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37)화 (131/159)

137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연히 완벽한 방어벽이죠. 어떤 미친놈이 거길 통과해서 궁을 공격하려 하겠습니까? 들어갔다가는 그냥 다 죽을 텐데.”

“평범한 자들은 여길 통과하지 못하지만…… 비범한 능력이 있는 자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예?”

“가령, 짐승들도 임의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자들이라면…….”

순간, 와이엇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마법사 말씀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와이엇이 양피지에 그려져 있는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오웬이 들어왔다. 곧장 탁자 앞으로 온 오웬을 향해 와이엇이 인상을 썼다.

“어딜 그렇게 빨빨거리고 다녀? 칸이 부른 지가 언젠데.”

오웬은 라이칸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긴히 보고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뭔 보고?”

와이엇이 묻자 오웬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공주님 방으로 치료사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순간, 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와이엇의 눈도 커졌다. 오웬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연회에서 돌아온 후로 말도 없고, 음식도 먹지 않고, 침대에 내내 누워 있기만 하신다더니, 결국 탈이 난 것 같습니다.”

라이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버린다.

와이엇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아이고, 연회에서 뭔 일이 있었기에……. 하긴, 일이 없어도 힘들겠지. 혼자 얼마나 외롭겠어.”

정적이 흘렀다. 와이엇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쉴라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리도 없고. 단검 다루고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사람이라도, 아직 어리고 여린 여자잖아. 자기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바닥 인생에서 공작부인 됐다가 공주 됐다가…… 하, 뭔 인생이 이렇게 굴곡진지. 나 같아도 정신이 하나도 없겠다. 거기다가 믿고 의지하던 남자도 냉하고…….”

오웬이 옆구리를 툭, 치자 와이엇이 인상을 썼다.

“왜? 뭐?”

오웬이 와이엇의 팔을 잡으며 돌려세웠다.

“가자. 우린 저녁이나 먹으러 가세. 오늘 요리는 구운 오리라더군.”

“뭐? 오리? 삶은 게 아니라 구웠어?”

“그래. 왕궁 요리사가 개발한 거라더군. 진흙을 발라서 불에 구우면 냄새도 없고 참으로 고소하다고…….”

“오웬.”

갑자기 날아온 목소리에 오웬이 얼른 대답했다.

“예, 칸.”

“캘리가 뭘 하는지 세세히 살피라고 해.”

“이미 살피고 있는데…….”

“일거수일투족, 절대 눈을 떼지 말라고 해.”

차갑게 명령을 내리는 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

“왕궁은 참 신기해.”

캘리가 느리게 걸으며 중얼거리자 셀리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어떤 점이 특히 그렇습니까?”

“벽의 조각들도 신기하고…… 여긴 벽들이 온통 돌이야. 오스피아나 베아투름에선 나무를 덧대는데, 여기선 돌을 덧댄 것 같아.”

“예. 그냥 돌이 아니라 대리석이라고 합니다. 나무나 석고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자재지요.”

“냉기도 더 잘 막아주나?”

“예. 그렇다고 합니다.”

캘리는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가득 메운 벽화는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굉장해.”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셀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의 천장은 시대를 풍미하는 화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벽화를 그립니다. 건물 안에 들어오면 천장이 곧 하늘이니, 화려하고 아름다울수록 궁전의 권위가 높아지는 거지요.”

눈을 좁혀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여신이 보이고, 사자와 늑대가 마차를 끌고, 그 마차 위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전사가 보였다.

거대한 작품이라고 할 만했다.

“공주님. 귀족 부인들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늦으면 결례가 될 수 있습니다.”

셀리나의 말에 캘리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걸음이 느려졌다. 급기야 멈춰 버린다.

라이칸.

저쪽에서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성큼성큼 내딛는 남자의 발걸음만큼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기가 솟았다.

우리 결혼이 무효라고 인정했다고?

그게 진심이 아닌 걸 알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캘리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억지로 내디뎠다.

길고 길어서 절대 좁혀질 것 같지 않던 거리가 가까워지자 라이칸의 굳은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소 한 자락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예의상의 목례가 전부였다. 은밀한 눈빛도, 아주 작은 미소의 흔적도 없는.

그녀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슬쩍 까닥여주고 그를 지나쳤다. 고개를 들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걸었다.

두고 봐요. 당신이 뭐라고 하건, 나도 내 식으로 방법을 찾아낼 거니까.

참, 독하다, 독해.

와이엇은 앞에서 걸어가는 칸의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이 모든 행동에 뜻이 있겠지만, 그 뜻을 이해할 것도 같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무정할 필요가 있나?

친구 하나 없이 냉엄한 궁전에서 홀로 견디고 있는 여인이 불쌍하지도 않나?

‘얼굴은 까칠해 가지고, 어찌나 센 척을 하는지.’

와이엇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칸이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 연병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걸 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하니,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다.

그만큼 본인도 괴롭다는 건데, 그 원인 제공자인 부인 앞에선 어째 저렇게 냉정한 얼굴인지.

저렇게 무정한 남자니, 그의 여자는 어떤 심정이겠는가.

“나 같으면 확 구두 거꾸로 신어버린다.”

우뚝, 라이칸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와이엇은 뜨끔했다.

아뿔싸. 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게 말로 나와 버렸네.

“아니, 저기…… 요즘 유행하는 구두가 앞뒤가 같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칸이 인상을 썼다.

“그냥 그렇다고요.”

시선을 돌리며 얼버무리는데 라이칸이 완전히 몸을 돌려 묻는다.

