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56)화 (150/159)

156

방으로 들어온 라이칸은 곧바로 말리를 향해 물었다.

“뭐지? 병이 난 건가?”

험악한 얼굴을 본 말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리.”

캘리가 얼른 부르자 말리가 쳐다보더니 이내 웃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나갈 테니 공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세요.”

라이칸이 인상을 썼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리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방을 나가면서 문이 닫혔다. 잠시 기사들이 지르는 고함 소리와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가득 울렸다.

라이칸이 문 쪽을 보더니 이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굳었던 그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더니 이내 기쁨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혹시…….”

그가 말을 잇지 못하자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 아이를 가졌대요.”

라이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멍하게 얼이 빠진 얼굴을 보고 캘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지금, 당신 얼굴을 와이엇이 봤으면 10년은 놀려 먹을 거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침대에 무릎을 대더니 그녀를 와락 당겨 안았다. 품에 꼭 안고 아무 말이 없었다.

“라이칸?”

“…….”

“설마 우는 건 아니죠?”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난 태어날 때 이후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어.”

험악하게 말하지만 눈이 붉었다. 캘리는 곱게 눈을 흘기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도 기뻐요. 너무너무.”

속삭이는 그녀를 그가 힘주어 안았다.

***

시타는 마당 끝에 모여 서 있는 와이엇과 기사들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마당 한가운데에 마주 보고 서 있는 칸과 부인이 보였다. 그런데, 표정들이 꽤 심각하다.

“어, 시타. 이제 오냐? 사이탄의 숲은 어때?”

옆으로 다가가자 와이엇이 묻는다.

“결계는 다 정리되었고, 안에 갇혀 있던 죄인들은 모두 이곳으로 압송해 왔습니다. 아마 죄의 여부를 재판결받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와이엇이 다시 쳐다본다.

“탈리아 왕비는?”

“소이난 성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왔습니다.”

“거긴 어때? 아직도 그렇게 폐성인가?”

“왕비가 들어가 살 곳이라 미리 정리를 해서 폐성은 아닙니다. 왕궁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왕을 독살하려 했던 죄인이니 어쩔 수 없지. 처형당하지 않은 것만도 천운이야.”

“천운이 아니라 칸과 부인의 아량이 깊은 탓이지.”

오웬이 끼어들었다. 와이엇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에서 부인의 공이 컸지. 그 덕분에 부인의 청이 먹힌 거야.”

“그보다는 폐하로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던 거야. 왕세자의 모후를 처형한다는 것은 후일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이 아닐 테니까.”

“왕세자가 처형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말했다던데.”

“그거야 다음 대 왕이 될 자로서 디콘스의 법을 따르자는 거였지. 진심으로 어머니를 죽이자고 했겠어?”

“그렇긴 하지. 어쨌든, 좋게 풀린 것 같아. 왕세자가 왕이 돼서 탈리아 왕비를 다시 불러들이든 말든, 그거야 그때 가서 하겠지.”

“그것도 모르는 일이야. 의회에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하물며, 리오나르 가문에서도 탈리아 왕비를 제명하자는 소리가 있던데…… 돌아오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사람도 오가지 않는 버려진 성에서 홀로 외로이 여생을 끝내겠군.”

“그렇겠지.”

기사들이 씁쓸한 표정을 짓던 그때였다.

“안 돼!”

라이칸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와이엇과 오웬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시타도 칸과 부인을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궁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접한 것은 공작부인의 회임 소식이었다. 칸이 누구보다 기뻐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이틀 전 베아투름으로 출발했어야 할 일정도 무한 연기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부인을 걱정해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 두 사람은 서로를 한껏 노려보고 있다니,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시타가 묻자 와이엇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궁이 아니라 저 두 사람의 의견 차이에 문제가 생긴 거지.”

“의견 차이요?”

“그래. 두 사람 말이 다 일리가 있어서 우리도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그게 뭡니까?”

와이엇이 손을 슬쩍 들어서 라이칸을 가리켰다.

“칸은 여기서 아이를 낳자고 해.”

시타의 눈이 커졌다.

“펠리키에서 말입니까?”

“그래.”

“그럼 여러 달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지.”

그때쯤이면 본격적으로 겨울에 접어들어 자칫하면 해를 넘겨서 이듬해 봄에나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출산한 부인이나 태어난 아이가 바로 여행하기에도 힘들 것이니 그보다 더 오래 머물 수도 있다.

시타가 눈살을 찌푸리자 와이엇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도 처음엔 칸의 의견에 반대했어. 근데 칸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알잖아. 지난해 겨울이 시작될 때, 부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거.”

아.

시타는 그제야 그때 일을 기억해 냈다. 자신은 거기 있지 않았지만 그 일은 베아투름의 불행이었다.

한 번 아이를 잃어봤으니, 칸은 걱정하고 조심하려는 것이다.

“그럼 부인은……?”

저 두 사람이 저렇게 대치하고 있는 걸 보면, 부인은 다른 의견이라는 것이다.

와이엇이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부인은 당장 출발해야 한다는 거야.”

“어째서요? 부인도 지난해의 일을 겪어서 조심해야 하는 걸 알 텐데.”

“알지. 그런데, 공작부인은 반드시 베아투름에서 아이를 낳겠다는 거야.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베아투름의 독립이 늦어지고 해를 넘기게 되는 이유도 있지. 하지만 그보다는 태어날 아이는 베아투름의 적통 왕자나 공주가 될 테니 다른 곳에서 태어나선 안 된다는 의견이야.”

아.

시타는 또 한 번 완벽히 이해했다.

시타의 눈길이 칸과 공작부인에게 향했다.

“어렵네요.”

“어렵지.”

와이엇이 동조하자 오웬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린다.

