하고 충성하는 그런 일차원적 기분이 아닌 부하직원들과 가꿔나가는 과정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띠리리리

고현준에게 전화가 왔다. 늦은 밤에 왜 갑자기 전화를 하는지 조금 걱정이 됐다.

설마 일을 관두겠다는 건 아니겠지?

나는 걱정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현준아 밤늦게 무슨 일이야. 안 자냐?"

-과장님 제가 지금 현장 나와 있습니다.

"갑자기 현장은 왜.."

-친구가 일당 좀 벌고 싶다고 해서 같이 나왔습니다..흐흐..

"어딘데 어디 현장이야?"

-이천이요. 와..그런데 과장님. 여기 완전 개씹헬인데요? 쉬는 시간도 거의 없고요. 어쨌든 과장님께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과장님!

"이천...? 거기 물류2팀 현장 아니냐..? 거길 가서 일을 한다고..?"

사람이 로또 하는 이유가 일주일은 희망 회로 좀 돌려가며 회사 때려치울 계획 잡는 게 보통이지만..

내 밑에 있는 친구들이 가끔은 저렇게 희한하고 개념 없는 행동들을 하는 거보면 회사 생활이 조금은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 어딘가에 숨통이 있다.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안전욕구의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8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박찬혁이의 재입사 여부를 떠나 지금 당장 당성율을 조금씩 높여놔야만 했다.

현장 산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필수였다. 내가 아무리 현장을 둘러보며 위험요소를 체크한다고 하더라도 전문가들이 보는 눈은 확연히 다르다.

현장 관리자들의 산재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한 현실적 자문을 구했다.

그것을 토대로 산업안전 전문기사들을 영입하여 현재 물류1팀이 관할하는 현장 내부 위험성요소 검사를 했다.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는 아주 간단하다.

대체적으로 업무상 사고, 업무상 질병, 출퇴근 재해로 나뉠 수 있는데 통상적으로 근로자가 자해를 하거나 범죄 행위에 따른 부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산업재해로 구분하여 인정받을 수가 있다.

출퇴근도 마찬가지다.

회사로 출퇴근하는 과정에 차사고가 났다든지,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든지, 퀵보드를 타다 넘어졌든 출근을 하는 과정에서 상해를 입었다면 그것도 산업재해로 구분된다..

혹시라도 회사가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회사가 산재보험에 가입됐다면 공단에서 지급을 해주기 때문이고 보험료 할증이라고 해봐야 최대 20%다.

고사원의 안색이 역시 좋지 않았다. 전날 일당을 벌기 위해 물류2팀이 맡고 있는 이천 현장에서 새벽까지 일했다.

연신 사무실에서 식은땀을 흘려대며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건 둘째 치고 본업에 지장을 줘선 안 되는 일이었다.

급전이 필요해서 일을 한 건 알겠는데...참..

급여 팀에서 만약 고사원이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연 얘기가 나올게 분명하고 이번 일이 황부장이나 다른 물류2팀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분명히 걸고 넘어질 일이었다.

예를 들자면 건설회사 직원이 회사가 맡고 있는 현장에서 일용직 일당을 받고 일한 꼴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일당을 책임지고 정산 하는 급여 팀이 아침부터 내게 찾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최지은

급여 팀에서 경력도 가장 오래됐고 일분일초도 용납하지 않고 딱 제시간에 급여를 보내주는 마스터피스였다.

나는 내심 수많은 일용 근로자들의 급여를 보내주면서 고사원을 지나치길 바랐지만 전산에 다 뜨는 걸 어떻게 그걸 지나칠 수가 있겠나.

"혹시 어제 물류1팀 고현준 사원님 이천 현장에서 일하셨나요..?"

최지은 주임이 내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때마침 그 최주임의 얘기를 듣던 오대리의 표정도 굳어진 상태.

"김과장님 이거 혹시 최부장님 허락 맡으신 건가요? 제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거든요. 어떻게 회사가 맡고 있는 현장에서 일당을 받고 일을 할 수가 있죠?"

"아..."

그제야 고사원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최주임을 향해 말했다.

