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58)화 (152/159)

158

에필로그

“제프리 님.”

요란한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아래층 지하까지 울렸다.

성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흠이 난 곳이 있는지 살펴보고 다니던 제프리는 우당탕 뛰어 내려오는 하인을 보고 눈을 치떴다.

계단을 다 내려오지도 않고 중간에 선 하인은 숨을 헐떡거렸다.

“왜 이리 호들갑이냐? 전쟁이라도 났어?”

제프리가 인상을 쓰며 묻자 하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칸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제프리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뭐? 지금?”

“예. 벌써 성안으로 들어오셨을 겁니다.”

제프리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던지고 계단을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너는 당장 부인께 알려라.”

하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급히 대답했다.

“예!”

제프리는 마당으로 나가자마자 말에서 내리는 라이칸을 보고 뛰어갔다.

“칸.”

칸은 벤투스의 고삐를 넘겨주며 물었다.

“탑에 문제가 있나? 일꾼들이 다니던데.”

“예?”

놀란 제프리가 당황해서 묻자 칸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제프리는 얼른 다시 말했다.

“문제랄 것까지는 아니고 탑 안에 보수해야 할 것이 있어서……. 이제 곧 본격적인 겨울이니, 그 전에 손볼 곳이 없나 살피는 중이었습니다.”

“그건 지난달에 다 끝낸 것 아니었나?”

라이칸이 탑으로 움직이며 묻자 제프리가 얼른 대답했다.

“예. 다 끝냈으나 남은 것이 좀 있어서…….”

“서둘러 끝내.”

“예. 알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 라이칸이 홀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는 걸 본 제프리는 재빨리 몸을 돌려 뒤에 선 하인을 향해 말했다.

“부인은 어디 계시냐?”

“정원에 계십니다.”

“이 층 방은?”

“수리는 거의 다 끝났으나 정리를 아직 못 했습니다.”

“문은?”

“삐걱거리는 것도 수리를 끝냈습니다.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잠갔고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제프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칸이 그 방에 들어가시진 않겠지만, 어쨌든 불안해. 너는 어서 가서 부인께 칸이 오셨다고 알려라.”

“예.”

하인이 후다닥 뛰어가는 것을 본 제프리는 이 층으로 올라가는 칸의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게 좋겠지? 어때?”

캘리는 보라색 꽃을 한 아름 들고 라일라를 향해 돌아섰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올해는 꽃이 정말 크고 예쁘게 피었습니다.”

“그래?”

“예. 원래는 꽃이 피어봤자 잎이 작았습니다. 그나마도 시들해서 얼마 가지 못했고요. 근데 마님이 신경 써서 가꾸기 시작한 후로 빛의 정원에 있는 꽃들은 정말 싱싱하고 화사합니다. 이제 한겨울에 들어섰는데 아직도 이렇게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랍니다.”

캘리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꽃을 아기방에 놓을 거야. 수리를 해서 냄새가 많이 나니까 꽃향기로 채워야지.”

“예. 좋은 생각이십니다.”

캘리는 꽃의 양을 가늠해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면 될까? 좀 더 꺾을까?”

“오늘은 그 정도로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만 안으로 드셔야 합니다. 요 며칠 너무 움직이셨어요.”

라일라가 둥글게 부푼 배를 응시하며 말하자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말리가 그랬어. 많이 움직이면 아이 낳는 게 수월하다고.”

“예. 그렇긴 하지만 너무 무리하시면 아이가 빨리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저의 사촌 언니도 그랬습니다. 아이가 한 달이나 빨리 나오는 바람에…….”

캘리의 눈이 커졌다.

“죽었어?”

라일라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죽지는 않았지만 약하게 태어나 부모 속을 많이 태웠습니다. 지금도 또래의 아이들보다 작고요.”

캘리는 얼른 꽃 더미를 라일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쉬어야겠어.”

라일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욕을 하는 건 괜찮겠지?”

“그럼요. 목욕을 하시면 심신이 안정되고 피로가 가실 겁니다. 들어가서 바로 목욕하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캘리는 걸으며 물었다.

“근데, 라이칸이 오기 전에 아기방 수리가 다 끝나긴 하겠지?”

“하루 이틀이면 다 끝납니다. 칸께선 나흘 후에 돌아오시니, 그 전에는 다 끝납니다.”

“수리가 너무 오래 걸렸어. 예정대로였으면 사흘 전에 다 끝났어야 했는데. 까딱 잘못했으면 라이칸을 놀래주려고 하던 계획이 틀어질 뻔했어.”

라일라는 뒤를 따르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캘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라일라.”

“예. 마님.”

“라이칸이 우리 아기방을 만든 걸 보면 놀라겠지?”

“예. 아주 놀라고 기뻐하실 겁니다.”

“그의 집무실을 이 층으로 올린 걸 보고 화를 내진 않을까?”

“제 생각에는 더 좋아하실 겁니다. 칸께선 베아투름의 독립을 앞두고 처리할 일이 많아 집무실에 계시는 시간이 많으신데 마님을 혼자 두는 걸 걱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집무실이 침실 옆에 생겼으니 마님을 지척에 둘 수 있다고 좋아하실 겁니다.”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밤에도 내가 자고 있을 때, 일어나서 집무실로 가곤 했다. 근데 돌아와서 내가 깨어 있으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깼어?’

‘그냥.’

‘어디가 불편해?’

