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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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당첨금 받고 그 돈을 온전히 전해주고 싶긴 했지만 당첨 과정을 엄마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매번 엄마하고 동생하고 나하고. 살림도 변변치 않아 남들처럼 어디 가서 외식한번 못해봤다.

기쁜 일이라곤 손을 꼽았다.

그래서 내가 단순히 엄마에게 돈을 전해주는 것보다 당첨 과정을 함께 느껴보고 싶었다.

엄마도 일확천금을 노리기 위해 로또를 수없이 샀겠지. 그래서 매번 좌절하고 또 하루를 살아나아 갔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14살 때 이혼해서 홀로 두 아들을 키워 내셨으니...그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매번 막막했지만 이제 그 빚을 분명히 갚을 수 있었다.

때마침 식탁 앞 TV에는 로또가 곧 시작 될 참이었다.

엄마는 한참을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방 속에 500장의 로또를 꺼내 엄마에게 보여줬다.

"엄마. 내가 말하는 거 잘 들어. 우리 인생. 엄마하고 나하고 동생. 이제 괜찮아 질 거야. 비록 5등이지만. 우리 집안 인생 매번 꼴등이었잖아. 나...이번에 꼭 당첨될 거야. 그러니까 지켜봐 줘."

"....도일아."

"알지 엄마? 할아버지가 내 이름 도일이라고 지어주신 거, 길은 하나라는 뜻이잖아. 나. 진짜 맹세코 엄마 실망시켜주기 싫거든? 그러니까. 믿어."

"..."

"엄마. 곧 있으면 로또 당첨번호 방송 시작할거야. 내가 얘기해주는 세 가지 번호만 기억 해봐. 「3」「15」「30」"

"3.15...30. 그러면 이 번호에 전부 500장을 산거야?"

"어. 엄마."

"휴...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니?"

"딱히..없어."

"너 15살 때 엄마가 집 나간 일...그거 때문에 쓴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런 거 아냐. 참나. 돌겠네."

"우리 제일 힘들었을 때 아냐."

"그러네...생각해보니. 몰랐어. 나도. 이게 무의식적으로 내가 적었나보다."

"그때 나이를 보상받고 싶은 거니?"

"아냐. 정말. 나이저 옛날 일 따위 다 잊었어.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방송이나 보자고."

하긴 15살 당시 엄마는 가출했다.

14살에 이혼을 했고 이모 집에 얹혀살았었는데 동생과 나를 두고 엄마는 어딘가 떠나버렸다.

그렇게 2년간 이모네 집에서 살았고, 3년 뒤에 엄마가 찾아왔었다.

3년간 일을 했단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와 동생의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왜 로또 번호가 그렇게 설정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그때 그 일은 큰 상처였고...엄마에게도 큰 상처였겠지.

하여튼 지난날은 잊자.

"한다! 엄마 로또 시작한다!"

엄마가 TV앞에 앉았다.

엄마가 긴장이 되는 눈으로 TV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도 엄마 옆에 붙어 같이 긴장된 모습 하는 척 하며 연신 불안감을 조성했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밑밥정도?

크크.

때마침 로또 진행 MC가 TV에서 진행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첫째 자리수가 흘러나왔다.

[자! 볼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행운의 숫자! 29번!]

아뿔싸. 첫 번째 숫자는 29번이었다. 29번부터 틀려버리다니. 엄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뒤이어 두 번째 숫자를 확인하기 위한 진행멘트가 나왔다.

[자 두 번째 행운의 숫자를 확인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숫자일까요! 자 3번이 나왔습니다!]

3번이다. 「3」「15」「30」중에 한 가지 번호가 나오자 엄마가 심장을 부여잡으며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뒤이어 세 번째 숫자.

[자 세 번째 번호는 몇 번일까요!? 19번! 입니다!]

크크.

심장 쫄깃한걸. 그런데 이거 당첨되는 거 맞겠지? 나도 이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태 총 세 개의 번호가 나왔는데 맞춘 번호라곤 숫자 3번.

그리고 네 번째 숫자.

[29번 3번 19번에 이어서 네 번째 숫자 확인해보겠습니다 15번! 15번입니다!]

"와!"

엄마가 미약한 탄성을 내지었다. 이제 한번만 더 맞추면 5등..!