“난 왠지 조만간 우리가 출발할 것 같네.”

와이엇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칸이 회임한 부인을 험난한 여행길에 데려갈 거라는 건가?”

“부인의 얼굴을 봐. 난 겨울 동안 부인의 저런 눈빛을 몇 번 봤지. 부인이 저런 표정일 때, 칸은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

오웬의 말에 와이엇과 시타가 동시에 공작부인을 보았다.

과연, 오웬의 말이 맞았다. 하늘색 눈동자에서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도 부인께 걸겠습니다.”

와이엇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니들 뭐냐? 대륙의 전사, 라이칸 워렌 공작을 뭘로 보고. 검은 늑대가 여자 하나를 못 이길까 봐?”

“내기하자.”

오웬이 느긋하게 말하자 와이엇이 인상을 썼다.

“무슨 내기?”

“지는 쪽이 이기는 쪽에게 한 달 동안 에일을 사기로. 한 달의 시작은 이기는 쪽 맘대로고, 때와 장소를 정하는 것도 이기는 쪽이 원하는 대로. 어때?”

시타와 오웬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보자 와이엇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 하자고. 난 지옥의 사자를 믿는다!”

***

“안 돼.”

라이칸은 마당을 벗어나 탑으로 들어갔다. 캘리가 따라오느라 무리하지 않도록 보폭을 최대한 좁혀서 걸었지만 그녀가 빠르게 걷는 걸 보고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다시 조른다.

“그렇게 해요. 라이칸. 난 정말 괜찮다고요.”

속에서 불이 끓는다. 웬만하면 참아주고 달래면서 넘어가려 했는데.

“너는 대체!”

버럭, 큰소리가 튀어나왔다. 라이칸은 질끈 눈을 감으며 호흡을 다스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느 정도 화를 누른 후였다.

“안 된다고 했어. 이 일에 대해선 절대 번복하지 않을 거야. 네가 아무리 졸라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말리한테 들었잖아요.”

그녀도 지지 않겠다는 듯 턱을 치켜올렸다. 평소엔 맑은 하늘색 눈동자가 고집을 부릴 땐 짙은 남색을 띤다. 머리카락에도 청색 줄무늬가 생기면서 사이사이에 호박색이 섞여 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색이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고집.

절대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활활 태울 때, 저런 머리색이 나타나는 것이다.

라이칸은 팔을 가슴팍 앞으로 교차시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물었다.

“뭘?”

“말리는 내 치료사예요.”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말리에게 아침저녁으로 날 살펴보라고 했죠?”

“그랬어.”

“말리가 말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지금 얼마나 건강한지.”

“지금은 그렇지.”

“난 지금 구역질도 별로 없어요. 어지럽지도 않아요.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안정적이랬어요. 이 모든 말을 다 들었잖아요.”

“지금 그렇다고 해서 험난한 여행을 무리 없이 견딜 거라는 보장은 없지.”

태연한 대꾸에 캘리는 인상을 썼다.

“그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리는 그때 그런 일이 생긴 건, 아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이었기 때문이래요. 아이가 생기면 자리를 제대로 잡을 시간이 필요한데 그때가 가장 위험하대요. 하지만 지금 난 그 위험한 때가 지났고 아이는 제대로 자리를 잡아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고요.”

“난 그 일로 모험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왜 그러겠어요?”

“내가 묻고 싶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안전하게 여기서 아이를 낳고 베아투름으로 돌아가면 돼.”

“너무 늦잖아요. 나쁜 마법사들을 다 퇴치했다곤 하지만 아직 잔당들이 남아서 뒤를 쫓고 있잖아요. 펠리키에 놈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보장도 없어요. 그놈들이 나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있는데 감히 어떤 놈이 너를 노려?”

당당한 라이칸의 말은 아랑곳없이 캘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여기가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왕세자가 베아투름의 독립을 승인하긴 했지만 의회에는 아직 반대세력이 있어요. 그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기사들은 무슨 죄예요? 그들은 나 하나 때문에 1년 동안 가족을 못 본다고요.”

“그들은 불만 없을 거야.”

마치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툭, 내뱉었다.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한 나라의 왕이 될 라이칸 워렌의 핏줄이에요.”

그녀가 근엄한 태도로 선언하듯 말하자 돌처럼 굳어 있던 라이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캘리는 다시 허리를 세우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이는 버텨 낼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검은 늑대의 아이니까.”

캘리는 자신의 배에 손을 올리고 냉엄하게 말했다.

“난 믿어요. 우린 기필코 해낼 거예요.”

그의 눈빛이 일그러진다. 그녀는 턱을 치켜올리고 눈을 반짝이며 맹세했다.

“이 아인 반드시 베아투름에서 태어나야 해요.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

“공주님. 다미아와 앤이 도착했습니다.”

셀리나가 말하자 캘리는 돌아섰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다미아와 앤이 무릎을 굽히며 절을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처음 만나는 건데, 그 전의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캘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억울하게 마녀로 몰려 죽은 네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번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 돼.’

마녀로 몰려 핍박받는 백성들의 희망이라며 몰아세우던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다.

“공주님. 떠나시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캘리는 다미아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웃는 미소에서 내 얼굴이 보인다. 어쩌면 우리, 닮았나 보다. 그래, 닮은 구석이 있겠지. 나를 낳아준 어머니의 동생이니까.

한 번도 다미아를 핏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했다. 다른 사람에겐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으면서 유독 다미아에겐 차갑게 굴고 미운 말을 쉽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미아가 나를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랬던 것 같다.

핏줄이라서.

나를 보는 다미아의 눈빛에는 사랑이 있었다.

“펠리키에 남을 건가요?”

캘리가 부드럽게 묻자 다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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