“스왈트 왕자에 대해선 알아봤나?”

와이엇도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예. 코스마 왕국의 셋째 왕자인데, 첫째 왕자는 오래전에 오스피아와 전쟁할 때 죽었고, 둘째 왕자는 병으로 죽어서 지금은 왕좌를 이어받을 왕세자입니다. 남아 있는 유일한 왕자이기도 하고요.”

라이칸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와이엇이 따라 걸으며 보고를 이었다.

“성격이 온화하고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겼습니다. 요즘 여자들 사이에서 그런 남자가 먹힌답니다.”

라이칸이 인상을 쓰자 와이엇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보기에도 이상합니다. 그런 계집애 같은 사내가 어디가 좋다는 건지. 남자란 뭐니 뭐니 해도 힘깨나 쓰게 생겨야죠. 햇볕 아래에서 웃통 까고 단단한 피부를 그을려 줘야 제대로 된 남자라 할 수 있죠. 허여멀겋게 생겨서 음악 듣고 시나 읊고 정치나 논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라고…….”

말이 옆으로 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와이엇을 얼른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그래도 머리는 좋아서 전술 전략을 구성하는 지략은 괜찮답니다. 생긴 것도 잘생기고 여자들을 예의 바르게 대해서 인기가 많답니다.”

알현실에 도착할 때까지 와이엇의 보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무슨 말이 오가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십시오.”

응접실 문 앞에 섰을 때, 셀리나가 조용히 속삭였다. 캘리는 왜? 하는 눈으로 묻자 셀리나가 다시 말했다.

“오늘 모인 귀부인들은 모두 왕비님을 추종하는 여자들입니다. 왕비님께 잘 보이려고 공주님을 깎아내리거나 모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캘리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기 싫었다. 하지만 왕비가 청한 자리니, 마냥 거절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왔는데…….

방금 전, 마주친 라이칸의 차가운 눈빛 덕에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데, 연달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얹히는 것 같았다.

“잘하실 겁니다.”

셀리나가 용기를 주듯 말해 준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문을 열라는 눈짓을 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셀리나가 안에 대고 말했다.

“공주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여자들은 캘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처음에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 후로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눈을 마주치는 여자는 없었다.

연회에서는 머리색이 신비롭다고 말해주던 남작부인도, 피부가 비단 같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던 자작부인도, 뜰에서 만났을 때 온실 화초를 키운다며 나중에 함께 보자고 말해 주던 백작부인도. 모두가 지금은 적이었다.

모두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왕비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하고 있었다. 반면, 여자들의 끊임없는 칭송에도 회색 눈동자는 그저 차갑기만 했다.

“왕비님. 오늘 아침, 코스마 왕국의 스왈트 왕자가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백작부인이 그 말을 꺼낸 건, 캘리가 무심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래요. 아침 일찍, 왕자가 귀한 선물을 가지고 왔더군요.”

“코스마 왕국은 태피스트리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데, 그런 종류입니까?”

남작부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자 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탄자와 벽에 거는 장식품을 가져왔더군요.”

“어떻던가요? 소문처럼 그렇게 훌륭하던가요?”

“짜임이 촘촘하고 수놓아진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바닥에 깔지 못하고 상자 위에 걸쳐놓았어요.”

“어머. 정말 궁금하네요.”

남작부인이 조금 과하게 반응해 주자 옆에 있던 백작부인이 나섰다.

“전 그보다 스왈트 왕자가 디콘스에 방문한 진짜 의도가 궁금합니다.”

부인들이 모두 백작부인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백작부인이 캘리를 보았다가 이내 왕비를 보았다.

“제 남편, 마고 백작은 스왈트 왕자가 공주님께 청혼을 하러 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무료하게 앉아서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캘리는 흠칫, 굳었다.

“정말요?”

자작부인이 묻자 백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모두의 눈이 왕비에게 향했다. 캘리의 시선도.

탈리아 왕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폐하께서 결정할 문제죠.”

“코스마 왕국은 오스피아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참에 저희 디콘스와 코스마가 결혼으로 맺어져 혈족을 이루면 오스피아에 대한 견제도 되겠군요.”

“맞아요.”

백작부인이 남작부인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코스마 왕국은 남부에서 오스피아 다음으로 큰 나라입니다. 오스피아가 전쟁에서 패한 후엔 코스마 왕국의 기세가 더 커졌어요. 그러니, 두 왕국이 결혼으로 맺어지면 이보다 더 완벽한 협약은 없을 겁니다.”

다시 돌아온 결혼 얘기에 캘리는 한숨을 삼켰다.

난 이미 공작부인이라고요. 나더러 다른 남자와 또 결혼을 하라고?

캘리는 왕비를 흘깃, 보았다.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어서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다.

다시 귀부인들을 둘러보았다.

이들에겐 왕족의 결혼은 이익의 유무를 따지는 협약이다. 당사자의 의견 따윈 상관도 없는.

“왕비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스왈트 왕자가 공주님께 청혼을 한다면 받아들이실 건가요?”

왕비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귀부인들도 모두 캘리를 보았다.

탈리아 왕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를 비롯한 의회에서도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디콘스에도 큰 힘이 되는 결정이라는 걸 알 겁니다. 공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죠. 한 나라의 왕비가 되는 일이니.”

하, 기가 막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왕비는 내가 이미 공작의 아내라는 걸 알고 있다. 폐하가 비록 결혼을 무효라고 했지만,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이칸의 아내였다. 그걸 숨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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