엄마가 무심결에 내 손을 꼭 잡았다. 엄마의 눈빛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TV에 투영되는 빛에 반사 된 탓인지 반짝반짝 거렸다.

[자 이제! 두 숫자만 추첨하면 됩니다! 40번입니다! 40번!]

하..참 쫄깃쫄깃하네. 29,「3」,19,「15」,40번이 나왔다.

이제 마지막 남은 숫자가 16번이 아니라면...엄마에게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거고 휴먼매니저는 개뿔 내 인생이 조롱을 당한 꼴이겠지.

뒤이어 진행MC가 마지막 여섯 번째 행운의 번호를 추첨했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행운의 번호! 과연 뭐가 나올까요! 자 축하드립니다! 30번입니다!]

됐다. 29,「3」,19,「15」,40,「30」

5등 당첨이었다.

엄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나를 얼싸안았고 나는 그런 엄마를 꼭 안아줬다.

엄마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5등 당첨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나?

하여튼 엄마는 2등 보너스 번호도 듣질 않고 내 몸을 얼싸안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축제.

이제부터 축제다.

"엄마 내가 뭐라 그랬어! 세상에 1등만 있는 게 아냐! 5등도 있다고 5등!"

그렇게 엄마와 나는 밤새 5등 당첨된 기쁨을 나눴다.

이만한 안전이 있을까.

엄마에게 오백 장의 로또를 뿌려버렸다. 문제는 이 당첨 로또 오백 장을 어떻게 판매점에서 바꾸냐는 것.

"한 번에 바꾸지 말고 엄마. 틈틈이 하루에 조금씩만 바꿔. 남들 오해하지 않게."

"오해는 무슨..그래도 살면서 이런 날도 있나 싶네."

"그러게.."

내게도 오백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순전히 세금도 떼지 않고 가져갈 수 있는 금액은 12,500,000원이다.

이걸 하루아침에 복방에서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틈틈이 가서 바꿔야만 했다.

크크.

조만간 로또 번호 4개까지 알게 되면 그때는 이미 로또 1등이다.

일요일 아침부터 엄마가 밥을 차리려 하자 나는 뜯어말렸다. 오랜만에 외식하기로 했다.

몇 년 만일까. 엄마랑 단둘이 외식을 했던 건 과거 어렸을 때 분식집이 전부였었는데 말이다.

떡볶이와 순대 한 접시에 뜨끈한 어묵국물이 행복이었다.

"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뷔페가 어딘 줄 알아?"

"뷔페..?"

"가자. 내가 사줄게."

사실 나도 내돈내산으로 호텔 뷔페를 가보질 않았다.

간혹 친구들 결혼식장에서나 먹는 뷔페는 먹어 봤지만 고가의 호텔 뷔페를 가본 경우는 일절 없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화장 했고 변변찮은 빽을 들고 나와 함께 호텔 뷔페로 향했다.

나는 엄마가 한 접시에 담기는 그릇을 살폈다. 김밥이나 간장게장 주로 한식이 전부다.

뷔페에서 무슨 김밥을 담지?

"엄마 왜 뷔페에서 김밥을 담아. 참나. 좀 맛있는 것 좀 먹어."

"아이고.. 도일아 이건 김밥이 아니라 롤이라는 거야. 롤. 너 이런 거 안 먹어 봤니?"

"...롤이든 뭐든 맛있는 거 먹으라고. 엄마는 언제 여기 와봤어?"

"그럼,"

"진짜? 누구랑?"

"일하러 왔지. 뷔페에서 일하면 그래도 먹는 건 하나는 잘 챙겨 준다."

"천천히 자셔."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배에서 그만 좀 넣으라고 사정할 때까지 밀어 넣으니 속이 부대껴왔다. 엄마도 마찬가지.

"도일아. 가끔 동생하고 연락도 하면서 지내. 엄마 나중에 가면 형제밖에 없다. 너희들이 가깝게 지내는 거 봐야 엄마가 맘 편하지."

"아직 60밖에 안 됐으면서 벌써 그런 소리를 왜 해. 뭐 남자 형제들이야 원채 그러잖아. 생사 확인 정도로 서로 연락하고 있으니까 걱정마."

그때 엄마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동생한테 연락을 했고, 엄마는 내게 전화기를 건넸다.