‘아뇨. 그냥 깼어요. 당신은 또 일했어요?’

‘음.’

‘할 일이 많아요?’

‘조금.’

침대에 누워 다시 그녀를 안아주던 그가 중얼거렸던 게 선명하다.

‘집무실을 침실로 옮겨야겠어.’

불퉁하게 말하던 걸 듣고 결심했었다.

그가 걱정 없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이 층에도 집무실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라이칸이 빙벽과 동쪽 영지를 살피기 위해 보름 동안 성을 비우는 때를 이용해 집무실을 옮기고 깜짝 놀라게 할 계획.

게다가 아기방도 같이 만들었다. 그건 라이칸과 이미 의논했던 거지만 이렇게 빨리 만든 걸 보면 놀랄 것이다.

그가 그녀가 만들어놓은 방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 기대가 된다.

“마님!”

갑자기 하인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캘리와 라일라는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야?”

라일라가 인상을 쓰며 다시 말했다.

“마님 놀라시면 안 되는 거 몰라?”

하인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캘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님. 근데, 지금…….”

말하다 말고 다시 숨을 몰아쉬는 하인을 향해 라일라가 다시 엄하게 말했다.

“어서 말해. 대체 무슨 일인데?”

숨을 훅, 들이킨 하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칸이 오셨습니다.”

순간, 캘리의 눈이 커졌다.

“제프리!”

홀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제프리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칸을 보고 재빨리 달려갔다.

“예. 칸.”

“내 아내는 어디 있지?”

해가 저물어 가는데, 부인이 방에 없는 것을 본 칸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저, 정원에 계십니다.”

찔리는 게 있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걸 놓칠 칸이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좁히며 쳐다보는 얼굴이 싸늘하다.

“뭐야?”

툭, 내뱉는 짧은 물음에선 힘이 느껴졌다. 이런 칸 앞에서 거짓을 고한다는 건, 심장이 철로 만들어지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프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게…….”

“라이칸.”

구세주가 나타났다. 제프리는 홀을 가로질러 오는 캘리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왔어요? 나흘 후에 온다는 전갈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

캘리는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물었다. 칸의 눈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이 빨리 끝났어.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정원에요. 꽃을 꺾었어요.”

캘리가 보란 듯이 라일라를 가리켰다. 라일라도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팔에 가득 안고 있는 꽃을 들어 보였다.

라이칸은 꽃 무더기를 흘깃, 봤다가 다시 캘리를 보았다. 그 눈빛이 가늘게 좁혀졌다.

“배고프죠? 식사 준비가 다 됐나 모르겠네요. 제프리.”

“예. 부인.”

“요리사에게 가서 식사는 언제쯤 할 수 있는지 물어봐줘요.”

“예. 알겠습니다.”

“라이칸. 당신은 목욕부터 할래요? 씻고 먹는 게 좋겠죠? 라일라. 그 꽃은 정리해야 하니까 응접실에 갖다놔.”

“네. 마님.”

라일라가 돌아서자 제프리도 얼른 나섰다.

“그럼, 전 요리사에게 가보겠습니다.”

라일라와 제프리가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려 움직이는 것이 마치 이곳을 빨리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두 사람은 빠르게 홀에서 사라졌다.

라이칸은 가슴팍 앞으로 팔짱을 끼고 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요? 왜 그렇게 봐요?”

“뭐야?”

“뭐가요?”

“숨기고 있는 거, 뭐냐고.”

뜨끔한 얼굴. 그러면서 이 층을 흘깃거린다. 제프리도 그랬다.

내가 이 층으로 가고 다시 내려왔을 때, 내 표정을 살폈지. 그 말은, 이 층에 뭔가 있다는 것이다.

“숨기다뇨. 뭘 숨겨요? 그런 거 없는…….”

캘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이칸은 홱,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캘리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어디 가요?”

라이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본 라이칸은 그저 좀 더 느리게 움직였을 뿐이다. 아내가 서둘러 계단을 따라 오르려다가 넘어지면 안 되니까.

자, 그럼. 나의 부인께서 뭘 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셨는지 볼까?

그동안 이것저것, 아내가 한 일이 많았다. 다시 베아투름으로 돌아온 그녀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에게 말도 하지 않고 검술을 계속 익힌다든지, 그가 없는 틈에 마을을 돌아본다든지, 요리를 배운다, 약초를 키운다…….

지난 몇 달간 그녀를 걱정하며 지낸 시간을 떠올리자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사라도 캘리를 낳을 때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저희 가문의 여자들은 아이를 낳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그랬고, 가문 대대로 대체로 산통이 꽤 길고 힘겨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산달이 되기 전에 잘못되는 경우도 많았고, 아이를 낳다가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펠리키를 떠나오기 전, 다미아가 해준 말은 라이칸을 초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과민하십니다.’

말리는, 부인은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거라며 누누이 말했지만 라이칸은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망아지 같은 내 아내는 남편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아랑곳없이 온갖 곳을 쏘다니고 일을 벌였다.

결국, 산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본격적인 겨울에 앞서 영지를 돌아보는 일도 기사들을 다그쳐 빠르게 끝내고 돌아온 것도 그녀가 걱정돼서였고. 그런데, 와서 보니, 또 뭔가 일을 저지른 듯하다.

이번에는 화를 낼 것이다. 더 이상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아양을 떨고 귀엽게 눈을 깜박이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어도, 절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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