"친구가 급전이 좀 필요하다고 해서요..그래서 그나마 좀 가까운 시간대가 이천 현장 밖에 없어서.."

"너 정신 나간 거야?"

오대리가 고사원을 향해 말했다. 고사원의 표정이 금시에 굳어져 버렸다.

"너...하..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이걸...참 뭐라고 설명을 해야 될지 모르겠네."

"죄송합니다. 오대리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무리 짧아도 너무 짧은 거 아니냐고, 아예 생각 자체가 없는 행동이잖아."

"..."

오대리의 질책에 고사원은 그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단 상황정리를 위해 정주임에게 말했다.

"이번만 넘어가주면 안 될까?"

"...고현준 사원님 계좌로 일급 결제 들어가면 나중에 문제 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일용 근로계약서 까지 작성하셨던데요.."

단호박 같은 최주임의 거절에 오대리가 힘을 더 했다.

"최주임님 일단 커피 한잔하시죠. 요즘 일이 많으셔서 스트레스가 많으실 텐데.."

"스트레스 없어요. 그러면 일단 황부장님한테 보고하겠습니다. 이천은 물류2팀 관할이죠? 혹시 문제 불거져도 제 책임 없어요."

"네.."

사실 사내 겸업을 금지하는 건 회사마다 내규가 달랐지만 이번 고사원의 행동은 우리 회사 특성상 해고 사유가 될 수 있었다.

과거 도급 직원 중 한명이 현장 출근부에 가족이나 다른 친구의 명단을 허위로 작성하여 일급을 횡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최부장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뭔데? 무슨 일이야?"

최주임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최부장의 인상이 구겨졌다.

휴.

사무실 분위기가 완전히 초상났다.

최부장이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고사원을 노려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말 없는 게 더 무섭다.

"김과장...이거 너무 체계가 무너지는 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부장님,"

"오대리는 고사원 교육을 대체 어떻게 해놓은거야? 김과장이야 입사한지 얼마 안됐다고 쳐도. 넌 2년씩이나 여기 있었잖아?"

"...죄송합니다.."

"막말로 너희들이 이따위로 나오면 나 그냥 관둬. 때려 친다고. 나도 고사원처럼 일당 받고 일했으면 아주 때부자 됐겠지. 그런데 왜 또 그 현장이 하필 물류2팀 현장이냐고!"

최부장과 황부장은 서로 견제구를 던지는 사이인데 이건 최부장이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쯤이면 황부장이 최주임에게 사건을 들었을 테고...

"최부장! 얘기 좀 하지!"

때마침 등장 한 황부장이었다. 최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황부장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침묵

최부장이 나간 사무실은 침묵만이 감돌며 연신 정주임의 키보드 소리만 울려댔다.

그리고 정주임의 질책이 이어졌다.

"어휴 개념 없는 새끼. 넌 왜 그러고 사냐? 엉? 너 때문에 괜히 책잡혔잖아."

"아.."

고사원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책을 해댔다.

"고사원. 너무 걱정하지 말어라. 별일 없을 거다."

"네.."

"그런데 다음번에는 그러지마. 적어도 사내 불문율이라는 게 있어. 그리고 막말로 고사원 네가 그렇게 행동해버리면 나하고 오대리가 욕먹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고사원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몸을 꼼지락 거려댔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였으나 이내 단념하듯 한숨만 푸욱 내쉬었다.

"사실 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또 뭔가 있었다.

"어제 사실 현장에서 큰 사고가 있었어요. 제 친구가 어제 상차를 했는데 걔가 일을 하다가 박스에 아령이 든 줄도 모르고 발바닥을 찧었어요."

"아..그래서 어떻게 됐어?"

"거기 있는 현장 반장이 일단 병원으로 데려가서 치료는 해주긴 했는데.. 제 친구 이번 사고로 며칠 일도 못하는데..휴업수당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습니다.."

"아..."

"거기 반장은 어떻게 처리한다고 한 거야?"

"제가 듣기론 공상처리 해서 치료비 전액 부담해주는 거로 끝내자고 하던데..친구는 그래도 휴업수당은 받을 수 있지 않냐고 하면서 좀 싸웠습니다."

"친구 상태는 어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