"받어라. 지금 통화해.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

"참나..."

사실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 게 맞았다. 동생이랑 어릴 때부터 각별하게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건 맞지만 사실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긴 것은 동생이 지방을 내려가서부터였다.

어떨 때는 설이나 추석 때 간혹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동생은 현재 결혼을 하고 애가 둘이나 있었다. 지방에서 나름 잘 살고 있었고 나름 뿌듯하게 생각했다.

"어. 도현아."

-조만간 엄마 환갑 기념으로 간단히 밥 먹으려고 했는데 형이 먼저 챙겨 드린 거야?

"그치..뭐 그런 것도 있고. 너는 어때. 엄마한테 듣기로는 조선소 들어갔다면서.

-어. 아파트 청약이 당첨됐는데 거제 쪽이라 아예 직장도 옮겨 버렸어. 용접일이라 괜찮아.

"파견 소속이야?"

-그치. 아직은.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2년 채우면 정규직 달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하더라고. 그거 믿고 다니는 중이야.

"그래..열심히 해봐. 잘 될 거야.."

-형은?

"괜찮아. 몸도 완전히 좋아졌고... 동생아."

-응?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제수씨랑 잘 지내고. 항상 생각하는 거 알지?"

-알았어. 말이라도 고맙네. 끊어!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 동생 결혼할 때 내가 해준 게 하나도 없었잖아. 그래서 그래. 미안해서. 그런데 앞으로는 자주 통화도 하고 힘든 일 있으면 서로 얘기도 많이 할게. 의지도 하고."

"어이구! 동생도 다 큰 성인인데 연년생 형한테 뭘 그렇게 바랬겠니?"

"아니. 내가 가장이었잖아. 엄마. 적어도 동생보다 일을 먼저 시작했고 돈을 먼저 벌었으니까. 조금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거지."

"도현이도 형 마음 다 안다. 그러니까 그런 말 말고."

어릴 때부터 가장이란 마음으로 살았다.

그래서 동생한테는 형이라는 마음보다 든든한 기둥이 되고 싶었다.

동생이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악착 같이 일을 했고 돈을 벌었는데 아버지가 남긴 사채 빚은 끝까지 우리 가족을 괴롭혔다.

기둥이 두껍고 든든해야 했는데 난 그러질 못했었다.

그래서 조금 미안했다.

"어휴. 우리 도일이도 얼른 장가가서 도현이처럼 알콩달콩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결혼 얘기는 또 왜 해.."

"주위를 봐.. 도일아. 도일이가 엄마 생각하는 건 잘 알겠는데..여기 뷔페 온 사람들 전부가 커플이잖니?"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남녀노소 커플들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었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나도 연애 좀 제대로 해보고 싶다.

그런데 현실이 안 되는 걸 어떡하랴.

"엄마..난 단 한 번도 우리 집에서 내가 가장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

"나도 어릴 때 사실 누군가한테 항상 의지하고 싶었고 붙잡고 원망도 하고 싶었고 매일 기대고 싶었어."

"도일아."

"그런데 누구한테 기대. 내가 가장인데. 엄마는 내가 결혼해라 마라 그러는데. 사실 가장 되기가 무서워. 그게 너무 무서운 걸 아니까. 여자도 만나기 싫었고 결혼도 하기가 싫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엄마도 잘 안다..."

"엄마가 어제 얘기했지? 15살 때 기억은 하기 싫다고. 나도 죽어도 싫어 그때가. 그런 지랄 맞은 가장을 보고 자란 내가 어떻게 결혼이란 걸 쉽게 할 수 있겠어? 응?"

엄마가 티슈 한 장을 뽑아내 눈물을 훔쳤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정말 살면서 처음으로 엄마랑 뷔페를 와서 행복한 기억만 남기고 싶었는데..

"대신 내가 엄마한테 약속하나 할게. 엄마가 걱정하지 않을 만큼 나 앞으로 엄청나게 잘 살 거고, 엄마도 그 식당일 이제 그만 둘 수 있게끔 돈도 많이 벌 거야. 그러니까 엄마도 엄마 인생 살고 나도 내 인생 살자."

"그래. 알았다. 이제 결혼 얘기는 안할게."

"미안해. 괜히 좋은 곳에 와서..."

"엄마도 미안하다."

"됐다. 엄마. 커피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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