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왜 때려치웁니까. 부장님도 이제 편해졌는데요."
"그런가?"
"그죠. 제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최부장에게 충신이듯 말이다.
* * *
워킹휴먼에 재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회식이었다.
오대리 정주임 고사원이 전부 참석했고 오랜만에 직원들끼리 하는 회식인 듯 최부장은 한껏 흥에 취해버렸다.
하긴 최부장은 과거에도 그랬다. 직원들 회식하는 거 싫어하고 일찍 귀가 하고 싶다는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여 내가 있는 동안 회식을 한 기간이 손을 꼽았다.
그래서 매번 나를 붙잡고 술을 마셔댔다.
집안일부터, 회사 일까지, 사회 일면부터 아주 밤새도록 떠들어댔었다.
그게 유일한 낙이란다.
나로서는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저녁을 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식비는 굳혔었다.
삼겹살 불판이 쉼 없이 바뀌었다. 식욕 하나는 아주 뛰어났다.
누가 회식 싫어한다고 한거야? 이런 식이면 저녁 식사를 매일 회식으로 축낼 판이다.
"다들 어때? 김과장 오니까 뭔가 일이 술술 풀리지?"
최부장이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여튼, 저런 식으로 물어보면 당연히 뻔한 대답이 나오겠지.
"좋아요. 저희가 모르는 부분도 잘 알려주시고요."
정성희 주임이 대답했다.
"김과장님의 저의 은인입니다. 앞으로 김과장님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아주 애국가를 외울 기세였다. 하여튼 요즘 고사원은 강성 스킬을 획득하더니 이제 처세까지 배울 참이었다.
"김과장님 정도면 제가 밑에서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대리가 대답했다. 뭐 오대리야 자존심도 쌔고 성질도 있는 친구라 별 기대는 안했는데 저렇게 얘기해주니 나름 기분은 좋았다.
삼연발로 직원들의 입에서 내 칭찬이 나오니 최부장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너희들이 회사를 위해 힘써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매번 불미스런 일 생기면 나서서 해결하려는 것도 고맙고.."
"저희 할 일이죠."
"그런데..내가 요즘 체력적으로 힘들다."
"..."
"우리 김과장 말 잘 들어라. 응? 다들 여기서 얼마나 근무할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러잖나. 좆소 탈출은 지능 순이라고."
"에이..부장님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아냐. 내가 여기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부하직원을 떠나보낸 줄 아냐? 흐흐. 무슨 군대야. 군대도 2년은 채운다."
"요즘은 1년 10개월도 안 됩니다 부장님."
"그러냐? 하여튼... 다들 이 좆소라는 미명 아래에 회사를 개차반으로 알아요.. 그런데 꼭 다른 회사 들어 갈 때는 그래도 나름 경력이라고 워킹휴먼을 쓰더라?"
"에이 저희 여기서 평생 근속할 거예요."
정성희 주임이 해맑게 대답했다. 개뿔
"그래 정주임. 다들 내가 아끼는 거 알지? 우리 회사 사훈이 뭐냐. 들이대. 막 들이대라고. 그래야만 본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거야. 고사원 나한테 형이라고 해봐."
최부장의 꼰대 같은 지시에 고사원이 잠시 한눈을 팔며 내 눈치를 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형님 이제 그만하시죠."
"...흐흠.. 그래..그러니까 관두지 좀 마. 무슨 말인지 알지 다들? 오늘 맘껏 마시고 놀고들 가. 이만 꼰대는 빠질 테니까. 김과장."
"네. 부장님."
"애들 배불리 맥여라."
"넵."
* * *
최부장과 담배를 피우고 택시를 태워서 집에 보내는 시간까지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주임은 이내 내게 할 말이 많은 듯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을 했다.
"과장님..제가 진짜 궁금했거든요...결혼은 하셨어요?"
말 많고 성격 좋고 직원들 분위기 메이커인 것 같은 정주임이 내 얼굴을 보며 해맑게 물었다.
"갑자기...왜?"
"...야 고현준 네가 얘기해."
"사실 정주임님하고 내기 했습니다. 과장님이 결혼을 했을까 안 했을까."
"내가 지금 일하는 거 보면 결혼을 했을 것 같아?"
