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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칸이 당부하신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이 무사하셔야 칸이 전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그래서 이렇게 궁 안에 얌전히 있잖아. 어차피 폐하의 회복을 돕기도 해야 하고.”
“폐하의 옆에 공주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지금처럼 믿을 만한 자가 없는 상황에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분이 옆에 계신 것이 천행이지요.”
“말리가 있었다면 더 도움이 됐을 거야.”
“공주님께서 전장에서 나오는 부상자들을 지원하라고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게 옳은 방법이니까. 말리는 약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상처를 치료하는 재능도 탁월해. 그러니 후방을 든든히 지켜줘야 하는 게 맞아.”
“예.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폐하께 드릴 약초는 제가 말리에게 가서 받아 오면 되는 것이고요.”
“조심해. 마법사들의 잔당이 아직 도시 곳곳에 숨어 있을 거야.”
“예. 공주님도 조심하십시오. 궁 안이라도 위험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꼭 근위대를 대동하시고요.”
“알았어. 너는 어서 가서 말리에게 약초를 받아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해.”
“예. 공주님.”
셀리나를 보내고 캘리는 방 안의 창을 모두 닫았다. 해가 높이 떠 있었지만 방은 어두워졌다. 등잔에 불을 붙이고 의자에 앉은 그녀는 바느질감을 들어 올렸다.
기사들이 갑옷 안에 입을 옷을 만드는 일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리안 수녀님이 그렇게 쫓아다니며 바느질을 가르쳐 줬던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
“칸!”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온 오웬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모여 있던 기사들이 쳐다보자 오웬이 어두운 얼굴로 즉시 보고를 시작한다.
“조금 전,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마물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마법사들이 전부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마물들을 조종하는 마법사들을 처단하면 이 전투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놈들이 숨어 있는 근거지를 찾는 일에 그토록 힘을 쏟았는데…….
분명, 이쪽이 우세했다. 선두에서 달려드는 짐승들은 전투가 시작되자 얼마 후 힘을 잃기 시작했고, 끝도 없이 밀려오는 마물들도 희미하게나마 수가 줄고 있었다. 그건 마법사들의 힘이 줄고 있다는 것과 같았다.
광야와 산, 계곡에 숨어 있는 마법사들을 하나씩 퇴치한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라이칸은 천막을 찢을 뜻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빗줄기가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폭우에 마물들이 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검에 베여도 일어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덤벼들었다. 그 정신 나간 힘을 버텨낼 수 없어서 우리 쪽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합니다.”
와이엇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놈들이 밀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오우거도 힘이 빠지고 고블린도 발광이 줄었는데, 어떻게 놈들이 다시 팔팔해진 거죠? 고통도 못 느끼는 것처럼 아주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마법사들 짓입니다. 놈들이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곧바로 비탄의 숲으로 달려가서 숨어버린 겁니다.”
수석 기사 하나가 말하자 와이엇이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그 기회가 어디서 갑자기 그렇게 툭, 튀어나왔냐고. 우린 놈들이 비탄의 숲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진을 치고 있었는데. 지난 며칠 동안 한 게 그 짓이잖아. 우리가 이기고 있었다고, 근데 뭘 어떻게 했기에 갑자기 상황이 변하냔 말이지.”
와이엇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였다.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갑자기 천막 입구가 들리더니 붉은 머리칼의 여자와 난쟁이 여자가 들어왔다.
“다미아.”
오웬이 중얼거리자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와이엇도 인상을 썼다.
“뭐요? 마녀들의 수장이 어찌 진영에 들어왔지?”
“저는 공주님의 명을 받고 카루아 협곡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라이칸의 미간이 모아졌다.
“캘리가?”
다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제 예지력으로 레트토 백작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백작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불입니다.”
라이칸의 눈이 번뜩였다. 다미아는 다시 말했다.
“백작은 흑마법을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불이라고 했습니다.”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군대는 이미 비탄의 숲 뒤쪽으로 후퇴했고 전열은 다시 갖추어졌다. 이제 제2의 전략으로 넘어가야 했다. 비탄의 숲에 이미 마법사들이 들어갔으니 놈들이 절대 밖으로 나와 성벽을 무너트리지 못하도록.
그런데, 그 전략은 성공할 확률이 없었다. 비탄의 숲에 숨어 있는 마법사들을 치지 않는 이상 마물과 짐승들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이고 성벽이 뚫릴 확률이 크다.
도시로 놈들이 몰려들면 백성들이 위험해진다.
라이칸의 굳은 얼굴을 보며 다미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전, 레트토 백작이 어둠의 마법사들을 몰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불이었다고 합니다. 흑마법은 밤의 기운을 모아서 일으키는 마법입니다. 밤은 어둡고 습하죠. 그래서 흑마법은 물에 강합니다. 반면, 물과 반대되는 불에는 약하죠.”
“설마, 그래서 그런가? 오늘 비가 왔잖아. 비가 쏟아지니까 마물들이 광폭해졌어.”
와이엇이 눈을 크게 뜨며 말하자 다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비를 몰고 온 것이 마법사들입니다. 전세가 기울자 놈들이 흑마법에 힘을 쏟으려고 비구름을 몰고 온 것이죠.”