"아..네...알겠습니다."
정주임은 내 말을 듣고 딱히 더 묻고 싶은 게 없는 듯 맥주만 할짝거리며 마셔댔다.
그런데 그게 진짜인 걸 어쩌랴.
그때 오대리가 말했다.
"과장님 들어오시고 나서부터 회사 직원들 분위기가 조금은 살아 있다고 느낀 건 맞습니다."
"다행이네."
"직원들이 눈치 보거나 긴장한 모습도 조금씩 보이고요. 그런데 과장님.. 제가 건의 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뭐지?"
나는 오대리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번 며칠 전 일산현장의 일을 겪으며 오대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저희 물류1팀이 서울 경기도 권역 중심의 물류센터를 책임지고 있긴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저희 인원들이 책임지는 일용 계약직 사원들만 400명입니다.."
"그렇지.."
"제가 이걸 부장님께 지속적으로 말씀드려보고 싶었으나 사실 제가 이번 일산 계약건 때문에 거의 죄인처럼 있었거든요. 저희보다 관리 관할도 적은 물류2팀이 저희보다 팀원이 많습니다. 이건 좀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최부장님은 별말씀 없고?"
"아시잖습니까. 최부장님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시는 거.."
"음..."
오대리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서울 경기도 인근의 물류센터가 회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꽤 많은 인원을 관리해야만 했다.
물류2팀 같은 경우 지방을 관리한다는 이유로 그 인원이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팀원도 많았다.
이건 오대리가 아주 잘 짚어준 문제였다.
인원이 많다는 것 그만큼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회식자리에서 까지 일 얘기는 하기 싫은 데 말이야 오대리가 얘기를 먼저 꺼내서 나도 얘기하자면... 최근 2년간 우리팀에서 있었던 산업재해 건을 전부 파악할 수 있을까?"
"그건 갑자기 왜...혹시 노동부 감사 나온답니까?"
"아냐. 필요해서. 사소한 거라도 전부 긁어 왔으면 좋겠어. 뭐 일을 하다가 간단히 손가락을 칼에 베였다든지..전부 서류상으로 남아 있겠지?"
"네 전부 있습니다. 그런데..최근 2년간 발생한 저희 산재 지출 내역만 봐도 상당합니다..제가 현장 경험이 많이 없어서 쉽게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음...고사원은 어떻게 생각해? 며칠 전에 남양주 갔다 왔잖아."
"너무 급하게 일하는 게 눈에 보입니다. 마감시간에만 쫓기다 보니까요."
"음..."
"과장님 사실 마감시간을 좀 미룰 수 있냐는 건의가 현장관리자들 입에서 자주 나오곤 했었습니다."
"우리가 마감 시간을 늘리면...알잖아? 택배 기사들이 그만큼 급해지고 배송 시간도 지연되는 거. 그건 다음에 한번 집중 해보고. 우리 이번에 산재 한번 줄여보자고."
어느 회사나 무슨 일이든 업무 마감시간이 존재하지만, 그 촌각을 다투는 마감시간은 간혹 육체노동을 하는 근로자들에게 부상 위험부담이 높아진다.
사무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직 사원들은 업무상 스트레스 및 과로로 인한 뇌심혈관계 질환
육체노동자에게는 근골격계 질환이겠지.
지금 당장 방안을 제시할 수 없었지만, 또 다른 퀘스트와 물류1팀의 목표가 생겼다.
일단 「안전」이란 메인퀘스트의 의미를 면밀히 생각해 본바 직장 내의 안전을 우선순위로 해결해 나갈 참이었다.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안전욕구의 성공률이 대폭 상승하셨습니다!]
[현재 달성률 2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역시. 이건 뭐 시작만 하면 기본 20%는 주는 건가 싶다.
* * *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오랜만에 명석이에게 전화가 왔다.
과거 휴먼매니저의 첫 퀘스트 탓에 명석이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했었다.
"명석아. 오랜만이네."
-저번에는 내가 너무 바빠서 못 만났다. 미안해.
"괜찮아. 다들 바쁜 거 아는데 뭐."
-걱정이 돼서 전화했어.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무 일 없어..그때는 그냥 전화 해봤다. 명석이 너는? 잘 지내고?"
-...잘 지내고 싶다.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바쁘네. 몸은 좀 어때?
"완전 좋지.
-그래. 다행이네. 조만간 술 한 잔 먹자고. 내가 살 테니까
"아무튼. 친구들이랑 연락 좀 하고 지내자. 다들 바쁜 건 알겠는데 생사 확인 정도는 하자고."
-흐흐. 그래. 들어가라.
오랜만에 친구와 길게 통화했다. 이 녀석하고는 20살 때부터 상하차알바도 해보고 인력소개소에서 잡일도 했었다.
자취방에서 살림 차리고 같이 살다시피 한 친구였다.
체력도 좋고 일도 잘해서 항상 작업반장에게 매번 인정받았는데 몸 생각도 안 하고 미친 듯이 일만 했었다.
다치는 경우도 많았는데 매번 밴드 하나 붙이고 끝냈던 쿨한 녀석.
나도 스무 살 초반 때 이삿짐센터에서 일했을 당시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날카로운 유리에 찔려 왼쪽 정강이를 10바늘 정도 꿰맸었다.
그때 당시는 산재라는 말도 몰랐고 그걸 내가 받을 수 있다는 개념 자체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때 그 상처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다.
이걸 제대로 누군가 알려준 사람들만 있었다면 공상처리 해서라도 치료비는 전액 회사에서 지급을 해줬을 것이고 휴업수당까지 받아낼 수 있었겠지.
휴.
심야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어릴적 추억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먹먹함에 젖어 들었다.
명석이란 친구는 항상 내 옆에서 빈둥 거린 친구 였는 데 이제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워졌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
몰랐던 게 너무 많던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 이제 하나씩 뭔가를 알아가고 채워나갈수록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
가족과 사회라는 책임을 등에 짊어지고 있으니까.
책임지는 일이 우선인거지.
결혼을 하고 일에 치이고 집안을 살피고..그 책임을 등에 업고 하루를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이제 친구라는 단어는 가깝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내 주위 유일한 총각인 명석이가 보고 싶고 다른 친구들도 뭐 하고 사나 궁금했다.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술 마시고 놀던 때가 그리웠다. 나는 다시 명석이에게 전화했다.
"명석아."
-뭐야. 또. 갑자기.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말고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삭히지 말고 전화 줘. 언제든 괜찮으니까."
-그래..
"잘살아 보자."
-고맙다. 조만간 꼭 보자고.
어느 자리에 가든 우두머리로 서고 싶은 성질.
"과장님 최근 2년간 발생한 산재 건 전부 요약하여 자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과장님 이름도 있습니다."
현재 물류1팀에서 맡고 있는 물류 현장에서 최근 2년간 발생한 산업재해 건수는 공상 처리한 것을 포함하여 총 48건.
2년간의 산업재해 리스트를 확인하다가 익숙한 이름을 볼 수 있었다.
「김도일」
편의점에 로또를 사다가 차 사고를 당했던 지난 2년.
로또를 구입하려다 사고 난 이력이 있는 사람은 아마 전 세계에서 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찌됐든 나의 그 절박함으로 휴먼매니저의 스킬 중에 아주 독특한 이능이 생겼고 그건 내가 유일하겠지.
최근 2년간 발생된 산재 리스트를 훑었다.
상하차 작업 과정에서 물건이 쓰러져 다치는 경우, 안전화를 신지 않고 일을 하다 파레트에 발을 찧이는 경우와 단순 자상, 그리고 컨베이어벨트에 손가락 끼임 사고도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류1팀 현장뿐만 아니라 뉴스에서는 대형사고까지 다루고 있으니 산재가 너무 많았다.
현장관리자와 안전관리자가 주기적으로 협의체 회의를 실시하고 매일 현장 사원들을 집합시켜 안전 교육을 실시한다.
그리고 실시한 인원의 서명까지 받아 내지만 법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대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좋소에서 아침체조와 같은 느낌이랄까.
어차피 노동부 감사 때만 보여주면 될 서류가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인드..
그리고 매번 안전 교육을 해도 똑같은 사고가 발생한다는 건 현장에 하자가 있다는 뜻이겠지.
"과장님 일단 현재 저희 팀에서 가장 많은 산재가 발생한 현장은 인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