“하.”
다미아는 다시 칸을 보았다.
“오래전, 마법사, 코르키가 왕비와 결탁해 사라를 마녀로 몰았습니다. 왕비는 그럴 이유가 있었지만 코르키가 하필이면 왜 사라를 마녀로 몰았을까, 오랫동안 의문이었습니다. 때를 맞추어 도시에 불이 나고, 코르키는 불을 사용하는 이들을 전부 마녀로 몰았지요.”
라이칸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대의 말은, 마법사가 마녀들을 몰아낸 것이 흑마법이 불에 약하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라가 불을 다룰 수 있고, 도시에 불이 나고, 마법사들이 불을 다루는 이들을 마녀로 몰아 도시에서 없애 버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코르키는 그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후에 일을 도모하기 위해 불에 강한 자들을 우선 마녀로 몰아 해치운 것입니다. 그래야 놈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수월할 테니까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미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코르키는 디콘스의 왕좌를 노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미 예상했던 것.
이렇듯 확실해지자 말문이 막힐 정도로 분노가 일었다.
라이칸은 실소했다.
감히 왕좌를 노려 그토록 오랫동안 계획을 해왔는데, 그 누구도 코르키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왕비의 질투심, 왕세자의 야망을 이용해 코르키는 이 모든 것을 실행해 왔던 것이다.
왕은 안에서 썩는 물을 보지 못하고 외부의 영토 확장과 힘을 과시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귀족이라는 자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코르키의 수작에 놀아나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일에만 열중했지.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었다. 결국, 코르키는 승기를 잡았고, 이대로라면 왕궁도 안전할 수 없다.
“물은 불을 이기지.”
라이칸이 중얼거리자 다이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흑마법에 쓰이는 물이 평범한 물이 아니듯, 그 물에 대항하는 것도 평범한 불이 되어선 안 됩니다.”
다미아를 보는 라이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마녀를 이용하자는 거군.”
“엄격히 말해 불을 다루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마법사들이죠. 그저 불을 다룬다 하여 마녀로 몰린 것일 뿐. 흑마법에 맞서려면 불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몇 없지만, 그들은 비탄의 숲에도 불을 지를 수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사이탄의 숲에 갇혀 있는 그들을 빼내 오겠습니다.”
라이칸은 잠시 생각하다가 와이엇을 보았다.
“다미아를 데려가서 왕세자 전하께 이 모든 사실을 고해.”
“예. 칸.”
라이칸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웬.”
“예. 칸.”
“지금 당장 궁으로 달려가서 공주를 데려와.”
와이엇과 오웬의 얼굴은 굳어짐과 동시에 걱정으로 얼룩졌다. 다미아는 칸의 결정을 예상했던 것처럼 평온했지만 눈빛이 어두웠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흑마법에 대항할 큰불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임을.
캘리를 전장으로 불러내야 하는 라이칸의 눈은 서늘한 한기가 어렸다.
***
쿵쿵쿵.
오랫동안 바느질을 해서 침침해진 눈을 잠시 감고 있던 캘리는 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황급히 문으로 다가가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캘리는 문 앞에 서서 물었다.
“누구냐?”
“폐하의 시녀, 코리네입니다.”
순간, 캘리는 활짝 문을 열어젖혔다. 시녀가 서 있고 양옆에 근위대 기사 둘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폐하의 기침이 점점 심해지십니다.”
놀란 캘리는 황급히 물었다.
“언제부터?”
“낮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공주님을 모셔오려는 것을 폐하께서 만류하셨는데, 방금 전엔 피를 토하셨습니다.”
피?
캘리는 놀라서 말했다.
“기다려라.”
몸을 돌린 캘리는 얼른 뛰어가 약재가 든 바구니와 숄을 가지고 방을 나왔다.
“가자.”
얼마 전에 셀리나가 말리에게서 받아온 약재가 있었다. 왕이 기침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기침이 심해지면 피를 토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 약을 써야 한다며 미리 준비해 준 거였다.
캘리는 앞서가는 시녀를 향해 말했다.
“서둘러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다급하게 걷느라 복도 곳곳에 보이던 근위병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몰랐다. 탑을 나와 뜰을 가로질러 가던 캘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걸음을 늦췄다.
너무 조용하다. 횃불조차 그 수가 줄고 있었다.
“멈춰라.”
캘리가 말하자 시녀가 걸음을 멈췄다.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 거지? 그리고 이 길은 폐하가 계신 탑으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시녀의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눈빛이 탁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넋을 잃은 듯했다.
뭔가 잘못됐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 뒤따라오던 근위 기사들이 다가왔다. 놈들의 눈빛도 비정상적이다.
흑마법.
마법사들이 이들을 조종하고 있다!
캘리는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빼 들었다.
젠장. 늦었다.
기사들이 와락 달려들어 그녀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고 한 놈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막은 천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의식이 흐려진다.
안 돼…….
그를 위해 나를 지키려 했는데…….
라이칸.
눈앞의 세상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암흑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